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軒(이헌) 生卒未詳
永川人 官 軍器小尹
영천 이씨가 예안현에 처음 살게 된 것은 공이 군기소윤을 지내다가 예안현 봉수산 남쪽 사천 마을에 자리 잡고 살면서부터라고 한다.
공의 아들 의흥현감 坡(파)가 분천으로 이사를 가서 살면서부터 그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공의 묘소와 부인의 묘소도 분천에 있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청룡두 미암하의 작은 개울에 龜巖(구암)이 있고, 그 위에 화개가 있어서 자손이 번성한다 하였다는데, 임진왜란 때 당나라 군대들이 이 바위를 水口(수구)에 굴러 떨어뜨리고 부터는 부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의 명신 농암 현보는 공의 현손이며, 선조 때 학자 간제 덕홍은 농암의 從孫(종손)이다.
少尹公墓在慶尙道禮安縣 西十里許 烽燧山南 沙川洞也 字局 辛坐之原 艮破立表石
夫人墓在 乾位左邊越山 相望處 亥坐之原 巽破立表石
東距 禮安縣十里 汾川二十里 南距 安東府四十里 西距 瓮泉驛二十里 西北距 榮川界十里 北距奉化縣 六十里
享祀每歲以三十月上旬正式
山圖後記
夫人墓 靑龍頭層巖下 小溪中有龜巖 巖號爲華蓋堪與衆皆言 子孫之蕃行 以此巖之在於水口也 世傳龍蛇之亂 爲唐人所擠下 而水中 自此以後子孫不振 故先父兄 謀欲上覆 累次試事而未果 哲廟正月日 遠近諸宗竭力擠上 記事一冊藏在齋舍
<해>
소윤공의 묘는 경상도 예안현 서쪽 10리 봉수산 남쪽 사천동에 있으며 신좌 언덕 간파에 표석을 세우다.
부인의 묘는 乾位(건위)에 있으며, 좌변 산 넘어 바라보이는 해좌 언덕에 표석이 서 있다.
동으로는 예안현과 10리 떨어져 있고, 분천과는 20리 떨어져 있으며, 남으로 안동부와 40리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옹천역과 20리, 서북으로는 영주 경계와 10리, 북쪽으로 봉화현과 60리 떨어져있다.
향사는 매년 3월과 10월 상순에 정해서 행하고 있다.
산도후기
부인의 묘 앞에는 청룡두 바위아래 작은 개울이 있는데, 개울 안에는 龜巖(구암)이 있고 암 위에는 화개가 있었는데, 가문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은 이 바위가 수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당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물속으로 밀어 떨어뜨린 이후로는 자손들이 부진하므로, 옛날 부형들이 바위를 위로 들어 올리려고 몇 번을 시도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철종 경술정월 원근의 많은 종인이 힘을 다해 위 기사를 적은 한 책을 재사에 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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