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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안동권씨 안권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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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직접 집필한 '뿌리깊은 안동권씨'를 기반으로 안동 권씨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조상에 관하여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구성하였습니다.

[제2장. 태사묘 ] 3) 화재로 인한 중건(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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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재로 인한 중건(重建)  

1721년 3월 16일, 안동 서문(西門)에서 일어난 큰불로 안동부는 불바다가 되었으니, 당시의 기록에 500여호가 연소되었다고 한다.
그 불로 인해 관청(官廳)이 다 없어지고, 부사(府司)도 또한 화재를 면하지 못하고 탔으나 다행이 신위를 모신 묘우(廟宇)만은 타지 않고 보전되었으므로, 위판(位版)을 무학당(武學堂)으로 옮겨 모시고, 직후 삼태사(三太師)의 후손들과 지방의 덕망 높은 사람들이 의논해서, 중건(重建) 공사를 의논하고 중건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착공 1년만에 다행히도 옛 모습대로 완공되었다.
그 뒤 6 25 동란 중에 불탄 것을 1952년에 재건에 착수하고 1958년 9월에 완공하여, 지금의 묘우(廟宇)인 숭보당(崇報堂), 전사청(奠祀廳), 동서재(東西齋),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 보물각인 경모루(景慕樓), 차전각(車戰閣) 등을 갖추게 되었고, 모든 당우가 다 정비 된 것은 1563이었다.
1972년 12월 10일 지방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되었다.(안동지에서)

문헌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김행(金幸)이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경주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였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이 천인무도한 견훤(甄萱)을 토벌하고자 신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왕건의 군대와 견훤의 군대가 우선 팔공산에서 싸웠으나 왕건이 크게 저서 안동으로 피해 왔다. 후퇴한 왕건의 군대와 추격한 견훤의 두 군대가  병산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김행이 김선평, 장정필과 상의한 끝에 불리한 고려를 도와 신라의 복수를 꾀하였다.
삼공(三公)의 도움으로 이 싸움에서 이긴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김행(金幸)의 용기를 칭찬하여 권(權)씨로 개성(改姓)하게하고 김선평(金宣平)과 장정필(張貞弼)을 모두 태사(太師)에 봉한 뒤 안동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사당을 지어 부민(府民)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당시부터 천여 년간 안동 권씨 측에서 묘사를 주관하였으나 영조 때 왕명으로 3공신의 자손은 동일한 것이니, 삼태사(三太師)의 자손은 제사도 공동관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그 뒤로부터 삼태사의 자손들이 함께 모여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삼공신의 묘인 태사묘(太師廟)는 지방 사우(祠宇)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 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중수(重修) 할 때에도 제도(制度)를 변경하지 않았으므로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알아보는 대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典故大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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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 이황(李滉)지음. 관리자 05-01-06 5495
4 4) 삼태사의 유품 관리자 05-01-06 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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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부사(府司)에 있던 삼공신의 묘(廟) 관리자 05-01-06 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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