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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金方慶(김방경) 康宗 1年 壬申(1212)~

청남

 

金方慶(김방경) 康宗 1年 壬申(1212)~

忠烈王 26年 庚子(1300) 89.

 

고려사절요 충렬왕 38년 정자 8월조에 上洛公(상락공) 김방경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며 성품이 충직하고 엄숙하며, 말이 적고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아니한다. 많은 古典(고전)을 알고 능히 판단을 잘하며 , 감가고 검소함을 권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탄식하였다. 나이 89에도 머리가 세지 않고 기골이 남다르며, 능히 추위나 더위에도 병나지 않고 살다가 조용히 떠나너 뒤에 忠烈(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라는 글이 상락공이 서거한 다을 史官(사관))이 평한 글이 있다.

미루어 층직하고 憂國(우국)하였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의 묘소는 녹전면 구송리 능 안에 광삼김써 증 참판 孝盧公(효로공)連墳(연분)으로 있는데 오래도록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조 중기에 와서 찾았다.

舊碑(구비)戶牌碑(호패비)식인 主碑(주비)었으나 자획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고 병오년(1963)에 다시 세운 新碑(신비)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 金方慶之墓(김방경지묘)라 전면에 큰 글씨로 각하였고 皇明(황명) 만력 31년 임인 (1602) 의 구비 陰記(음기)를 각하여 두었으며 신도비는 예안 元川(원천) 사이 국도변에 이병도 박사 찬의 현대비를 건립하여 공의 공적을 기록하여 추모하고 있다. (제향은 음력 1O9)

구 안동 김씨의 계보를 보면 ()을 파조로 하늘 忠烈公(충렬공)파가 가장 번성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먼 고려말기에서 조선조 중기기에 활약한 분들이많다.

그러나 현재 안동지방에는 그 중 익원공파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墓碣

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僉議中贊世子師上洛郡開國公諱忠烈 金方慶之墓

 

碑文

安東金氏 系出新羅敬順王 爲九世孫 生麗代 使高 元 忠烈朝 勳業茂著轟輵 古今 載在國史 及行狀 斑斑可考 姑撮其表 表子 言之則 忠直信厚 得於天性制行也 勤儉寡黙 立朝也 竭忠奉公 至於行師有律 戰克攻取 珍島之役 日本之征 比其大較 內外苗裔 趾美鴻赫三百年玆 豈非德厚者流光歟 墓在禮安治西知禮村 神道碑 舊有麗王所立 歲久無微 姓孫禮生 曾監此縣 竪竭爲表 今並與此竭而破折 嗚呼 後之知人 何以知公之墓乎 參奉金圻 生員金坪 以外裔 居墓下 與姓孫參奉金慶建 暨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且加封植 來於余 余於公爲母十三代孫 嘗拜公之墓 爲之助其資 仍識 其梗槪云

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 李時發 識

宣務郞 前行濟用監參奉 曹友仁 書

明皇萬曆三十年 壬寅 二月 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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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첨의중찬세자사상락군개국공휘충렬 김방경지묘

 

안동김씨의 계통은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왔으니 공은 그 19세손으로서 고려 때에 출생하여 고종, 원종, 충렬왕 등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훈업이 크게 나타나서 고금을 울렸음이 국사와 행정에 실려 있음을 잘 알 수가 있으나, 우선 그 특수한 것만 뽑아서 말한다면, 충직하시고 신후하심은 천성에서 우러났으니 처세를 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시며 말이 적고 조정에 나가서는 충을 다헤서 봉공하시며, 군사를 통솔함에는 엄한 규율이 있어서 싸워 이기고 공격하면 쟁취하심은 진도를 평정하고 일본을 정벌하심을 봐서 크게 알 수 있다.

그 후예 내 외손들의 밟아 온 자취가 훌륭하고 빛남이 지금까지 300년을 지냈으나 어찌 이른바 후덕자의 혜택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 지례촌에 있으며 신도비는 옛날 고려왕이 세운 것으로 세월이 올되어 실징 할 수 없으므로 성손 예생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비석을 세워 표시를 하였더니 이제 이 비석까지 부러져 버렸으니 아!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공의 묘소인줄 알 수 있을까? 참봉 김기와 생원 김평은 외후손으로서 묘아래 살면서 성손인 참봉 김경건과 더불어 근방에 사는 여러 자손들이 다른 비석으로 버꾸고 또한 봉식도 더하기로 계획하여 나에게 와서 말하니 이 일을 위하여 경비도 보조하고 아울러 그 경위를 기록하노라.

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지음식

선무랑 전행제용감참봉 조우인 글 씀

명황만력삼십년 임인 이월 일 세움

 

上洛君忠烈公(김방경) 신도비

충렬공 신도비는 1312년 왕명(충성왕)에 의해 세웠다. 고려 시대에 왕명으로 세운 신도비로서는 유일하지만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없어져 벼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충렬공이 일본을 장발 한 것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되었을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을 것으로 문중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현 신도비는 후손들에 의해 19711126일에 충렬공의 묘소 입구인 구송 삼거리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89127일에 심도비각을 지어 비를 보호하고 있다

신도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문 내용>

굳센 풀은 모진 바람에서 알 수 있고, 곧은 신하는 板蕩中(판탕중)에서 볼 수 있다.는 옛 말이 있다. 이는 아마 저 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한 판국에 出將入相(출장입상) 盡忠竭力(진충갈력) 능히 이를 극복하여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긴 고려조의 金忠烈公(김충렬공)과 같은 이름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공의 휘는 方慶(방경), 자는 本然(본연), ()은 안동이며, ()는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印(효인)이라. 공은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특이하고 숙성하여 고종 1416세에 산원겸식목록사를 제수바다 仕路(사로)에 나서다. 그 후 공은 승진하여 거듭 감찰어사에 ()하여 강직한 기풍을 보였고 고종 38(37)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있을 때는 몽고 병의 침입을 피하여 葦島(위도)에 주민을 피난시켜 경작하게 하다. 그 후 남경유수 서북면병마사를 역임, 간곳마다 선정을 행하고 들어와 병부상서 추밀원부사의 요직을 띠다. 이때는 고려가 이미 원(몽고)의 절제를 받고 내외적으로 복잡한 환경 속에 있었으나 공은 오직 충직과 성실로 임무를 다하니라.

원종 11(59) 삼별초란에 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진도에 있는 적을 쳐 이듬해 이를 소탕하고 그 공으로 수대위중서시랑평장사(제상)에 승진되다. 적의 잔당이 탐라로 들어감에 원종 13(61) 공은 또 행영중군병마원수로서 원나라 군과 합세하여 상륙작전을 감행, 이듬해 드디어 난을 평정하고 凱歌(개가)하니 원종은 공을 慰賀(위하)하고 紅鞓(홍정)을 하사하고 시중(수상)()하다.

同年(동년) 7월에 元帝(원제)의 부름을 받고 ()에 가니 ()는 공을 예우하여 金鞍綵服(금안채복)과 금은을 하사하고 총애함이 극진, 돌아와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加授(가수)하다. ()의 요청으로 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많은 戰船(전선)을 이끌고 대마도, 이끼도를 攻破(공파)하고 내키어 九州(구주) 북안을 치다가 태풍을 마나 돌아와 포로와 기물을 바치니 왕은 공에게 上柱國判御史臺事(상주국판어사대사)를 가하고 동년(충렬왕 원년)에 관제개혁으로 인하여 천지중찬(시중)상장군판전이감찰사사를 () 하고 또 이듬해 원제로부터 최고무공훈정인 虎頭金牌(호두금패)를 받았다.

충령왕 7년에 재차 일본정벌의 명을 받은 공은 元軍(원군)과 합세하여 하꼬다를 공격 중 또 태풍을 만나 돌아오니라. 공은 연로를 이유로 누차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이를 불허하고 元帝는 공에게 중선대부관령고려도원수를 제수하였으며(충렬왕 6) 동왕 9(72)에 또 致仕(치사)하고 다시 상락군개국공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를 봉하였다.

공은 치사한 뒤에도 憂國(우국) 如家(여가) 국가에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왕으 자문을 받더니 同王(동왕) 26년 경자(1300) 816일에 향년 89세로 졸하매 조야가 모두 통탄하니라. 충성왕 즉위초(1307)王旨(왕지)를 내려 고 상락공은 사직에 유공함이 帶礪(대려)와 같다.하며 선충협모정정국공신벽상삼한대광을 追增(추증)하고 휘를 忠烈(충렬)이라하고 명하여 신도비를 세우게 하다.

오호라! 공은 실로 우국진충으로써 시종일관한 위인이었도다. 그 그릇과 도량은 弘大(홍대)하여 小事(소사)에 구애치 않았고 盛寒(성한) 極暑(극서)에도 질병을 몰랐다하니 공의 장수가 여기에 연유함을 알겠도다. 忠直信厚(충직신후) 嚴毅(엄의) 寡言(과언) 不怒(불노) 不尤(불우)의 군자적 성격 문무겸전 박식고전 처사무착의 才識(재식)과 지략 또 그 律己(율기)는 엄격하여 낮에는 누어본 일이 없었다 하니라. 이로써 공은 그 다사한 난국을 극복하여 큰 공적을 세웠으니 그 重重(중중)爵號(작호)諡號(시호)其宜(기의)를 득하였다 하겠도다.

공의 아들에는 (), (), (), ()이 있어 장남 ()은 관이 부지밀사에 이르고 그 뒤에 역시 명공거경으로 연연하여 동국 화문대족을 이룩하니라.

공의 옛 신도비가 불행이도 임진왜란에 회손 유실되어 그 후 개수치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 김씨대종회에서 이를 재건코자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나는 일찍부터 공의 숭고한 전신과 원만한 인격을 추모하는 터이라 不文(불문)이나마 삼가 약술하였노라.

서기 197110월 일

학술원장 문학박사 李丙燾(이병도)

후세손 의학박사 金思達(김사달)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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