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洪亮(손홍량) 忠烈王 13年 丁亥(1387)~
禑王 5年 己未(1379) 93. 一直人 諡 靖平
고려사절요 우왕 5년(1379) 秋(추) 7월조에는 전 판삼사 孫洪亮(손홍량)이 졸하였다,라고 있다. 公(공)은 一直縣(일직현) 사람으로 지금의 一直面(일직면) 松里洞(송리동)에 옛 유적이 남아 있고 공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구에는 연조 때 세운 유허비가 있으며 공을 제향 하는 陁陽書院(타양서원)도 있다. 공은 1309(충성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삼사에 이르고 1349(충정왕 1년) 福州(복주) 부원군에 봉하여 졌으며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하였을 때는 고령인데도 왕을 극진히 맞이하여 亂(난)이 평정된 뒤에 왕은 공의 초상을 친히 그려 하사하였는데 그 畵像(화상)이 영가지 기록에 의하면 臨河寺(임하사)에 전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공의 묘소도 중년에 실전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여 사회에 변혁이 일어나서 후손들이 일직현에 계속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靖平公遺墟碑 陰記】
公諱洪亮。福州陁陽縣人。福州。今之安東府也。本姓荀。始祖幹。奉新羅王。次一直郡。遂爲一直人。後避高麗顯宗諱。賜姓孫氏。曾祖世卿。尙衣直長同正。祖衍。典客令。父滂。閤門祗候贈金紫光祿大夫門下評理,上護軍。母安東曹氏。密直副使上護軍松之女。忠烈王丁亥。公生于一直里第。幼雋穎。長益䧺偉。慨然有經世之志。忠宣朝。登第。歷事忠肅,忠惠。至忠穆王時拜相。公忠藎盡節。爲政務寬大。得大臣體。忠定王辛卯。致仕。歸永嘉。從山水之樂。時年六十餘。恭愍王壬寅。紅巾亂作。王奔福州。公以野服。迎於道。王嘉之。甲辰。公入都賀平亂。王喜。手寫公眞。並几杖以賜。令二子扶掖出端門。皆異恩也。及歸。傾朝出餞。一時名碩如牧隱,益齋諸公。爲詩文以張大。辛禑五年己未七月。公卒。年九十三。官至推誠保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上護軍直誠君。贈謚靖平公。公以令德崇勳。爲六朝元老。亨大耋以終。顧家藏文獻所傳。其見於東史者。大畧如此也。公配陁陽郡夫人陽城李氏。開城尹梴之女。生二男二女。男得壽密直代言,得齡典書。女適興海君裵佺,通禮門副使金悟。內外子孫多名賢。不可盡書也。公之眞。佚於兵火。獨公遺址在一直。士林想慕公無窮。將樹石以表之。嗚呼。公告老歸十二年。而有紅賊之變。公沒十四年。而麁運訖。公之進退存沒。關國家治亂興亡。盖可見矣。抑公年未至而退。若有以見於幾先者。而又能以壽考。先圃牧諸賢以沒。身與名俱全。詩云。旣明且哲。以保其身。又曰。愷悌君子。神所勞矣。公之謂也。
<해>
공의 휘는 洪亮(홍량)이며 복주 陁陽縣(타양현) 사람인데 福州(복주)는 지금의 안동부이다. 본래의 성은 荀(순)이고 시조는 幹(간)이며, 신라왕을 받들어 일직군에 왔다가 드디어 일직 사람이 되었다.
뒤에 고려 현종의 휘자를 피해 孫(손)씨로 사성하고, 증조 世卿(세경)은 尙衣直長同正(상의직장동정)을 지냈고 조부 衍(연)은 典客令(전객령), 부친 滂(방)은 합문지후증금자광록대부문하평리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母(모)는 안동 曹(조)씨인데 밀직부사상호군 松(송)의 딸이다.
충렬왕 정해년 공은 일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자람에 따라 더욱 雄偉(웅위)하여졌으며 개연히 세상을 경영 할 뜻을 세웠다.
충성왕조에 등과하고, 충숙왕, 충혜왕과 충목왕조에 이르기까지 봉직하였으며, 공의 충절과 지조는 굳었으나 政務(정무)에는 관대하여 대신들의 예우를 받았다.
충정왕 신묘년에 사직하고 永嘉(영가)현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살았는데, 그때 나이 60쯤 되었다. 공민왕 임인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이 복주로 피난을 왔는데, 공은 평복을 입고 길가에서 왕을 맞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갑진년 공이 도성에 들어가, 난이 평정되었음을 하례하자 왕은 기뻐하며 공의 眞影(진영)을 그리고 함께 几杖(궤장)을 하사하고, 두 자식에게 명하여 부측해서 나가라고 하니 모두 은혜에 감사하고, 돌아와 다시 아침에 나가 전별하였다.
한때는 이름이 높은 牧隱(목은), 益齋(익재)와 같은 많은 사람들과 詩文(시문)을 하며 이름을 널리 펼쳤다.
辛禑(신우) 5년 기미 7월, 공은 93세로 졸하였는데, 관직은 추성보절좌리공신 삼중대광판삼사사상호군직성군 이었고 시호는 靖平公(정평공)이다.
공은 덕과 공훈으로 육조의 원로가 되었으며 큰 어른으로서 끝을 잘 마쳤다.
집에 전해오는 소장된 문헌으로 살펴보니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의 配(배)는 陁陽郡(타양군)의 陽城(양성) 李氏(이씨)인 개성윤 梴(천)의 여식이다.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得壽(득수)는 밀직대인, 차남 得齡(득령)은 전서, 딸은 興海君(흥해군) 裵佺(배전)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동례문부사 金悟(김오)의 처가 되었다. 내외손 중 많은 명현이 나와 다 기록 할 수 없을 정도이다. 士林(사림)은 공을 그리워하고 추모함이 무궁하여 장차 樹石(수석)으로 표를 하려 했다.
오오! 공이 늙어서 귀향한지 12년이 딜 때, 홍건적의 변고가 생겼고, 공이 죽은 지 14년에 불운이 닥쳤다. 공의 진퇴와 存沒(존몰)은, 국가 치란과 흥망이 가히 같이 한다고 보였다.
공의 나이에 은퇴하지 아니하지 못하고, 앞일을 미리 예견한 다음, 마땅히 목숨을 생각해야 한다. 먼저 圃隱(포은) 등 많은 현인들은 이미 죽었지만, 몸은 죽어도 이름은 모두 온전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밝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여 자기 몸을 보전하며..」라 했고 또 말하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라고 공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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