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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안동권씨 안권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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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직접 집필한 '뿌리깊은 안동권씨'를 기반으로 안동 권씨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조상에 관하여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구성하였습니다.

[제1장. 권(權)씨 사성유래(賜姓由來) ] 3) 왕건(王建)에게 승리를 안겨준 삼태사(三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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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건(王建)에게 승리를 안겨준 삼태사(三太師)

위에서 말 한 대로 고창(古昌)은 고려(高麗)에 있어서나 후백제(後百濟)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다. 그래서 고려(高麗)는 고려(高麗)대로, 후백제(後百濟)는 후백제(後百濟)대로 고창(古昌)을 차지하고자 했으며, 두 세력은 늘 고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가 고창(古昌) 결전(決戰)에서 이긴 것이, 후백제 견훤의 세력을 제압하게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그 고창(古昌)의 전투에서, 우리 시조의 도움은 절대적 이였던 것이다.
당시 열세였던 왕건(王建)은, 만일 삼태사(三太師)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싸움에 이길 수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大業)을 못 이루었을지도 모르며, 역사는 오늘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지도 모른다.

견훤(甄萱)이 고창(古昌)을 침입할 당시의 사정을 남강권상가첩(南崗權常家牒)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말년에 김행(金幸)은 김선평(金宣平), 張貞弼(장정필) 두 사람과 고창군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견훤(甄萱)이 신라 서울에 침입하여, 병졸을 풀어 크게 노략질하고, 자신은 왕궁에 들어가 좌우부하들을 시켜 왕을 찾아내어 군중(軍中)에 앉히고 협박해서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왕비를 강제로 능욕하고 소년 소녀와 백공(百工)과 병장(兵仗)과 보물을 모조리 약탈해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문하고 왕의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구원하게 되었다.

신라 서울을 침범한 견훤(甄萱)의 군대가 다시 북상하자, 신라를 도우려 온 고려 왕건(王建)은 고창군 북쪽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甄萱)의 군대와 정면 대결을 하게되었다.
기세 등등한 견훤(甄萱)의 군대는 고려태조의 군대를 포위하니, 왕건(王建)의 전세는 매우 불리했다.
이때, 김행(金幸)이 두 사람과 의논하기를,

[견훤(甄萱)은 무도하게도 신라의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고 노략질을 일삼으니,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대 역적이지만, 우리의 병력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니, 원통한 이 일을 능히 보복할 길이 없소.
뿐만 아니고  군사상 요충지를 그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으니 무리하게 싸움을 걸다가는 모든 병졸들이 고기밥이 되고 말 것이오. 그르므로 우리는 이때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오.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은 신라왕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어지러운 상태를 수습하고 도우려하는 기미가 보이니, 왕건(王建)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그의 군대와 협력해서 반역자 견훤(甄萱)을 친다면, 위로는 임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되니, 이렇게 해서 통분(痛憤)을 씻는 것이 어떠하겠소.]

하니 두 사람도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高麗)태조(太祖)에게 성문을 여러 주고 함께 견훤(甄萱)을 칠 것을 말하니, 왕건(王建)은 기뻐하며, [행(幸)은 능히 낌새에 밝아서 귀순(歸順)하니, 권도(權道)와 사리(事理)를 잘 알고 통달하니 가위 권(權)이 옅구나.]하며 기뻐 했다.

이 지방에 지리에 밝은 김행(金幸)은 온 힘을 다해 왕건(王建)의 군대와 함께 힘을 합쳐서, 병산(甁山: 지금의 와룡면 서지리 사곡)에서 견훤의 군대를 맞아 협공하니, 견훤의 군대는 크게 폐하고 달아났는데, 그 뒤를 쫓으니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투항하여 왔다.
김행(金幸)공의 슬기로운 판단과 용감한 공격의 협조로 그 싸움에서 크게 이긴 왕건(王建)은, 김행(金幸)공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고, 930년 정월 논공행상(論功行賞)하는 자리에서 우리 시조를 가리켜,

[능히 역사(歷史)의 흐름과 기미(機微)에 밝아 전도(前途)를 먼저 예측하여 기회(機會)를 놓치지 않고 권도(權道)로서 고려(高麗)와 연합하여 신라왕실의 원수를 갚고 도탄에 빠진 백성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하였으니 권도(權道)가 통달(通達)하였다.]

하며 권도권자(權道權字)로 성(姓)을 내리고, 그를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태사(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는 최고의 벼슬로 봉했으며, 군(郡)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삼고,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게 되니 안동권(安東權)의 본향(本鄕)이 안동이 되었다.

김행(金幸), 김선평(金宣平), 張貞弼(장정필) 세 사람이 모두 똑 같이 고려창업에 공이 컸지만 특히 김행(金幸)에게만 권(權)으로 사성(賜姓)한 것은, 그가 특별히 기미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한 슬기와 탁월한 인격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高麗) 건국(建國) 초기에 일어난 안동 권(權)은 천년 세월을 이 땅에 깊게 뿌리 박고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빛나는 역사를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안동(安東) 권(權)의 시조(始祖)는 김행(金幸)이며, 신라 왕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김행(金幸)의 웃대에 대한 정확한 생몰(生沒) 연대와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다.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은 정일품(正一品) 벼슬로서 정승(政丞) 반열의 윗자리며, 아보공신(亞父功臣)은 국부(國父)의 버금가는 공신 벼슬이고, 태사(太師)는 정일품(正一品) 가운데 으뜸가는 벼슬로 왕(王)의 스승격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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