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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柳克恕(류극서) 全州人 寶文閣直提學

청남

 

 

柳克恕(류극서)  全州人 寶文閣直提學
  完山伯 濕의 子. 祿轉面 竹松里 虎巖

 

전설에 의하면 공이 돌아가시자 아들이 묘지를 차던 중,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호랑이 입에 비녀가 꽂혀 있기에 그것을 빼어 주었더니 상주를 등에 업고 이곳에 묘지를 정지해 주었다 하여 묘 뒤에 큰 바위를 지금도 범바위라 한다.
그러나 전주 류씨 사적에는 공의 묘소를 실전하였는데 7대손 禮賓寺正(예빈시정) 復起(복기)와 8대손 사경감사 永詢(영순)이 柳殯(유빈)이라는 동명을 따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곧 공의 墓下(묘하)에서 차자 영흥도호부사 濱(빈)이 장사 후 시묘 사리를 하였다 하는 동명이 공의 묘아래 서남쪽에 있어서 였다 한다.

공의 묘도 고려 말의 하방상원형 분묘인데 묘 앞에 비석과 長明燈(장명등)이 설치되어 있다. 墳塋(분영)의 사방을 큰 돌로 돌리고 床石(상석) 및 石人(석인: 문인상)을 설치하였는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후 부인 수원 이씨 분도 공의 階下(계하) 10여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똑 같은 형식이다.
묘아래 선조 39년 병오(1606)에 8대손 永詢(영순)이 찬한 비거 서 있고 20여칸의 齋舍(재사)도 있다.
그리고 공의 次子(차자) 濱(빈)의 묘소는 영주군 문수면 鐘陵里(종능리)에 있다. 공은 고려 우왕 8년 임술(1382)에 태종과 同榜(동방)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보현감, 경주부윤, 영흥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사후에 태종이 장례하고 鐘陵(종릉)이라 명명하게 하였다 하는데 묘의 형식이 장대석으로 墓傍(묘방)을 돌리고 그 위에 八方(팔방)으로 다시 긴 돌로 돌려서 마치왕릉을 방불케 하고 있어 흥미롭다.


墓下碑
재사의 뒤편 묘소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져 있다. 전면대자는 ‘有明高麗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完山柳公墓下碑’라 새기고 있다. 비문의 전면 대자의 첫 글자를 ‘유명(有明)’이라 쓴 것은 이 비석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의리로 여기는 시기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비를 세운 시기는 만력 병오년(1606)의 일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面大字】有明高麗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完山柳公墓下碑

【碑 文】
公姓柳諱克恕系出全州麗朝登科官至寶文閣直提學祖諱橒成均生員 考諱濕贈司憲府掌令 妣全州崔氏封三韓國大夫人 有五男一女 五男俱捷文科 女適大提學沈孝生 以此特贈 公乃五男之一也 公娶晋州河氏爲配 贈領議政晋陽府院君允潾之女 文忠公浩亭先生崙之姉也 生二男 長汀僉知 次濱文科永興府使 贈叅判 僉知生二男 長孝池 縣監 次孝川文科承文正字孝池六代孫 振門新門再榮再茂 居星州 孝川六代孫震楨震樑 居陜川 叅判生四男長敬孫中部令贈吏議 次義孫叅判以文雅鳴世 次信孫叅判 次末孫執義贈叅判 叅議生二男 長孟沂淸白吏 郡守 次之盛 贈叅判 郡守生二男 長場次坦 場四代孫潭文科正郞 坦曾孫華 居榮川 叅判子崇祖興祖 崇祖文科官至大司成學窮性理取重儒林 子應台 應台曾孫 仁榮 興祖子應賢應賢曾孫仁植 俱居安東 執義生三男 長季潘叅判 次季漳僉知中樞府事 次季潼贈承旨 參判子軫縣監 縣監曾孫肇生武科叅扈聖功臣 僉知子軒 大司諫 贈吏曹判書 判書生四男長世鵬典簿 次世麟吏曹叅判贈左贊成 次世龜 典籤贈吏曹判書 次世鳳司果 典簿子寧判官宇司果 判官子永範今爲直長 司果子永孚文科正郞 贊成生三男長信文科佐郞次儀叅奉贈領議政 次脩叅奉 議政生三男 永吉叅判以詩文鳴世 永慶今爲領議政全陽府院君 永賀直長 叅奉子永孝今爲監役 叅判子惺今爲文學恒水運判官 領議政子悅今爲通津縣監  王子師傳 悌松禾縣監 通津子 廷亮尙貞徽翁主爲全昌尉 判書生四男 長堪舍人贈吏曹參判 乙巳正直不撓 坐謫十八年 讀易不輟均縣令 塤判書 埏府使贈左贊成 舍人子永健府使 永立叅判 永起今爲麻田郡守 叅判子穡今爲副修撰縣令子永成 今爲淸風郡守 贊成子永謙禁府經歷 永謹今爲司諫 永詢今爲慶尙道觀察使 承旨有子軾輳 軾府使贈叅判 叅判子潤德文科參判 次潤善 潤善孫復起居安東有五子輳子潤門 潤門孫止信武科府使 其餘內外子孫蕃衍 不可殫記 嗚呼 我先祖積德燾後 奕世冠冕 愈久愈盛 以至今日猗歟休哉 公墓在禮安縣西龍頭山之麓 神道古無麗牲 世代綿遠 香火久絶 七代孫永詢 忝按本道 拜奠墓下 不勝感璥 乃問之古老 皆曰永興公嘗居廬于墓側 至今樵牧 稱以柳濱洞 洞之西北有一刹 相傳柳墓齋舍云 揭板于壁 以表遺蹟 且定守墓人 以禁樵火 竪之短碣 略記顚末于陰 以示來世 庶傳之永久云爾
萬曆三十四年丙午月日立
八代孫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永詢謹撰

<해>
유명고려중정대부보문각직제학완산유공묘하비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극서(克恕)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운(橒)은 성균관 생원이다. 아버지 습(濕)은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고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삼한국대부인에 추봉되었으며, 5남 1녀를 두었다.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딸은 대제학 심효생에게 출가하였다. 5남 1녀의 등과로 특별히 추증되었는데 공은 이 5남 중의 둘째 분이다. 공은 진주하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영의정에 추증된 진양부원군 하윤린(河允潾)의 딸이며, 문충공 호정선생 하륜(河崙)의 누이인데 형제를 두었다. 큰아들 정(汀)은 첨지이고 작은아들 빈(濱)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부사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첨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효지(孝池)는 현감이고 다음 효천(孝川)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를 지내고 효지의 육대손 진문, 신문, 재영, 재무는 성주에 살고 효천의 6대손 진정과 진량은 합천에 산다.
참판은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경손은 중부령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다음 의손은 참판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다음 신손은 참판이고 막내 말손은 집의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맹기는 청백리 군수이며, 막내 지성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군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장이고 막내는 탄이다. 장의 4대손 담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내고 탄의 증손 화는 영천에 산다. 참판의 아들로는 숭조와 흥조가 있다. 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은 응태이고 응태의 증손은 인영이다. 흥조의 아들은 응현이고 응현의 증손은 인식인데 모두 안동에 산다.
집의는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계번은 참판이요 다음 계장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계동은 승지로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진은 현감이고 현감의 증손 조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호성공신이며, 첨지의 아들 헌은 대사간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세붕은 전부이고 다음 세린은 이조참판으로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다음 세구는 전첨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막내 세봉은 사과를 지냈다. 전부의 아들 영은 판관이요 우(宇)는 사과이다.
판관의 아들 영범은 지금 직장을 하고 사과의 아들 영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 되었다. 찬성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신(信)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며, 다음 의(儀)는 참봉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막내 수(脩)는 참봉이다. 영의정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영길은 참판으로서 시문(詩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영경은 지금 영의정으로서 전양부원군이며, 막내 영하는 직장이다. 참봉의 아들 영효는 지금 감역관을 하고 참판의 아들 성은 지금 문학(文學)이며, 항은 수운판관이다. 영의정의 아들 열(悅)은 지금 통진현감이고 업()은 왕자의 스승이며, 제(悌)는 송화현감이다. 통진현감의 아들 정량(廷亮)은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전창위(全昌尉)가 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감(堪)은 사인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을사사화 때 남의 죄에 걸려들어 18년간 귀양을 가서도 주역공부를 그치지 않았고 다음 균(均)은 현령이며, 훈(塤)은 판서이고 연(埏)은 부사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사인의 아들 영건(永健)은 부사이고 영립(永立)은 참판이며, 영기(永起)는 현재 마전군수를 하고 있다. 참판의 아들 색(穡)은 지금 부수찬을 하고 현령의 아들 영성(永成)은 지금 청풍군수이다. 찬성의 아들 영겸(永謙)은 의금부의 경력이고 영근(永謹)은 현재 사간이며, 영순(永詢)은 지금 경상도 관찰사를 하고 있다. 승지의 아들은 식(軾)과 주(輳)인데 식은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고 참판의 아들 윤덕(潤德)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다음은 윤선(潤善)이다. 윤선의 손자 복기(復起)는 안동에 사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주(輳)의 아들은 윤문(潤門)이며, 윤문의 손자 지신(止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이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아! 우리 선조가 덕을 쌓고 두루 비추어 대대로 벼슬아치가 끊이지 않고 그 번성함이 오늘 날에 이르러 더하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묘는 예안현 서쪽 용두산(경북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 기슭에 있는데 신도비는 오래되어 빛을 바래고 오래동안 향화가 끊어졌다. 8세손 영순이 본도의 관찰사로 와서 성묘하고 비통한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옛 노인에게 물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영흥공(빈)이 묘 옆에 초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은 나무꾼과 목동들이 류빈골이라 부른다고 하고 마을 서북쪽에 절 하나가 있는데 류묘(柳墓)의 재사(齋舍)라 전하니 벽에 현판을 걸어 유적을 표시하고 또 묘직이를 정하여 나무꾼의 불작란을 막고 작은 비를 세워 그 전말을 기록하고 후손에게 보이니 오래도록 전하기를 바란다.

선조39(1606)년 월 일 세우다.
9세손 가선대부행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영순(永詢)이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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