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詩(당시) 峴山懷古(현산회고) 陳子昻(진자앙)
秣馬臨荒甸(말마임황전)登高覽舊都(등고람구도)猶悲墮淚碣(유비타루갈)
尙想臥龍圖(상상와용도)城邑遙分楚(성읍요분초)山川半入吳(산천반입오)
丘陵徒自出(구릉도자출)賢聖幾凋枯(현성기조고)野樹蒼煙斷(야수창연단)
津摟晩氣孤(진루만기고)誰知萬里客(수지만리객)懷古正踟躕(회고정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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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峴山(현산) 부근에 와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높은 곳에 올라 舊都(구도)를 바라보네
墮淚(타루)의 비 바라보니 오히려 슬퍼지고
또한 제갈공명의 八陣圖(팔진도)가 생각나네
성과 읍은 멀리 楚(초)나라의 영토였으나
산과 강의 반은 吳(오)나라 땅에 속한다네.
丘陵(구능)은 옛날 같이 변함없이 솟아 있으나
聖賢(성현)은 그 얼마나 시들어 가버렸던가
들에 선 나무에는 어두운 안개 끼어있고
나루터 누각은 저녁 기운 감도는 속에 홀로 서 있네
누가 알리 만리 먼곳에서 온 나그네 마음
옛일 생각하니 만감 가슴을 매워 떠나기 어렵다네.
【註】
峴山(현산)........ 襄陽(양양) 남쪽에 있는 산. 晉(진)의 羊祰(양고)가 荊州(형주) 都督(도독) 이었을 때 이 산에 자주 올라가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은 적이 있었다. 어는 날 從事中郞(종사중랑)인 鄒湛(추담)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주 가 있은 다음에 이 산이 생겨났다. 그 이래 여기 이 산에 올라와 멀리 바라 보는 사람, 나와 그대같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 모두 지금은 사라져 없 어지고 아무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 생각하니 사람을 슬프게 할 따름이다. 만일 백년 뒤에 일을 알 수 있다면, 혼백은 여기 올라와 누가 다녀갔는가 다 시 살펴 볼것이다.」 鄒湛(추담)이 대답하기를 「공의 덕과 업적은 이 산과 같이 전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후 羊祰(양고)의 덕을 기르는 비를 산 위에 세웠다. 이 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杜預(두예)가 墮淚碑(타루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荒甸(황전)....... 荊州(형주)는 고대 荊蠻(형만)이라고 부르던 邊方(변방)이므로 이렇게 부른 다.
墮淚碣(타루갈)... 앞에서 말한 墮淚碑(타루비), 둥근 것은 碣(갈), 모난 것을 碑(비)라고 하는 데 平仄(평측)을 맞추기 위해 碣(갈)이라고 했다. 모두 石文(석문)을 나타내 는 말이다.
臥龍圖(와용도)... 臥龍(와룡)은 諸葛孔明(제갈공명)이 襄陽(양양) 고향에 있을 때의 이름이다. 圖(도)는 八陣圖(팔진도). 팔진도는 돌로 만든 일종의 迷宮(미궁)이며 여기 발을 들어놓으면, 적병은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단 팔진도는 魚腹(어복) 부근에 만들었으며 峴山(현산) 가까이가 아니다. 다만 제갈공명이 이 부근 사람이므로 연상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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