E-mail : juntonggahun@naver.com
뿌리깊은 안동권씨 안권의 광장
>> 안동권씨 > 뿌리깊은 안동권씨


저자가 직접 집필한 '뿌리깊은 안동권씨'를 기반으로 안동 권씨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조상에 관하여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구성하였습니다.

[제1장. 권(權)씨 사성유래(賜姓由來) ] 1) 후백제(後百濟)와 견훤(甄萱)

관리자이메일
1) 후백제(後百濟)와 견훤(甄萱)

신라 최후의 왕인 제56세 경순왕(敬順王) 3년(서기 929),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 즉 지금의 안동(安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견훤(甄萱)은 후백제(後百濟)의 시조(始祖)로 서기 892에서 935년까지인 43년간 재위(在位)한 사람이며, 본래의 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된 사람이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 의하면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이는 확인하기 어렵고 확실하지 아니하다.
어머니의 성씨도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견훤(甄萱)은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 (南院夫人)으로 전해질뿐이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견훤(甄萱)은 "아자개"의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賓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견훤(甄萱)의 출생에 대해, 광주(光洲)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견훤(甄萱)을 지렁이의 후손이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자랄수록 재주나 용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이때는 이미 신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 당하여, 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때였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진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더욱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도적들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견훤(甄萱)에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는 긴 이름을 자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原州)의 도적의 괴수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사방으로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洲)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後百濟) 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다음해에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함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 뒤, 왕건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一吉 ) 민극(閔 )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아량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고려와 후백제는 서로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군사 1만인으로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淸道)으로 옮겼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 경명왕(景明王)은 김율(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하여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安東, 혹은 尙州부근)을 공격하였으나, 성중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왕건(王建)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에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王建)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졌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발한 견훤은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尙州)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永川)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해서, 마침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배풀고 있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고, 왕비(王 )를 능욕하며, 왕족과 궁녀(宮女)를 난행(亂行)한 뒤, 근친 가운데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이며, 왕의 내종(內從)인 김부(金傅)를 왕위에 오르게 하니, 곧 그가 신라 56세의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甄萱)은 닥치는 대로 방화와 노략질을 하며 진군하니 신라 천년의 역사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신라를 도우려 달려온 왕건(王建)도 공산(公山) 싸움에서, 신숭경(申崇謙), 원보(元甫), 김악(金樂) 등의 명장과 수많은 병력을 잃고, 견훤(甄萱)에게 크게 패하여 회군하고 말았다.
기세 등등한 甄萱은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晋州)를 공격하여 3백 여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지금의 軍威)를 공격하여 1천 여인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막강하였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지금의 安東)전투에서 8천 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甄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이 바로 삼태사(三太師)의 돋보인 활약이었다.
그러자 그의 충실했던 신하 공직( 直)이 고려에 투항해 버려 견훤(甄萱)의 하늘을 찌를 기세도 점차로 꺾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1백   여 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 여 필의 말을 잡아가기도 하는 부분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934년 운주(運州)를 공격해서는 오히려 크게 싸움에서 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첩을 두어 10여인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金剛)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 (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을 강주(康洲 지금으 晋州)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 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은 이찬(恒 )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735년 3월에 견훤(甄萱)과 금강(金剛)은 신검(神劍)에게 금산사에 유폐 당하고, 금강(金剛)은 결국 거기서 죽고 말았다.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 딸 쇠복(衰福) ,첩 고비 (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그 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기고 결국 왕건에 의하여 멸망당했는데, 견훤(甄萱)이 망하게된 그 결정적인 실마리는 멀리 고창(高昌: 지금의 안동) 싸움에 이기지 못한데 있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분류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8 5)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 이황(李滉)지음. 관리자 05-01-06 5496
7 4) 삼태사의 유품 관리자 05-01-06 4601
6 3) 화재로 인한 중건(重建) 관리자 05-01-06 4360
5 2) 새 묘우(廟宇)의 건립(建立) 관리자 05-01-06 4356
4 1) 부사(府司)에 있던 삼공신의 묘(廟) 관리자 05-01-06 3880
3 3) 왕건(王建)에게 승리를 안겨준 삼태사(三太師) 관리자 05-01-06 5708
2 2) 고려(高麗)와 왕건(王建) 관리자 05-01-06 4502
1) 후백제(後百濟)와 견훤(甄萱) 관리자 05-01-06 5008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