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詩(당시) 奉和幸長安故城未央宮應制(봉화행장안고성미앙궁응제) 宋之問(송지문)
漢王未息戰(한왕미식전)蕭相乃營宮(소상내영궁)壯麗一朝盡(장려일조진)
威靈千載空(위령천재공)皇明悵前跡(황명창전적)置酒宴群公(치주연군공)
寒輕綵仗外(한경채장외)春發幔城中(춘발만성중)樂思廻斜日(낙사회사일)
歌詞繼大風(가사계대풍)今朝天子貴(금조천자귀)不假叔孫通(부가숙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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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漢王(한왕) 아직도 전쟁을 끝내지 않았는데
재상 蕭何(소하)가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네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어도 一朝(일조)에 흔적 없이 살아졌고
위엄 있던 모습도 허물어져 허망하게 천년 세월 흘러갔네
지금의 천자는 이 유적 방문하고 옛날을 슬퍼하며
많은 신하와 함께 주연을 베풀어 울적한 마음 씻으려하네
오색 아름다운 의장대는 눈부시도록 찬란해 밖에 한기도 잊은 듯하고
천막을 친 성안에는 벌써 봄기운이 감도는 것같네.
즐겁게 지내는 사이 해는 벌써 기울고
노래는 이어서 大風歌(대풍가)를 부른다네
오늘아침 高祖(고조)는 처음으로 천자가 귀하다는 것 알았다고 술회하고
叔孫通(숙손통)이 한 일 거짓 된 것 아니었네.
【註】
長安故城未央宮(장안고성미앙궁)... 漢高祖(한고조) 7년, 옛날 秦(진)의 離宮(이궁)이었던 곳에 長安城(장안성)을 經營(경영)하는데, 먼저 長樂宮(장락궁)을 세웠다. 唐(당) 의 長安城(장안성)에서는 서쪽에 해당하고, 조금 떨어진 곳이다. 8년에 蕭何 (소하)가 未央宮(미앙궁)을 지었다. 「蕭丞相(소승상) 未央宮(미앙궁)을 지음. 東闕(동궐), 北闕(북궐), 前殿武庫(전전무고), 太倉(태창)을 지음. 高祖(고 조) 戰地(전지)에서 돌아와 宮闕(궁궐)의 규모가 너무나 큰 것을 보고 노하 였다. 蕭何(소하)를 보고 이르되, 천하가 어지럽고 아직도 전쟁으로 고통을 받기 수년, 成敗(성패)도 알 수 없는 마당에, 이렇게 궁궐을 도에 넘치도록 지어서 어쩌자는 거냐. 蕭何(소하)가 대답하기를, 천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 으므로, 宮室(궁실)을 이렇게 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천자는 四海(사해)로서 집으로 삼고, 장엄하지 않으면 威嚴(위엄)을 갖출 수 없습니다. 또한 후세 에 사람이 더 수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高祖(고조)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라고 있다.
漢王(한왕)...... 漢高祖(한고조) 劉備(유비).
蕭相(소상)...... 중국 漢(한)나라 건국공신. 江蘇省(강소성) 沛縣(패현) 출신. 법령에 밝고, 沛縣(패현)의 하급관리로서 일찍부터 한나라 高祖(고조) 劉邦(유방)의 옹호 자였다. 유방이 沛公(패공)이 되자 庶務(서무)를 담당했으며, 咸陽(함양)에 입성했을 때에는 제일 먼저 秦(진)나라의 律令圖書類(율령도서류)를 압수하 였기 때문에, 유방이 지방의 險要(험요)와 戶口(호구) 수, 백성의 病苦(병고) 의 원인 등 천하의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유방이 한나라 왕 이 되자 승상에 임명되었으며 韓信(한신)을 대장군으로 천거했고, 楚(초)․ 漢(한)의 싸움에서 關中(관중)에 머물러 兵糧(병량)과 병사의 보급에 힘썼 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찬후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진희와 韓信(한 신) 등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相國(상국)에 임명되었다. 또 高祖(고조)의 法三章(법삼장)을 고쳐서 秦律(진율)을 기초로 한 九章律(구장률)을 제정하 는 등 한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시호는 文終侯(문종후)이다.
皇明(황명)........ 天子(천자)를 말한다.
綵仗(채장)........ 오색 비단으로 장식한 儀仗(의장). 정장한 호위부대의 대열.
幔城(만성)........ 휘장을 친 임시 御居(어거).
千載(천재)........ 漢(한)의 高祖(고조)8년에서 唐(당)의 中宗(중종) 景龍(경룡) 2년까지가 약 907년이며 천년에 모금 모자라지만 대략의 수를 말한 것임.
廻斜日(회사일)... 斜日(사일)를 되돌리며, 해가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
大風(대풍)........ 漢(한)나라의 劉邦(유방)이 지은 楚辭體(초사체)의 시. 史記(사기)와 文選 (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유방은 項羽(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 뒤 고향인 江蘇省(강소성) 沛縣(패현)에 돌아가 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하여 잔치 를 베풀고, 스스로 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아이들도 익히게 했다. 句(구) 중 간에 兮(혜)를 넣어 리듬을 맞추었으며 3구 23자의 詩(시)지만 웅대한 기상 이 잘 나타나 있다.
叔孫通(숙손통)... 본래 秦(진)의 2세 황제에게 사사한 博士(박사), 한에 사사해서 역시 박사가 되었다. 漢(한)의 초 秦(진)의 苛法(가법)을 없애고 간단하게 한 것은 좋았 는데, 高祖(고조)의 부하는 원래, 거칠고 무식하여 山賊(산적)의 무리였으므 로 群臣(군신)이 술을 마시면 서로 잘 다투고, 취했을 때는 잘 노하고 고함 을 지르며 검을 빼서 기둥을 치는등 예절이 없어 高祖(고조)는 매우 난처하 게 생각하게 되었다. 숙손통은 高祖(고조)를 설득해서 일정한 예절을 정하고, 조정에서 이를 시행시키도록 했다. 마침 漢(한)의 7년 長樂宮(장락궁)이 낙 성되자, 거기서 10월에 군신이 朝賀(조하)하게 되었다. 이때 宮門(궁문)에 들어가니, 騎兵(기병)과 步卒(보졸)로서 儀仗(의장)을 굳게하고, 百官(백관) 은 모두 尊卑(존비)의 순서에 따라 좌우전후로 정열해서, 차례대로 奉賀(봉 하)하게 되었으므로, 왕후이하 엄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술이 나와 연회를 열었으나, 모든 사람이 예의를 지켰으며, 예절을 지키지 않는 자 는 御史(어사)의 손으로 장외에 쫓아내 버렸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예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高祖(고조)는 「짐은 오늘 비로소 皇帝(황제)가 귀 함을 알았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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