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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金有溫(김유온) 生卒未詳(생졸미상)

청남

 

 

金有溫(김유온) 生卒未詳(생졸미상)

() 菊潭(국담) 順天人(순천인)

 

영가지 우서록에 공은 좌의정 평양부원군 承霔(승주)의 아들로 상주목사 權執經(권집경)의 사위가 되어 풍산현 서쪽 구담촌에 이사해서 정착하였다고 하였다.

문종 원년 신미 2월에 예조참의, 단종 원년 인심 7월에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고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계유정란 때, 절재 김종서가 화를 당할 때, 족친이므로 구담으로 피난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 할 수도 있다.

공의묘소는 예천군 호명면 갈천에 있는데 묘 앞에 舊碑(구비)는 없으나 長明燈(장명등)은 그대로 남아 있어 조전조 초기의 墓前(묘전) 석물양식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 여겨진다.

다시 세은 신비에는 자현대부지중추부사 원종공신 국담 김공지묘라 하고 개국 9 을사라는 연월일이 새겨저 있다.

 

공의 묘 아래에 천순 510(세조 6, 1461)에 세운 공의 장남 통정대부행수선공감원석묘가 있는데 비의 양식이 독특하고, 공의 현손 고창형감 自順(자순)공 내외의 쌍분이 공의 묘 뒤에 倒葬(도장)으로 모셔져 있으니 그 당세의 入葬(입장) 습관을 혜아려 볼 수가 있다.

 

 

菊潭公 諱有溫 墓碣銘 幷序

 

嶺以南豊縣之西 有九潭 潭卽 吾先菊潭府院君胥于之地而 迄今四百年 其園林第宅輝映 潭上下知其爲君子之居 少其西 葛川向午原 寔府院君幽宅而 山氣明秀 松柏茂密 令人望之而地點焉 亦可知爲君子之阡也 府君諱有溫 順天人 系出新羅金姓 平陽君諱摠 其始也 高祖曰 允仁仕麗朝 中縣大夫典客令 曾祖曰 洞匡靖大夫上護軍 祖曰惟精入測朝定定州牧使 贈封麗山君 考曰承霔 號月潭 諱襄景 以淸白勳勞著至有不祧典 及尸祝之院 妣馬韓國夫人 平昌李氏 開城尹叢 爲其父 郡守秀英爲其祖 木川禹仲祥爲其外祖也 今府君之世 已四百年之久而 表德生卒及行資歷幷無以詳然 按譜牒所錄 云 文科禮曹參議 又云 嘗歷三司錄原從勳 又云 有禮學著名 又云 晩年謝官 從權監司執經 卜居安東九潭里 子孫世爲嶺人 且按國史所載云 太宗甲午 歷工曹正郞 世宗丁卯 歷刑曹參議 文宗辛未 歷禮曹參議 端宗壬申 歷僉知中樞院事 是可以尙論之矣

攷其時溯其迹 府院君棄官 下鄕 其出於見機之明也 貽謨之遠也 歟當日國家禍亂 連世疊出 親戚如端宗廟 大臣節齋諱宗瑞 被禍於癸酉之日而 家戶皆遜荒 孫壻若成宗廟 進士金潭庵 用石焚稿於戊午之際而 嘗隨府君贅

着於潭上則 所謂世祖靖亂之機 與夫燕山暴虐之政 必先有其兆而 府君乃而軒冕爲 浮雲視而 菟裘爲保家計也 較然矣 非若然則 府君以喬木 世臣如襄景之子 有何無當於心 違謝機內而 翩然高擧於 逝鄕千里之外哉

以此推之則 府君之潛心 禮學爲著名 於當日者亦可以想像之矣 傳不云不學禮無以立耶 又不曰 國必以禮耶 惜乎 其著論者不得傳也 雖然府君之蹟 旣載在國史而 可以知其槪矣 則以譜錄之疏略而 細行疎節之 莫得 以詳表德 生卒之茫無可考不必大槪恨也 不憶吾諸裔碁布 湖嶺不衰以盛得 今日者孰非 府君之積厚餘蔭也 不但觀今日爲然 在昔商山之連 四世封君 亦其來非有自耶 況在其孫曾玄之世者耶 府君之於保身乎 何其明哲而 於貽後乎 何其深遠也 不亦裕乎 懿哉 配淑夫人安東權氏 監司執經則其父也 墓合祔 有二男二女 男元石判事 亨石翊贊 女朴悌誠郡守 柳淑文川君 元石男若勻昇平君 若衡司直 女鄭崇義郡守 柳喜生上將 李貞陽牧使 鄭允興 安潤孫參判 李坦護軍 亨石男若枰縣監 女南鼎博士 金用石進士 若勻男粹洪順天君 粹澄司直 粹涵縣監 粹潭府使 粹慊牧使 若亨男粹澣司勇 女安漢孫豆原副正 李穗 柳希宗 若枰男希尹生員 希奭希呂參奉 希稷郡守 希說戶參 女張忠輔執義 尹世文監役 李泌縣監 權橻以下不錄 鳴呼晩矣是可曰 述之云乎哉 系之以辭曰 維漢之陽襄景有宅 淸白勳勞無曰不赫 公生是庭 居長五璧 早登雲路錄名勳籍 三司二曹 次第擢歷歷 太世迄端沖辟如何 晩暮遽謝洛陌 癸酉禍難若覩朝夕況也 大臣近在親戚 宜早色擧領表遐僻有曰 九潭可居而闢 乃相乃宇而彊而場 軒冕何物 田園意適 潭上菊黃 潭深鷗白蛇蛟敢侵 虎豹遠迹于 馬卒歲世異喬赤有學者名 於禮是繹惜乎 無傳斯文之厄 葛厓向午 有崇四尺 山明林茂潭流益碧 銘曰 以揭阡垂之 來億誰敢毁 傷君子之石

十九代孫喆熙謹撰

眞誠李瓘鎬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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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담공 휘 유온의 묘갈명 병서

 

영남 풍산현 서쪽에 구담이 있는데, 구담이 곧 내 선조 菊潭(국담) 부원군이 처음 살았던 땅이다. 지금까지 400여년 그 園林(원림)과 제택은 빛났다. 구담 상하는 바로 거기가 군자가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거기서 조금 서쪽 葛川(갈천) 오향 원에 부원군의 유택이 있다. 산세는 밝고 수려하며 송백은 빽빽이 무성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며 바라보게 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 곳은 또한 군자의 무덤이라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부군의 휘는 有溫(유온)이고 순천후인이며 신라 金姓(김성)에서 유래 되었는데 평양군 휘 () 이 그의 시조이다. 고조는 允仁(윤인)이라 하는데 중현대부전객령이 었고, 증조부 휘는 ()인데 광정대부상호군이었고 조부이 휘는 惟靖(유정)인데 입측조정정주목사이고 여산군에 봉해진 분이다. 부친은 承霔(승주)라 하는데 호는 월담이고 휘는 양경이며 청백하며 훈공은 유불조전 급 시축지원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마한국 사람이었다.

부인은 평창이씨로 개성윤 () 이 그의 부친이고, 군수 수영이 그 조부이며 목천 우씨 仲祥(중상)이 외조부다.

 

부군은 지금부터 이미 400년이나 오래 전에 살았으므로 나타낸 덕과 행적은 모두 상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보첩에 기록하여둔 것을 보면 문과 급제 후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또 삼사를 지내고 원종훈에 녹훈되었다 하고 또 예학에 저명하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만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權執經(권집경) 감사를 따라 안동 구담리에 눌러 살면서 자손들이 영남사람이 되었다, 하였다.

國史(국사)에 기록되어 있기를, 태종 갑오년에 공조정랑을 역임하였고, 세종 을묘년에 형조참의를 역임했다 한다. 문종 신미년에 예조참의에 올랐고, 단종 임신년에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했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그 행적을 생각해 보건데, 부원군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 한 것은 그 환란의 기미를 미리 밝게 알았기 때문일 것이고 멀리를 내다본 안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환란을 당하던 날 단종과 관계있는 친척 대신은 잇따라 연류 되었고 節齋(절재) 金宗瑞(김종서)가 계유 날 화를 당하니 집집마다 황당하였다. 진사 潭庵(담암) 金用石(김용석)은 무오의 변을 당할 때, 原稿(원고)를 모두 불태워버렸고, 부군은 잇따라 구담에 도착하게 되였다.

소위 연산군의 폭정과 같은 세조정란의 기미를 먼저 알고 , 부군은 뜬구름을 살피다가 집안을 보존하기 위해 菟裘(토구)의 계획을 세웠다. 만약 그러하지 않으면 부군은 교목과 같은, 襄景(양경)의 자제와 같은 세신이므로 한란이 올 것이 문명한데, 어찌 이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래서 기내를 물러나 속히 결단을 내려 천리 박 먼 타향으로 오게 되었다.

이것으로 추측하건데 부군의 숨은 마음에는 그래도 예학을 분명히 하고 지키던 당일의 일들을 가히 상상 할 수 있다. 전하지 아니하고 말하지 않고서는 예를 배운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또 말하기를 국가는 반드시 예로서 다스려야 된다, 고 하였다.

아아! 애석하게도 그 저술한 것들은 전하지를 않는다. 비록 그러하나 부군의 자취는 국사에 기록되어 있어 그 대요는 알 수 가 있다. 즉 모든 기록의 疏略(소략)한 것은 가는 글씨로 대략 기록되어 있으나 더 상세한 것은 밝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生卒(생졸)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한 스럽다.

영호남에 자리 잡은 우리 후손들은 쇠퇴하지 않고 득세 하니, 오늘날 부군이 싼 음덕을 입지 아니한 자는 없다. 비단 오늘날의 일만 아니고 옛날에도 商山(상산)의 사호처럼 四世(사세) 봉군이 나온 덕은 역시 자연히 된 것은 아니다. 항차 그 손 증손 현손의 대에 있어서 더 말 할 것도 없다. 부군께서 몸을 보호하신 그 명철함이 후대에까지 끼쳤고, 그것은 매우 심원하였고 넉넉하였고 여유롭지 않았던가.

아아! 배위 숙부인 안동권씨는 감사 執經(집경)이 그의 부친이다. 묘는 합설로 되어있다. 22녀를 낳았는데, 아들 元石(원석)은 판사, 둘 째 亨石(형석)은 익찬, 딸은 순수 朴悌誠(박제성)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문천군 柳淑(류숙)의 처가 되었다.

元石(원석)의 아들은 승평군 若勻(약균), 사직 若衡(약형)이며, 딸은 군수 鄭崇義(정숭의)의 처와, 상장 柳喜生(류희생)의 처, 목사 李貞陽(이정양)의 처, 鄭允興(정윤흥)의 처, 참판 安潤孫(안윤손)의 처, 또한 호군 李坦(이탄)의 배필이 되었다.

亨石(형석)의 아들 若枰(약평)은 현감, 딸은 각각 박사 南鼎(남정), 진사 金用石(김용석)의 처가 되었다.

若勻(약균)의 아들 粹洪(수홍)은 순천군이며, 粹澄(수징)은 사직, 粹涵(수함)은 현감, 粹潭(수담)은 부사, 粹慊(수겸)은 목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若亨(약형)의 아들 粹澣(수한)은 사용이고, 세 딸은 두원부정 安漢孫(안한손), 李穗(이수), 柳希宗(류희종)의 배필이 되었다.

若枰(약평)의 아들은 생원 希尹(희윤), 希奭(희석)希呂(희려)는 참봉. 希稷(희직)은 군수, 希說(희설)은 호참이 었고, 딸은 집의 張忠輔(장충보), 감역 尹世文(윤세문), 현감 李泌(이필) 등의 처가 되었고 그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아! 이렇게 기록 하는 것이 늦었지만 글을 지어 말을 하노라 . 이어서 말 하건데 한양 양양의 좋은 집에서, 청백한 공훈은 말하지 않아 빛나지 아니했지만, 공은 일찍이 勳籍(훈적)에 이름이 올라 三司(삼사) 二曹(이조)를 차례로 거치니 역역한 훈업은 세상에 넓게 빛나고 미치었다.

만년에 갑자기 사퇴하고 낙향해서 계유 환란을 조석으로 보고 있었다. 연류 된 대신들과, 가까이 있는 친척들은 멀리 후미진 곳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구담은 가히 거처할 만한 후미진 곳이며, 이에 서로 집을 지어 살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헌면은 무엇인가. 전원이 뜻에 맞고 연못 위에는 황국이 피며, 소가 깊어 백구가 찾아오고 교룡이 감히 침범하고, 虎豹(호표)가 멀리 있으며, 마졸은 세월 따라 바뀌고 학자의 이름은 높이고, 예에 맞게 이렇게 살아가니, 애써 재앙의 일을 글로 전하지 아니한다.

葛厓(갈애) 오향에 4척 높이의 분묘가 있으니 산을 곱고 숲은 무성하며 강은 푸르고 풍요롭게 흐른다.

명에 이르기를

이 무덤에서 더이 드리우니, 누가 감이 와서 훼손하리. 군자의 석물을.

십구대손 喆熙(철희) 근찬

진성 李瓘鎬(이관호) 근서

 

菊潭公諱有溫神道碑幷序

 

碑文

禮運曰孔子之杞而得夏時之宋而得乾坤以此而能推知大槪 尙有杞宋不足徵之歎 盖慮其無徵而有民不信之端然夏殷之必有文獻亦可徵也 菊潭先生金公有溫當李朝隆盛之際參原從功臣官至知中樞府事及有受難之兆退處鄕里 爲開基之祖 夫治則進功可以被人民名可以 垂竹帛亂則退佚而不恕阨窮而 不悶於斯二者必有可言者而 世代已原遺跡散佚 豈不慨惜乎 然輿人之誦至今不絶 其載於譜牒間 出國乘足以爲片羽零金是 其非杞之夏時宋之乾坤耶 安東豊山縣九潭里花山 控其洛東江帶其 南湖山第宅輝映左右 是先生胥于之基 醴泉郡葛川原莽蒼之地 爲衣履之藏 夫人同原而子坐合祔 松杉蔚茂禁樵牧之往來 洋陟降之靈如在其上 但歲久年寢爲風雨剝落短碣字泑 今欲改堅 舊無神道之 衛仰其當年之 未遑歟方媒螭其首而 龜其跌責 銘於余余非直耆荒不 文無官而忝大夫之牲石禮有防閑有所不敢而辭之則曰 今禮已變無官可稱有事于先者終 不可記述乎 請益固據其狀 先生本新羅宗姓 分貫順天以平陽君 諱摠爲始祖 高祖諱允仁麗朝中縣大夫典客令 曾祖諱洞匡靖大夫上護軍 祖諱惟精牧使贈 翊衛功臣麗山君 考諱承霔

號月潭左我太宗朝 左議政 封平陽府院君 諱襄景公 命不祧典錄 淸白勳 妣馬韓國 夫人平昌李氏 開城尹叢 女公官 通政大夫禮曹參議三司錄 原從功臣 且爲按國乘 太宗甲午工曹正郞 世宗丁刑曹參議 文宗辛未歷禮曹參議 端宗壬申 僉知中樞院事 是二品職載在使錄 其履歷之脫落推可知也 盖公以相臣之胃子 位至宰輔 忽棄官南歸 位嶺人而卜居九潭 必有其由聞以禮學著名 當時進退期準繩尺矣 滿招損爲戒 歟時君主幼沖國本搖而難兆見幾而 작즉非覆巢破卵鳳凰不翔者 歟與節齋先生宗瑞爲宗親而同朝想有 講磨之樂抑以三仁之之義相處耶 今不敢臆測然其用行舍藏之義則明矣 是可謂智仁勇之足以有辭于後也 配安東權氏監司執經

女有二子曰元石判事 贈戶議曰亨石翊贊戶議 女朴悌誠郡守 淑文川君長房孫 男若匂 昇平君若衡司直次房 孫男若枰縣監 參判若匂 男粹洪順天君 粹澄司直 粹涵縣監 粹潭府使 粹濂牧使贈判書 若衡男粹瀚司勇 若枰男希尹生員 希奭呂參奉贈戶議 希稷郡守 希說兵參 曾玄以下式蕃以昌名 宦勳業文學相繼而與鬱然 爲東方大族特其著者忍百堂樂 東籬允安竹日軒 光燁北渚瑬皆亨爼豆何其壯也 嗚呼公之勳業已載於鐵券其業績之顯不顯無

庸加損觀出處雍容無跡而明哲 保身積陰以終子姓之 繁衍恒赫 若公者宜有其報禮而 爲不遷之祖當不絶其祀 況墳墓守衛之方虎羊馬石各二及 九尺碑之可無且乎繼之而銘曰

花山磅礴洛水溶 洩君子攸憩惟道 是求用行舍藏 何以不藏世臣之

胄蚤年蜚英前途 方亨春官之屬仙 闥推彙時儒所貴 三司錄勳原從功臣 爲國許身天或樂禍 河潤九里惟毅可 耻括彙無咎見 幾之明絶意寵榮 權彼九潭里仁爲 美擇斯可止婆娑 邱林優游卒歲時 習典禮仁孝友弟 胎厥孫謨可以無渝 宜爾螽斯其羽詵詵 子孫振振鴻儒名官林林 傑傑於赫閥閱

靈山之原其拒其檉德人之塋

 

星山 李基元 謹撰

眞誠 李瓘鎬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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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당공 휘 유온신도비 병서

예운편(禮運篇)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기()땅으로 가시어 하()나라 때

일을 상고하셨고, ()땅에 가시어 건곤(乾坤)을 얻으셨으며, 이로 미루어 대개를 아셨지만 오히려 기송(杞宋)을 알기에 부족하다는 탄식을 하셨다.라했다. 이는 대개 징거할 것이 없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겠으나, 하나라와 은나라라도 문헌만 있다면 정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담(菊潭) 선생 김공 유온(有溫)은 조선이 융성하던 때에 원종공신으로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던 분이다. 난이 일어날 조짐이 있자 향리로 물러나 터전을 개척한 조상이 되었다.

대개 나라가 다스려지면 나아가 공을 세워 백성들에게 덕이 미칠 수 있고 이름은 역사에 기록될 만했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물러나 유일로 사면서도 원망함이 없고 곤궁해져도 번민하지 않으니 이 두 면에 있어서 필시 말할 말한 업적이 있을 것이나 세대가 이미 오래되고 유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으니 어찌 애석하고도 아쉽지 않으랴.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껏 없어지지 않고 족보와 실록에 더러 실려 있으니 족히 깃털 하나요, 떨어진 금조각과 같은 것으로 어찌 하() 나라를 알 수 있게 한 기()와 송()나라의 건곤(乾坤)이 아니겠는가.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豊山縣) 구담리(九潭里)는 화산(花山)이 그 동쪽에 펼쳐지고 낙동강(洛東江)이 그 남쪽으로 흘러들어 호산(湖山)의 제택(第宅) 들이 주위로 빛나니 이곳이 바로 선생이 터전을 잡아 살던 곳이다.

예천군(醴泉郡) 갈천(葛川)의 드넓은 들판과 마주한 둔덕은 선생이 잠들어 계신 곳인데, 부인과 합장으로 자좌(子坐)이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한데 나무꾼과 목동들의 왕래를 금함에 양양하게 오르내리는 정령은 그 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점차 밀어짐에 비바람에 씻기어 작은 비석은 글자가 마멸되어 지금 다시 세우려 한다.

예부터 신도비(神道碑)가 없었으니 당시에 미처 마련치 못함이 아니었던가. 바야흐로 이수와 귀부를 장만해 두고 내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늙고 글 또한 잘 하지 못하며, 벼슬도 못했는데 대부(大夫)의 신도비명을 써 달라 부탁받으니, 예법에는 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가 있는지라 감히 쓰지 못할 바가 있어 그 일을 사양하였다. 그러자, 지금 세상은 예법도 바뀌어 벼슬을 하지 못했더라도 지난 일을 일컬을 만한 것이 있다면 끝내 쓰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라 하며 더욱 확고하게 청하였다.

행장에 의거하면, 선생은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순천(順天)으로 관향을 나누었으니, 평양군(平陽君) 휘 총()이 시조가 되신다. 고조의 휘는 윤인(允仁)으로 고려조에 중현대부 전격령이며, 증조의 취는 형()으로 판밀직사사 상호군이며, 조의 휘는 유정(惟精)으로 목사를 지냈는데 익위공신(翊衛功臣)으로 여산군(麗山君)에 증직되었다. 고의 휘는 승주(承霔)로 호는 월담(月潭)인데, 조선 태조조에 좌의정으로 평양부원군 (平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경공(裵景公)이시다. 또한 조정에서 부조묘의 은전과 청백리에 책록 되었다. 비는 마한부인 평창(平昌) 이씨(李氏)로 개성윤(開城尹) ()의 따님이다.

공은 관직이 통정대부 예조참의 삼사록원종공신이다. 또한 왕조실록을 살펴보니 태종 갑오년(1414, 태종14)에 공조정랑, 세종 정묘년(1447, 세종 29)에 형조참의, 문종 신미년(1451, 문종1)에 예조참의, 단종 임신년(1452, 단종 즉위년)에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니 바로 2품직으로 사록(仕錄)에 실려 있으나 생년월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나머지 이력이 빠뜨려짐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공은 상신(相臣)의 맏아들로 태어나 지위가 재보(宰輔)에까지 이르렀으나 흘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남하여 영남사람이 되어 구담(九潭)에 터를 잡고 사셨으니 필시 거기엔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예학(禮學)이 저명하였다 하니 당시의 진퇴에는 척도가 분명하였을 것이나 혹시 너무 가득차면 기운다는 것을 경계했음인가? 당시에 군주는 아직 유충(幼沖)하여 나라의 터전이 흔들리고 혼란의 조짐이 싹트자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서 물러났다면, 이는 새집이 쏟기어 알이 깨져 봉황으로 날아오르지 못할 떼가 아니었던가.

저 절재(節齋) 선생 종서(宗瑞)와는 종친(宗親) 관계로서 같은 조정에서 벼슬함에 함께 학문을 논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삼인(三仁)의 의리로 서로 처함애랴. 지금은 감히 억측할 수 없지만 그 쓰이면 행하고 버리면 물러나있는 의리가 분명하였을 것이니 지((()으로 후세에 일컬을 만하다 할것이다.

부인은 안동(安東) 권씨(權氏) 감사(監司) 집경(執經)의 따님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원석(元石)은 판사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형석(亨石)은 익찬을 지냈다. 호조참의의 사위 박제함(朴偏誠)은 군수를 지냈고, 류숙(柳淑)은 문천군(文川君)이다. 맏집의 손자인 약균(若勻)은 승평군(昇平君)이며, 약형(若衡)은 사직이다. 둘째집의 손자인 약평(若枰)은 현감으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약균(若勻)의 아들 수홍(粹洪)은 순천군(順天君) 이며, 수증(粹證) 은 사직이며, 수함(粹涵)은 현감, 수담(粹潭)은 부사(府使), 수렴(粹濂)은 목사로 판서에 증직되었다.

약형(若衡)의 아들 수한(粹瀚)은 사용(司勇)이다.

약평(若枰)의 아들 희윤(希尹)은 생원, 희석(希奭), 희려(希呂)는 참봉으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희직(希稷)은 군수, 희열(希說)은 병조참의이며, 증손과 현손 이하는 더욱 번창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로 훈업(勳業)과 문학(文學)으로 서로 잇달아 일어나 우연히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특히 두드러진 분은 인백당(忍百堂)) 낙춘(樂春동리(東離) 윤안(允安) 죽일헌(竹日軒) 광엽(光嬅북저(北潛) ()인데, 모두 사당에 제향 되었으니 어찌 이다지도 장하였는가.

 

 

! 공의 훈공(勳功)은 이미 철권(鐵拳 ' 공신녹전)에 실렸으니 그 업적의 드러남과 드러나지 못함으로 어찌 보탬과 손상 함이 있겠는가. 아름다운 출처(出處)의 자취가 없으나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음덕(蘿德)을 딸아 자손들이 번창하고 혁혁하니 공과 같은 분은 그 보답을 받은 것이다. 예법으로 보더라도 불천지조(不遷之祖)가 되셨으니 의당 그 제사를 단절함이 없어야 겠거든, 하물며 분묘를 수호하는 곳에 호랑이며 양 · 말과 같은 석물이 두개씩 설치됨에 구척 묘비가 없

나 흘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남하여 영남사람이 되어 구담(九潭)에 터를 잡고 사셨으니 필시 거기엔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예학(禮學)이 저명하였다 하니 당시의 진퇴에는 척도가 분명하였을 것이나 혹시 너무 가득차면 기운다는 것을 경계했음인가? 당시에 군주는 아직 유충(幼沖)하여 나라의 터전이 흔들리고 혼란의 조짐이 싹트자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서 물러났다면, 이는 새집이 쏟기어 알이 깨져 봉황으로 날아오르지 못할 떼가 아니었던가. 저 절재(節齋) 선생 종서(宗瑞)와는 종친(宗親) 관계로서 같은 조정에서 벼슬함에 함께 학문을 논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삼인(三仁)의 의리로 서로 처함애랴. 지금은 감히 억측할 수 없지만 그 쓰이면 행하고 버리면 물러나있는 의리가 분명하였을 것이니 지() · () · ()으로 후세에 일컬을 만하다 할것이다. 부인은 안동(安東) '친씨()'감사(監司) 집경(執經)의 따넘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원석(元石)은 판사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형석(亨石)은 익찬을 지냈다. 호조참의의 사위 박제함(朴偏誠)은 군수를 지냈고, 류숙(柳淑)은 문천군(文川君)이다. 맏집의 손자인 약균(若努)은 승평군(昇平君)이며, 약형(若衡)은 사직이다. 둘째집의 손자인 약평(若粹)은 현감으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약균()의 아들 수홍(粹洪) 은 순천군(順天君) 이며, 수증(粹證)은 사직이며,수함(粹酒)은 현감, 수담(粹潭)은 부사(府使), 수렴(粹謙)은 목사로 판서에 증직되었다. 약형(業消訓의 아들 수한(粹辯)은 사용(司勇)이다. 약평(若粹)의 아들 희윤(希尹)은 생원, 희석(希索), 희려(希呂)는 참봉으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희직(希種)은 군수, 희열(希說)은 병조참의이며, 증손과 현손 이하는 더욱 번창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로 훈업(勳業)과 문학(文學)으로 서로 잇달아 일어나 우연히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특히 두드러진 분은 인백당(認百堂) 낙춘(樂春) ·동리(東離) 윤안(允安죽일헌(竹日軒) 광엽(光嬅) · 북저(北潛) ()인데, 모두 사당에 제향되었으니 어찌 이다지도 장하였는가.

! 공의 훈공(勳功)은 이미 철권(鐵拳: 공신녹전)에 실렸으니 그 업적의 드러남과 드러나지 못함으로 어찌 보탬과 손상됨이 있겠는가. 아름다운 출처(出處)의 자취가 없으나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음덕(蔭德))을 쌓아 자손들이 번창하고 혁혁하니 공과 같은 분은 그 보답을 받은 것이다.

예법으로 보더라도 불천지조(不遷之祖)가 되셨으니 의당 그 제사를 단절함이 없어야 하겠거든, 하물며 분묘를 수호하는 곳에 호랑이며 양·말과 같은 석물이 두개씩 설치됨에 구척 묘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명() 하노니

 

화산(花山) 은 꾸불꾸불

낙수(洛水)는 쉼 없이 흐르고

군자가 머물러 계신곳

오직 도()만 구하였다네.

나가고 물러남이여.

어찌 물러나 숨지 않으리요.

세신의 주손으로

조년부터 드러났네.

앞길이 형통할 즈음에

예조의 관리에 임명 되셨다네.

선달로 추중되었고

선비들도 귀하게 여겼다네.

삼사(三司) 에 책훈되어

원종공신이 되셨다네

나라 위해 몸 바쳤더니

하늘에서 화를 내림에

하윤(河潤) 구리 (九里) 로다

오즉 수치로 여길만하나

주머니를 닫아 허물치 않았다네

기미를 밝게 간파하고

벼슬길에 뜻을 끊었다네

저 구담(九潭)을 바라봄이여

어진 사람 사는 좋은 마을이로다

이곳을 택해 머무심이여

한가롭게 숲을 거니셨지

편안히 계시다 세상을 떠나시니

늘 독서하며 예법을 지켰다네

효도하고 우애함이여

그 후손들에게 남겨주심에

조금도 못함이 없었다네

후손들 번창한것 마땅하니

그 수효가 찹으로 많았왔다네

자손들 모두 빼어나니

큰 선비며 이름난 관리로다

임임하고 걸걸함이여

혁혁한 벌열 가문이로다

영산(靈山) 둔덕이여!

그곳에 터를 잡았으니

덕이 있는 사람의 무덤이로구나

 

성산(星山) 이기원(李基元) 근찬(謹撰)

진성(眞誠) 이관호(李瓘鎬)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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