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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裵尙志(배상지) ?~太宗 13年 癸巳(1413)

청남

 

 

裵尙志(배상지) ?~太宗 13年 癸巳(1413)

興海人 字 不傳 號 栢竹堂

 

공의 묘소는 안동시 가수천 위에 있다. 묘 앞에 短碣이 있는데 판독 가능한 부분은 유명 영락 12년 갑오 정월 22일 정유 통훈대부 판가복시사 흥해 배공 尙志(상지)지 묘, 일남 ()은 이천감무, 이남 ()은 벙조좌랑, 삼남 ()은 성균학론, 여식은 이천감무 ()의 처이다.로 즉 태종 14(1414)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인 안동 권씨 묘도 공의 묘 앞에 연분으로 있으며, 묘 앞에 역시 동일한 양식의 단갈이 있는데 「☐4년 기미 1116일 경신 공지 상처 영인 안동 권형조참의의 이조종랑 ().으로 판독되는 정통 4(세종 21, 1439)의 비석이 있다.

공의 내외 묘는 상방하원의 고려 말의 형식이며 시석 또한 圭首碑(규수비)로 상단의 모서리만 접은 간결한 형태인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순정 갑오 후 임오(숙종 28, 1702)에 공의 사적을 상고하여 대사헌 權瑎(권해)가 찬한 비를 다시 세우고 그 비석이 오래되어 자획이 마모되자 다시 세운 새 비가 묘 앞에 있다.

공은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시복시사에 이르렀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안동 금계 촌으로 은거하여 주위에 栢竹(백죽)을 심어서 스스로 호를 삼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

영가지 총담조에 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은 사헌부 지평, (), (), ()은 문과에 급제하여 ()은 관찰사, ()은 사헌부 감찰, ()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동생 尙恭(상공)도 문과에 급제하여 전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도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임관하니 문중이 빛났다.

, , 강이 어려서 죽림사에서 독서를 할 때 하루는 셋이 기녀를 데리고 노는데, 공이 불의에 방문을 하니 세 아들은 몹시 당황하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공은 세 아들을 훈계하는 시를 벽에 써 붙였는데,

배 하나 배 하나 또 배 하나

세 배씨 모인 곳에 봄바람 이네

이름은 죽림이지만 비단 대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죽림 깊은 곳에 도화가 피었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후세의 시인들도

분명관직에서 물러나 선현 앞에 나아가

천수나 되는 시편 어느 세월에 전하나.

죽백은 이미 마르고 구름도 멀어졌다.

풍류는 높이 보여 오히려 삼엄하네.

라 하여 공의 기상에 감복 하여다 한다.

 

 

墓前碑

前面大字高麗判司僕寺事柏竹堂裵先生之墓

碑 文

昔麗之亡能抗節不仕者蓋不惟吉冶隱徐掌令數君子而已或其人自韜晦遂泯無傳余於栢竹堂裵先生窃有感焉先生諱尙志字不傳仕麗季官至判司僕寺事見麗政亂退而隱居于永嘉之金溪村扁其堂曰栢竹以見志逮我 鮮興遂閉門而終若先生者其節何遽在吉徐諸君子下哉裵氏系出曲江檢校將軍景分之後 丞同正光祐衛尉丞若卿保勝別將裕孫典理判書榮至僉議評理詮實其六世也評理娶判三司孫洪亮之女生先生先生之配曰安東權氏父希正 贈領議政男曰權持平桓觀察使楠監察杠吏曹正郞世世趾美繩繩至七代孫三益觀察使觀察使之子龍吉藝文檢閱門戶益大今其後甚繁衍府北嘉水里有先生墓墓有碑只書先生官位姓名其生卒年月日歷官行事畧不槩見何哉或曰先生以國亡不能死爲恨不欲自見於後其志亦可悲也先生沒旣二百餘年人慕先生之風不衰卽金溪之曲建祠以俎豆之今 上十六年以多士之請 贈爵兵曹判書以表章之先生嘗有詩集散逸無傳其唱酬若于篇附在冶隱集中西厓柳文忠公嘗稱先生曰霜淸玉潔高蹈時危此足以發明先生於百代之下矣銘曰

白山峨峨洛水洋洋有崇四尺寔惟高麗栢竹先生之藏

 

崇禎甲申後壬午十月 日立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義禁府事藝文館提學權瑎撰

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兼春秋館記注官金夏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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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판사복시사 백죽당 배 선생 지묘

예전 고려가 망함에 절의로 항거하며 벼슬을 버린 이가 오직 길야은서장영수군자(吉冶隱徐掌令數君子)뿐이 아니나 혹은 그 사람이 스스로 숨기고 감추어 드디어 민몰해서 전하지 아니한 이가 있으니 나는 저 백죽당 배 선생에게 간절한 감회가 있나니.

선생의 휘는 상지요 자는 전하지 아니하고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이면서 고려의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 물러나서 영가의 금계촌에 숨어서 그 당호를 백죽당이라고 지어 그의 뜻을 나타내고 이씨 왕조가 일어남에 드디어 문을 닫고 여생을 마쳤으니 선생 같은 분은 그 절행이 어찌 길야은서장령제군자의 아래가 될까.

배씨는 가계가 곡강에서 나왔으며 검교장군 휘 경분의 후로 승동정 벼슬인 휘가 광우 위위승 벼슬인 휘 약경과 보승별장인 휘 유손과 전리판서인 휘 영지와 첨의평리 휘 전은 실상 그의 6세이다. 평리가 판삼사 손홍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고, 선생의 배위는 안동 권희정 증 영의정의 따님이다. 4남을 두니 권은 사헌부지평이요, 환은 황해충정전라도관찰사요, 남은 사헌부감찰이요, 강은 이조정랑이니 대대로 아름다운 명예가 이어와서 7대 손 삼익에 이르러 관찰사를 지냈으며 관찰사의 자 용길은 예문관검열로서 문호가 더욱 대단해서 지금 그 후손들이 심히 번성하게 퍼졌다.

부북 가수리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는데 묘비에 다만 선생의 관위와 성명과 그 생졸년월일만 새겨져 있고 벼슬살이 하시던 사략은 대개 볼 수 없으니 어인 일인고, 혹은 말하기를 선생이 나라가 망함에 따라 죽지 못함을 한으로 여겨 후세에 나타내고 싶지 아니 함이라 하니 그 뜻이 또한 슬프구나.

선생이 몰한지 이미 이백 여년에 사람들이 선생의 풍범을 생각함이 쇠하지 아니하여 지금 금계의 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향례를 올리며 금상 16(1691)에 많은 선비의 청으로 증작 병조판서하여 포상을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시집이 있었는데 흩어져 잃어버려서 전하지 아니하고 그 창수한 약간편이 야은집 중에 부쳐서 있는 것뿐이다. 서애 류문충공이 일찍이 선생을 칭하기를 서리발 같이 맑고 옥같이 깨끗하다 하고 위태로운 시기에 고상한 발자취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족히 백대의 하에서 선생을 발명한 것이라 하겠다. 명 왈

 

소백산은 늠름하고

낙동강 물은 광대하게 흐르도다

우뚝한 사척봉분이 있으니

진실로 고려 백죽선생을 감춘 곳이로세

 

숭정 갑신 후 임오 십월 일 립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의금부사 예문관제학 권해 찬

통훈대부 통예원좌통예 겸 춘추관 기주관 김하세 서

 

碣文小識

先生易簀後三百餘年碣文成而攷據未的官職踐歷生卒年月並闕焉後數世得先生庚午戶籍及貞夫人分衿文書與忌日案參互攷之先生生至正十一年辛卯卒永樂十九年癸巳七月二十七日近攷華海師全跋文先生與圃牧諸君子編輯申文貞事蹟更攷松京言志錄先生見麗氏運訖與罔僕諸賢掛朝天冠着蔽陽笠登不朝峴各言其志言訖望松嶽皆流涕曰可去矣先生遂歸田排祿抗不二之節又攷雉岳山壇祀日記先生與同節諸公源源往來與立壇祀此皆碣文所不載也舊碣歲久苔泐往年庚寅又被兵禍所傷方某改竪碣文一從舊本而更摭諸家所錄書于下方以補碣文之闕極知僭妄寔出於闡先徵後之微誠也是役也擔夯出力者後孫永悳燦慶爲多故並錄之

先生卒後五百四十二年 甲午 九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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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소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삼백여년에 갈문이 이루어졌으나 참고함이 적실하지 못하고 관직과 실천의 이력과 생졸 년 월이 모두 빠졌으며 후수세(後數世)가 되어 선생 경오 호적과 정부인분금문서와 더불어 기일 안을 서로 참고하니 선생이 지정 11년 신묘에 생하여 영락 19년 계사 727일에 졸하셨다.

근래 화해사전발문(華海師全跋文)을 참고하니 선생이 포은 목은 제군자와 더불어 신문정공 사적을 편집했으며, 다시 송경 언지록을 참고하니 선생이 고려의 운이 다함을 보고 망복제현(罔僕諸賢)으로 더불어 조천관(朝天冠)을 괘관현의 나무에 벗어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갈아 쓰고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서 각각 그 뜻을 말하고 마침에 송악을 바라보며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가히 가야한다고 하며 선생이 드디어 배록동으로 돌아와서 불이의 절개에 항거했다.

또 치악산 단사일기에 선생이 동정제공으로 더불어 원원이 왕래했으며 더불어 단사를 세웠으나 이는 모두 갈문에 실리지 아니한지라 구갈이 해가 오래되어 이끼가 끼고 이지러졌으며 지난 경인년에 또 병화로 많이 상했는지라 바야흐로 갈문에 빠진 것을 보궐하오니 참망함을 알고 있으나 진실로 선조를 천양하고 후일을 징계하는 작은 성심이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는데 담항(擔夯)을 해서 힘을 쓴 후손 영덕과 찬경이였는 고로 함께 기록하노라.

선생이 돌아가신 후 542년 갑오 9월 일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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