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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林撲(임박) 忠肅王 14年 丁卯(1324)~禑王

청남

 

 

林撲(임박) 忠肅王 14年 丁卯(1324)~禑王

5年 丙辰(1376) 50. 號月汀 吉安人 官 大司成

 

고려사절요 우왕 원년(1375) 5월조에 대사성 李寶林(이보림)은 임의로 행동한 林撲(임박)을 탄핵하여 관직을 몰수 하고 庶人(서인)으로 패해서 길안현으로 유배시켰다.라고 있다. 대사성이 月汀(월정) 林撲(임박)北元(북원)사자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여 吉安(길안)에 유배했다고, 우왕 2년 병진 11월조에 執義(집의) 金承得(김승득)知申事(지신사) 金允升(김윤승), 池奫(지윤)에게 말하기를임박이 省事(성사) 일을 하지 않았는데, 원 나라 사자를 영입하라는 왕의 뜻을 어긴 것이니 이는 죄가 된다.”라 하였다 한다.그르므로 지윤이 해롭게 했다고 한다.

 

()은 길안 임씨의 顯祖(현조)로 아래 신도비문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공민왕 9년 경자(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 대사성을 지냈으나 이인임, 지연 등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현재 후손이 청송부 동면 이전동에 300호 정도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으나 길안에 계속 사는 후손은 몇 호에 지나지 않는다.

공의 묘소도 실전되었으나 후에 樵童(초동)의 말에 임정승 묘라 구전되어 오던 것을 깊이 살펴 찾아내었다.

 

高麗中書舍人大司成月汀 林公神道碑檀紀4308(1975) 金文大撰立碑

 

永嘉之屈火縣南 山下里 敍巖原有封 馬髠而崇四尺者 寔惟高麗中書舍人 國子先生月汀 林公 萬世之藏也 公歷敭淸顯 聘使專對 當有立朝事蹟 傳世文字 多所可觀者 而屢閱桑海 雲仍不振 遠離鄕邦 文獻無憑 羨道儀物 尙未之遑焉 迺者 遠離賢裔 合謀同聲 表竭于墓前 竪碑于新道 石旣具 謬囑文大與相其役 自顧愚陃 何敢與聞於曠古韙蹟乎 辭而匪堪者累 而其請愈勤 謹據按本 而叙次之曰 林之氏安東 厥惟古矣 新羅奈勿王 時有諱檀 以平章事兼都廉察事 時弁韓張鐘馗叛 公討平之 及公下世 王 親臨撫屍曰 寡人之爲寡人 實公之力也 封錦東君 歷累世有諱 朱興 高麗高宗時 蒙兵犯龜州 公與兵使朴犀擊退之 還都松嶽以功奉安東君 子孫因籍焉 高祖諱懿一 忠烈王朝司馬 曾祖諱世 忠宣王朝 副成君 祖諱茂 忠穆王朝 僕射中郞將 考諱贊成 忠定王朝 御使大夫 公諱撲 字元質 庚子中國子甲進士科 與鄭夢周 白君瑛 文益漸 同榜也 時陶隱 李崇仁 鶴巖 徐均衡 三憂堂 文益漸 石灘 李存吾 惕若齋 金容九 圓齋 鄭樞 皆以道學文章 鳴于一世 公相與之交 凡國家有事 無不講之熟而究之深 蔚然有聲績也 辛丑參西征幕僚討平紅賊 癸卯以書狀官 同李公遂如元 力沮德興君東遷 不受其僞官 華人嗟賞之 甲辰拜中書舍人 未爲濟州宣撫使 辛亥拜大司成 上書爭論以王命誅旽 壬子與圃隱 鄭夢周 聘日本 先是遣使者 輒被拘留 二公旣至 極盡交隣之義 倭王敬服而厚禮之 時儉城賊 連陷邊郡 朝野震慓 王會群臣議之 皆言出巡民間 召諸道兵馬以圖恢復可也 公爭言 都城 宗廟宮闕所在 今若暫棄 人心動搖 且爲賊所據 則亦難指日可復 王可之 禑王乙卯 被李仁任 劾奏見斥于吉安山下里 丙辰十一月爲池奫所害 享年五十 次子雲專奉樞還鄕 葬于所居後 艮坐之原

配花山權氏苗同原 有二子 長雲永 子徇恭愍王時報國侍中 子均平 次雲專 子 樟 子 盛洛 歷三世 而有東 中宗癸卯中樞府使 宣祖壬辰 與趙寺正守道 避難于葛田洞 故因號 葛田云

於乎 顯晦升沈天道之至 公也何 公之事蹟歷歷 一於沈晦而莫之升顯也 此余所以不能無惑於天者也 今於仁明之請 有不忍終辭者 略綴之如石 孫之以詞曰

勝國之季 晟運隆昌 名賢碩德 聲出翱翔 嶷嶷林公 將大有爲

討賊立功 運籌得宜 交隣有術 事大盡誠 奈何天道 忌滿惡盈

命與仇謀 志與時乖 屠裔散渙 遺蹟沈煤 慨焉未遑 曠半千禩

彛哀所同 行路咨嗟 豐功偉烈 合準禑龜 玆竪貞珉 神道于斯

昭掲千億 永揮闡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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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서사인 대사성 月汀(월정) 林公(임공) 신도비

단기4308(1975) 金文大(김문대) 찬 입비

 

영가 屈火縣(굴화현) 남쪽 산하리 채암원에 한 봉이 있는데 그 높이가 넉자나 된다. 추측하건데 고려 중서사인 국자선생 월정 임공을 만세토록 장사지낸 곳이라 생각된다.

공의 이력은 밝게 나타나있고, 찾아보면 집안에도 조정에 입사한 사적이 있으며 글로서 전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검열해야하는데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는 문헌도 없어, 알 길이 없어 오리려 허둥대고 있다.

원근에 있는 어진 후손들은, 함께 모여 의논하며 말하기를 묘 앞에 비석을 세워 神道(신도)를 잘 밝히고자 하였다, 돌은 이미 준비하였고, 거기 쓸 글을 짓는 역할을 내게 맡기니,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어리석고 우둔해 어찌 감히 옛날의 아득한 사적을 잘 기록 할 수 있으리오, 여러 번 사의를 나타내었으나 거듭거듭 간곡히 청을 하므로 삼가 본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자 한다.

 

임씨가 안동에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 奈勿王(내물왕) 때 휘 ()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평장사 겸 도염찰사였고, 그때 변한의 장수 鐘馗(종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이 토평하였다. 그리고 ()이 죽자 왕이 친히 와서 시신이 없는데도 말하기를 과인을 위해 과인이 있게 한 것은 실로 공의 힘이다.” 하면서 공을 錦東君(금동군)에 봉하였다.

몇 대가 지난 다음 휘 朱興(주흥)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龜州(구주)를 범하자 ()兵使(병사) 朴犀(박서)가 이를 격퇴시키고 松嶽(송악)으로 환도하니 그 공으로 安東君(안동군)에 봉해졌는데 그로 인해 자손들은 관적에 오르게 되었다.

 

고조부의 휘는 懿一(의일)인데 충렬왕조에 사마를 지냈고, 중조부의 휘는 ()인데 충선왕조에서 부성군이 되었다. 조부의 휘는 ()인데 충목왕조에서 복야중랑장을 역임하였다. 부친의 휘는 贊成(찬성)인데 충정왕조에서 어사대부를 지냈고, ()의 휘는 ()이고 자는 元質(원질)이다.

경자년 중국의 甲子進士科(갑자진사과)에 정몽주, 백군영, 문익점 들과 함께 합격하였다. 그 당시 도은 이숭인, 학암 서조형, 삼우당 문익점, 석탄 이존오, 척약재 김구용, 원재 정추, 등은 모두 도의와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인데, 한 세상 공과 서로 교제한 사람이며, 국가에 무슨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서로 의논하고 깊게 토론하여 함께 같은 소리를 내었다.

 

신축년, 西征(서정)의 막료로 참전하여 홍건적을 토벌하였고, 계묘년에는 서장관으로 李公遂(이공수)와 힘을 다해 德興君(덕흥군)을 데리고 왔는데, 그때 그들이 주는 관직을 받지 아니하자 중국 사람들이 찬탄해서 마지않았다.

 

갑진년에 중서사인을 배수하고 제주선무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했다.

신해년 대사성이 되었고, 왕명을 거슬렸다는 상서쟁론을 하였다.

임자년 포은 정몽주와 함께 일본을 찾아가서 먼저 파견한 사신를 억류하고 있는 것을, 두 사람이 극진이 석방 교섭을 하니 왜왕이 경복하여 후한 예로 대하였다.

 

군 변두리에 있는 적운 성들을 적들이 연이어 함락을 할 때, 조야는 두려워하고, 왕은 회의를 열어 많은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니, 모두 말하기를 나아가 백성을 어루만지고, 모든 도의 병마로서 탈환 하는 것이 좋다.” 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도성은 종묘와 궁궐이 있는 곳이며, 지금 만일 잠시라도 버리면 인심이 동요되고, 또한 적의 거점이 되어버리면 언제 회복할 지 기약도 할 수 없다.” 하니 왕이 옳다고 하였다.

우왕 을묘년에 李仁任(이인임)의 탄핵으로 길안 산하리로 배척당했는데 병진 십이월 池奫(지연)이 공을 탄핵하는 탄핵서를 썼다.

향년 오십으로 졸하니 차자 雲專(운전)이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살던 곳 뒷산 간좌에 장사지냈다.

배위 화산 권씨의 묘도 같은 곳에 있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雲永(운영)이고 그의 아들 ()은 공민왕 때 보국시중을 지냈다. 다른 아들은 均平(균평)이다.

차남 雲專(운전)의 아들은 (), 다든 아들은 成洛(성락)이다.

삼세를 지나는 동안 안동에서 살았으며, 중종 계묘 중추부사를 역임했고, 선조 임진년에 趙寺正(조사정)과 함께 도를 지키다가 갈전동으로 피난을 갔다. 그래서 호를 葛田(갈전)이라고 말한다.

 

옹호! 들어났다 감추어졌다, 오르고 내리고 함은 천도이나, 공의 이력은 한번 가라앉은 다음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나로 하여금 소위 하늘이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지금 仁明(인명)의 청으로 끝까지 사양 할 수 없어 비석에 적은 바와 같이 대략을 기록한다.

 

(사왈)

나라가 융성하던 말기 밝은 운세는 융창해서

명현과 碩德(석덕) 소리 내어 달려가

높고 높은 林公(임공) 대장으로 할 일 있어

적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운세는 쉽게 풀려서

이웃과 사귐에 수단이 있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는데

어찌하여 천도는 증오함과 악을 가득 채우는가.

목숨을 원수 모략에 내 주니 뜻은 시시로 어긋나서

후손은 흩어지고 유적은 잠겨버리니

분개하여 어찌 방황하지 않으리. 광야에서 지내는 많은 제사

슬픔은 한결 같고 가는 길 탄식하며

많은 공적과 위대한 위업 법도에 맞는 일만을 하다가

여기 아름답게 잠드니 하늘의 도리는 이와 같아

밝게 천억 년을 비추고 길이 떨치도록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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