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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禹倬(우탁) 元宗 2年 壬戌(1262)~忠惠王

청남

 

禹倬(우탁) 元宗 2年 壬戌(1262)~忠惠王

復位 3年 壬午(1342) 81

 

禹倬(우탁)은 단양촌 적성면 품달리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진사 합격하고 충령왕 16(139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영해시록, 사인, 성균관제주, 집현전직제학을 역임한 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易書(역서)를 갖고 와서 모두 해석을 하니 세상 사람들이 易東(역동)선생이라 불렀다.

監察紏正(감찰두정)으로 충성왕이 숙창비를 ()하니, 지부간언 하였고, 만년에 예안현에 퇴거하여 여생을 마쳤는데 선생의 도학, 예학, 절조의 삼대 덕행을 기리어 선생이 살던 곳을 知三里(지삼리)라 하였으며 지금도 그 곳에 유허비가 있다.

선생의 묘소도 중간에 실전된 것을 후손이 찾아 비석을 세우고 鼎山齋(정산재)를 지어 수호하고 있다. 묘소는 예안면 정산리에 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3410월 기축조에 충성왕이 숙창원비를 범하자, 다음날 감찰두정 禹倬(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 위에 앉아 간하니, 근신들은 감히 상소문을 읽을 수 없었다. 우탁은 큰 소리로 경들이 왕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격에 맞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나쁜 일을 만나면,경들은 그것은 간해야 하는데 알고도 가만히 있는 죄를 알아야 한다.“ 하니 좌우가 모두 벌벌 떨고 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고, 숙비를 멀리 하였다.

우탁은 단산 사람이며 등과 초 영해 사록이 되었는데, 군에 요사스러운 귀신이 있었고 그 사당의 이름을 八鈴(팔령)이라 하는데, 백성들은 미혹되어 섬기고 있었다. 우탁이 와서 즉시 팔령 방울을 부수고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음흉한 미신은 드디어 단절되었다.

늙어서 안동 예안으로 물어났으나 충숙왕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재소환 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했다. 우탁은 經史(경사)에 통달하고, 주역을 깊이 연구해서 卜筮(복서)에도 통달했으며 程子(정자)의 학문을 동방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우탁은 약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易學(역학)을 연구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의 학문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관직은 성균관제주 까지 올랐고 81세에 졸하였다. 라고 공의 행적에 관해 적혀 있다.

 

墓碣銘

前面大字高麗祭酒文僖公禹先生諱倬之墓

夫人永川李氏祔

 

碑 文

我東自父師之敎 號稱文獻而羅麗以還 釋敎滔天 間有名世者 亦不過記誦詞章而已 及麗氏之季 有若祭酒 禹先生者出 得不傳之學於遺經 倡明義理 啓發關鍵 後二百有餘歲 得退陶夫子而先生之道 益著 旣以爲孔孟心學之徒 又爲之建院立祠 名以易東 於是寧之丹山 丹之丹巖 安之龜溪 杖屨所及 莫不立廟而崇報焉 惟其冠屨之藏 世遠失傳 先王 丙午 安東府北 鼎井里人 卜葬於村後古墓下 得埋碣 上下剝落而猶有先生姓諱及墓字 其人秘之旣數年而事遂發 訟于官 按驗得實 於是 敬修奉塋 禋享如儀 旣而後孫 龜協等 治石而致之墓 責銘於㙖 顧晩生末學 何敢當是役 蓋三辭而不獲命 謹按麗史而序之 曰先生 諱倬 字天章 丹陽人 父鄕貢進士 天珪 先生 以高麗 元宗壬戌 生 忠烈王 庚寅 登文科 初調寧海 司錄 郡有淫祠 名八鈴 惑民甚瀆 先生 至卽碎而沈之海 妖遂絶 忠宣王 初嗣位 有大失德先生 以監察糾正 白衣持斧上書 諫 近臣 展疏不敢讀 先生勵聲 曰卿 爲近臣 未能格非匡救 逢惡至此邪 左右震懾 王有慚色 後 退老于禮安縣 忠肅王 嘉其忠義 再召不起 先生 通經史 尤深於易 程傳 初來 無能知者 先生 閉門參究 得其旨 以敎授生徒 義理之學 始行 官至成均祭酒 進賢館 直提學致仕 忠惠王 後三年壬午卒 壽八十一 諡文僖 墓子坐 夫人永川李氏祔 二子元光元明 俱登文科 孫曾以下不盡錄 嗚呼 今距先生 四百六十有七年 事行本末 無從以得其詳 然良史 表章於前 大賢闡明於後 斯可以詔於無窮而堂斧之得之久遠又豈非天也耶 銘曰

天啓吾東 先生以生 有覺先生 昏衢日星 妖絶海邦 直震王庭 卷懷丘園 閉門學程 羲文妙諦 孔孟心學 發揮性理 中行獨復 進跲退貞 業廣功崇 寔闡洪荒 百世興風 熙我文猷 惠我光明 我受陶翁 不可改評 鼎井之阡 君子攸藏 旣晦復顯 愈久愈光 銘以昭之 山高水長

 

묘갈명 병서 - 이우

우리 동방은 부사 기자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름하여 문헌의 나라라고 칭하였는데 신라, 고려 이래로 석씨의 교가 도도히 성행하였으며 간혹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있었으나 그 또한 기억하고 외우는 것과 시가와 문장에 그쳤을 뿐이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좨주 우 선생 같은 분이 태어나시어 전하지 못하였던 학문을 남은 경서에서 얻어 의리를 제시 주창하여 밝히고 긴요한 비결을 얻어 깨우쳤으며 이백 여년 뒤에 퇴도 선생을 얻어 선생의 도가 더욱 밝게 나타났다.

이미 공맹심학의 무리로 추존하고 또 선생을 위하여 서원과 묘우를 세워 역동서원이라 이름하니 이에 영해의 단산, 단양의 단암, 안동의 구계 등 선생의 자취가 미친 곳은 사당을 세워 존경하고 승배하며 제사하지 아니함은 없었다.

오직 관과 신을 모신 묘지만은 세대가 멀어 전함을 잃었다가 선왕 병오(1786)년에 안동부 북쪽 정정리 사람이 마을 뒤 고묘 아래에 장사하고 묻혔던 묘갈을 얻으니 상하는 떨어졌으나 선생의 성휘와 묘자가 각자되어 있는 것을 그 사람이 감추었다가 몇 해가 지난 뒤에 일이 발각되어 관가에 호소하여 증거를 살펴 실지의 묘소를 찾게 되니 이에 공경하여 봉분을 보수하고 의례를 갖추어 제향하였다.

얼마 뒤에 후손 구협 등이 비를 다듬어 묘에 세울 때 우에게 비명을 맡기니 생각건대 뒤늦게 나서 배운 몸으로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리요하며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삼가 고려사기를 살펴 서하오니 선생의 휘는 탁이요, 자는 천장이니 단양인이며 부는 향공진사인 천규이다.

선생이 고려 원종 임술(1262)년 에 나서 충렬왕 경인(12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영해고을 사록이 되었다. 본래 영해군에는 팔영이란 이름을 가진 무당의 신사가 있어 백성을 어지럽게 홀려 풍속을 더럽히는 것이 심하거늘 선생이 으르러서 부수어 바다에 던지니 드디어 요망한 것이 없어졌다.

충선왕이 처음 왕위를 이어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선생이 감찰규정의 직책으로 흰 옷에 도끼를 가지고 소를 올려 간하니 근신들이 소를 펴들고도 감히 읽지 못하는 지라 선생이 크게 꾸짖어 가로되 경들은 근신이 되어서 임금의 잘못을 고쳐 바르게 구하지 못하고 악에 뜻을 맞추어 여기에 이르도록 하였느냐고 하니 좌우가 모두 떨고 임금도 무참한 빛이 있었다. 그 뒤 예안 땅에 물러와 노경을 보낼 때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경서와 사기에 능통하고 더욱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정자가 지은 주역의 전문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능히 아는 자가 없었는지라 선생이 문을 닫고 연구하여 그 중요한 취지를 알아 생도들을 가르치니 의리의 학문이 비로서 동방에 행하여졌다. 벼슬이 성균좨주, 진현관직제학에 이르러 치사하고 충혜왕 후3년 임오(1342)년에 졸하니 향년 81세였고 시호를 문희공이라 하였으며 묘는 자좌로 부인 영천이씨와 합장하였다. 슬하에 2자가 있어 원광과 원명이니 모두 문과에 올랐으며 손자, 증손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 지금 선생과의 서로의 거리가 467년이라 일의 자취와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자세히는 알 길이 없으나 그러나 올바른 사기가 앞에서 표현되었으며 대현이 뒤에서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가히 무궁한 가르침과 이끌어줌이 될 것이며 묘소를 오랜만에 찾았음이 또한 하늘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에 가로되

 

하늘이 우리 동방 열어주어

선생이 나셨도다.

깨달음이 있는 선생

어두운 거리의 해와 같고 별같았네.

해방에 요술이 없어지고

왕정에 곧음이 진동했네.

덕을 품고 구원에 묻혀 살면서

문을 닫고 정전을 배웠으니.

복희와 문왕의 오묘한 요결이요

공자와 맹자의 심성의 학문이라.

성리학을 발휘하고

중용을 행하여 홀로 회복했네.

나아가면 엎어지고 물러와서 바로 되어

업은 넓고 공은 높았도다.

너른 것을 천명하여

백세에 풍교 일으키니

우리 문헌 빛났으며

우리 광명 주셨도다.

내 도옹에게 받았으니

고쳐 말을 못하리라.

정정의 언덕은

군자의 유택이며.

지난날 숨겼다가 다시 새로 밝혔으니

더욱 오래도록 더욱더 빛나리라.

글을 새겨 밝히오니

산처럼 높으고 강처럼 깊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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