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뿌리깊은 안동권씨 안권의 광장
>> 안동권씨 > 뿌리깊은 안동권씨


저자가 직접 집필한 '뿌리깊은 안동권씨'를 기반으로 안동 권씨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조상에 관하여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구성하였습니다.

[제1장. 권(權)씨 사성유래(賜姓由來) ] 2) 고려(高麗)와 왕건(王建)

관리자이메일
2) 고려(高麗)와 왕건(王建)

한편 그 시절 북방에서는 왕건(王建)이 움직이고있었다.
그는 고려를 창건(創建)한 고려(高麗)의 시조(始祖)이며,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 출생으로,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 (鐵圓 :지금의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王建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郡縣)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 )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황해를 거처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郡縣)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 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 )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 )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弓裔)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 (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에 궁예를 몰아내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만 했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恒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王建)은 모든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나갔다.
태조 왕건에게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이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開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그때부터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920년)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고려의 새 왕조는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安東)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분류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8 5)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 이황(李滉)지음. 관리자 05-01-06 5496
7 4) 삼태사의 유품 관리자 05-01-06 4601
6 3) 화재로 인한 중건(重建) 관리자 05-01-06 4360
5 2) 새 묘우(廟宇)의 건립(建立) 관리자 05-01-06 4356
4 1) 부사(府司)에 있던 삼공신의 묘(廟) 관리자 05-01-06 3880
3 3) 왕건(王建)에게 승리를 안겨준 삼태사(三太師) 관리자 05-01-06 5708
2) 고려(高麗)와 왕건(王建) 관리자 05-01-06 4503
1 1) 후백제(後百濟)와 견훤(甄萱) 관리자 05-01-06 5008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