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洊(김천) 恭愍王 11년 壬寅(1362)~?
義城人 工曹典書 居斗의 子
공의 묘는 와룡면 중가구리 세곡에 있다. 인근 주민들은 「돌성 뫼」라 하고 있는데 이는 공의 묘가 하방상원식으로 봉분이 되어 있고, 분묘의 주위를 돌로 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 같다.
공은 아버지 공조전서 居斗(거두)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개경에서 안동부 동편 방적리로 이사하고 정착하었으며 進禮島都萬戶(진례도도만호)는 고려조 벼슬이다.
묘 엎에 短碑(단비)는 숭정후 3 병술(영조 41: 1766)에 세웠으며 형태는 고려 말의 묘표의 표준이라 생각된다.
陰記(음기)가 있으나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공의 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묘인 栢竹堂(백죽당) 배상지, 상주 목사 권집경, 직제학 柳克恕(류극서)공의 묘와 동일한 형식이다.
金公諱洊之墓
【墓表文】
碑面 高麗都萬戶金公諱洊之墓
公諱洊姓金氏 新羅敬順王子義城君錫之后也 曾祖諱瑞芝 慶尙觀察使 祖諱台權文川府左尹司 考諱居斗工曹典書 妣文化柳氏代言總之女 公生于 元大德壬寅 高麗末爲進禮 島都萬戶 見國運 將訖奉典書 南下卜居于安東府城東 名其洞曰邦適 蓋邦之革矣 我安適敀之意也 權陽村近嘗與公 洞里閈祭 公文有薇蕹忘飢廉頑立儒之語 卒歲未詳 墓在安東箭岩午向之原 娶典敎令 洪州李處謙之女 生二男 永壽司直 永命縣監 司直生二男 漢遇 漢重 縣監生四男 漢啓承文院事知 漢哲持平 漢碩 漢仝曾玄以下不盡錄 五世孫璡贈吏曹判書 有五男 克丙資寺正 守一察訪 明一生員 誠一副提學贈判書文忠公 復一司成府使 七世孫 涌參議贈參判迬郡守 贈參判墓道舊無顯刻 文忠之子洗馬潗 洗馬公之玄孫 皆有意而未畢今 諸孫合謀 且石謹取 譜系及流傳故事略識之 夫人墓在樊川艮坐原
英宗大王42年丙戌10月日 立石13代孫 相玉
始享柱國說14代孫龍普等掌其事
<해>
김공휘천의 묘
【묘표문】
(비면) 고려도만호김공휘천지묘
공의 휘는 洊(천)이고 성은 김 씨인데 신라경순왕의 아들 의성군 錫(석)의 후손이다.
증조의 휘는 瑞芝(서지)이고 경상관찰사를 지냈으며, 조부의 휘는 台權(태권)인데 문천부좌윤사을 지냈다. 아버지 휘는 居斗(거두)이고 공조전서를 역임했다. 모친은 문화 류씨 대언 總(총)의 딸이다.
공은 元(원) 대덕 임인년에 태어 났고, 고려말에 진례도도만호가 되었는데 국운이 다한 것을 보고, 부친인 전서공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부성 동쪽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그 마을 이름을 邦適(방적)이라 했는데, 그 말은 대체로 “나라가 바꾸었다”라는 뜻이다.
우리 안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양촌 권근공도 공과 함께 동래 문을 처음으로 여는 행사에 와서, 공은 문장에 능력도 있고 “고사리를 먹으며 허기를 잊은 완강한 선비”의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 하였다.
졸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묘는 안동부 전암 오향에 있으며, 전교령 홍주 이처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는데 永壽(영수)는 사직, 永命(영명)은 현감이었다.
사직공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漢遇(한우) 漢重(한중)이다. 현감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漢啓(한계)는 승문원사지, 漢哲(한철)은 지평, 漢碩(한석) 漢仝(한동)과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오세손 璡(진)은 증이조판서인데 아들 다섯이 있으며, 克丙(극병)은 자사정, 守一(수일)은 찰방, 明一(명일)은 생원, 誠一(성일)은 부제학 증판서문충공, 復一(부일)은 사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칠세손인 涌(용)은 참의 증참판왕군수인데 참판공의 묘에 비석이 없음에 유감으로 생각하고 문충공의 자손 세마 潗(집)과 세마공의 현손들도 모두 같은 듯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였던바, 모두 뜻을 합하여, 이에 돌을 마련해 譜系(보계)와 流傳(유전)되는 고사를 정리하여 그 대략을 기록한다.
부인의 묘도 번천 간좌에 있다.
영종대왕 42년 병술10월일 입석 13대손 상옥
시향주국설 14대손 용보 등이 그 일을 관장하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