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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 唐詩(당시) 述懷(술회) 魏徵(위징)

청남

 

 

唐詩(당시) 述懷(술회) 魏徵(위징)

 

 

中原環逐鹿(중원환축록)投筆事戎軒(투필사융헌)縱橫計不就(종횡계부취)

慷慨志猶存(강개지유존)仗策謁天子(장책알천자)驅馬出關門(구마출관문)

請纓繫南粵(청영계남월)憑軾下東藩(빙식하동번)灪紆陟高岫(울우척고수)

出沒望平原(출몰망평원)古木鳴寒鳥(고목명한조)空山啼夜猿(공산제야원)

旣傷千里目(기상천리목)還驚九折魂(환경구절혼)豈不憚艱險(기불탄간험)

深懷國士恩(심회국사은)季布無二諾(계포무이락)侯嬴重一言(후영중일언)

人生感意氣(인생감의기)功名誰復論(공명수복론)

 

煬帝(양제)의 실정으로 난세가 되니

중원에는 한 마리 사슴을 쫓듯 群雄(군웅)이 서로 다투는 모양이 되었네.

일개 문사인 나도 붓을 던지고 전란 속에 분주히 달리는 몸이 되었는데.

 

여러 번 군웅에게 宇內統一(우내통일)의 비책을 말해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천하를 염려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네.

()에 달려가 천자를 만나서 동방 宣撫(선무)의 대임을 자처하니

즉시 윤허되어 천자의 使者(사자)로서 말을 달려 函谷關(함곡관)을 나가네.

옛날 終軍(종군)이라는 학자는 南越(남월)使者(사자)로 갈 때

바라건대 긴 갓끈을 달라, 그것으로 남월왕을 묶어 오리라 했다하네.

또한 酈食其(려식기)는 한고조를 위해 ()에 가서 왕을 설득

한사람의 병사도 다치지 않고 ()70()을 항복시켰다네.

나는 그들과 같은 일을 하려 굽은 길을 지나 높은 산에 오르고

아득히 바라보이는 평원을 지나 가는 것이라네.

고목에는 새들이 차가운 소리로 울고 있고

밤이 되니 인적 없는 산에서 원숭이 울음소리 들리네.

천리 길을 떠난 내겐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마음 아프게 하는 것 뿐인데

언덕길에 오르니 간이 서늘하니

옛사람이 九折坂(구절판)에서 놀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생각되네.

나도 사람이니 어찌 험난한 것이 아무러치도 않으리

그러나 나를 신임하여 國士(국사)로 보내준 황제의 은혜를 생각하네.

()季布(계포)는 한번 수락한 일은 절대로 번복 않았고

()侯嬴(후영)이라는 노인은 한 마디 약속을 지키려 목을 바쳤다네.

인생으로 태어나 意氣(의기)를 생각하며 당당히 행동한다네.

魏徵(위징: 580643)... 자는 玄成(현성) 魏州(위주) 曲城(곡성) 사람. 젊을 때 고아로서 타락 된 생활을 했으나, 학문을 닦아 시기를 기다리며 큰 뜻을 갖고 있었다. 群雄 (군웅)의 한 사람인 李密(이밀)이라는 자와 함게 ()歸服(귀복)하였 . 그러나 李密(이밀)은 천하를 잡을만한 인물이 못되면서도 또한 남의 밑 에 들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武德(무덕) 112, 그는 모반을 꾀하다가 잡 혀서 처형되었다. 그때 魏徵(위징)의 입장은 매우 난처했다고 생각된다. , 李密(이밀)의 부하인 명장 徐世勣(서세적)李密(이밀)을 위해 黎陽城 (여양성)을 지키며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魏徵(위징)皇帝(황제) 를 만나서, 그를 귀순시키는 使者(사자)를 자원했다. 즉시 秘書丞(비서승) 로 임명되어 黎陽(여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徐世勣(서세적)에게 그의 舊主(구주)李密(이밀)()에 모반한 사실과 그가 잡혀서 살해 된 사실을 알리고 ()에게 귀순할 것을 권했다. 徐世勣(서세적)은 그 말 을 듣고 舊主(구주) 李密(이밀)의 시신을 인수 받아 고이 장사지내주고, ()을입은 다음 모든 영토를 ()에게 바치고 항복했다.

이 시는 魏徵(위징)勅命(칙명)을 받고 潼關(동관)을 나갈 때의 작품이다.

述懷(술회).......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시. 唐都(당도)의 동쪽, 潼關(동관)을 나와 이어 谷關(함곡관)을 나가서, 東國(동국)에 있는 호걸을 선무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의 작품이다. 魏徵(위징)張儀(장의)()()이 되었을 때, 列國(열국)親秦政策(친진정책)을 취하도록 설득하며 다니며, 친화조약을 締結(체결)해서, 連衡(연형)이라 일컬어 졌다. 열국은 아침에 合從(합종), 녁에 連衡(연형)으로 정책이 정해지지 않아 서로 다투며, ()의 강대함을 잊은 탓으로 모두 최후에 ()에게 먹히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慷慨(강개)....... 천하 국가의 일을 생각하는 감정의 高揚(고양)을 말함.

仗策謁天子(장책알천자)... ()은 말채찍. 후한의 光武帝(광무제)()의 천하를 회복하기 위해 기를 들고 河北(하북)지방을 서무한다는 말을 들은 鄧禹(등우) ()()하고 北渡(북도)해서, 劉秀(유수)를 쫓아 鄴下(업하)에 이르 .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두었다. ()은 귀인과 면해하는 것을 말하며, ()光武帝(광무제)의 부하가 되어, 장군으로서 큰공을 세웠다.

驅馬出關門(구마출관문)... ()는 말에 채찍을 주어 빨리 달리게 한다. 關門(관문)長安( ) 동쪽에 있는 關所(관소)의 문. 潼關(동관)이라 보아도 좋고, 그것 보다 더 동쪽에 있는 函谷關(함곡관)이라 생각해도 좋다. 이 두 관문을 지나지 않 으면 동쪽으로 갈 수가 없다.

請纓繫南粵(청영계남월)... ()은 갓끈. 南粵(남월)南越(남월)이라고도 쓰며 지금의 廣東( ), 廣西省(광서성) 부근에 있었던 나라. 정한의 終軍(종군) 나이 18, 武帝(무제) 선발해서 博士(박사)로 함. ...... 뒤에 諫大夫(간대부)에 발탁되 南越(남월)使者(사자)로 감. 스스로 청하기를 긴 갓끈을 주면, 반드시 남월의 왕을 묶어 그를 闕下(궐하)에 끌고 오리라, 했다. 終軍(종군), 남월에 가서 越王(월왕)을 설득한다. ()은 전적으로 귀속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재상 呂嘉(여가) 內屬(내속)을 바라지 않아, 병사를 일으켜 그 왕을 죽이고, 사자로 간 자들도 모두 죽였다. 終軍(종군) 죽을 때 나이 불과 20세였다.<前漢書(전한서)>

憑軾下東藩(빙식하동번)... ()은 차 앞에 있는 횡목. 東藩(동번)은 동쪽에 있는 제후의 나라. 여기서는 ()를 말함. 史記(사기)淮陰(회음:韓信)이 동쪽에 () 칠 때, 漢王(한왕)은 자주 榮陽(영양), 成皐(성고) 때문에 고심을 했다. 酈生 (려생)이 말하기를, ()청하건데 明詔(명조)를 받들고 齋王(재왕)을 설 득한다면 ()을 위한 東藩(동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酈生(려생)을 시 齋王(재왕)을 설득하게 했다. 齋王(재왕)田廣(전광)은 그렇게 하리라 하며 酈生(려생)의 말을 들었다. 淮陰侯(회음후)酈生(려생)() 엎드려, ()70성이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밤에 군사에게 평원을 지나 ()를 기습하다.라고 있다. 韓信(한신)의 군대가 닥쳐오자 齋王(재왕) 田廣(전광)食己(식기)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잡아 蒸殺( )했다.

鬱紆(울우)..... 산길이 굽고 험한 모양.

高岫(고수)...... 산에 굴이 있는 것을 ()라고 한다. 여기서는 높은 봉우리를 말함. 驪山 (려산)에서 函谷關(함곡관) 부근에는 산에 많은 동굴이 있으므로 이런 형용 을 한 것이다.

出沒(출몰)...... 산길이 높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먼 평야가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것.

空山(공산)...... 인적이 없는 쓸쓸한 산.

千里目(천리목)... 천리까지 멀리 바라봄.

九折魂(구절혼)... 구불구불 길이 험한 산 언덕길. 九折坂(구절판)이란 곳이 益州(익주)에 있다. 前漢(전한)王陽(왕양)이 자사가 되어 거기 다다랐을 때, 부모로부터 받 은 몸을 어찌 이런 험한 곳에 노출하리.라 했다. 뒤에 王尊(왕존)이라는 사 람이 또 자사가 되어 부임해 왔는데, 九折坂(구절판)에 다다르자 부하에게, 이 고개가 王陽(왕양)이 겁을 낸 곳인가그리고는 자기 차 마부에게 빨리 말을 달려라라고 명했다 한다. 그래서 王陽(왕양)은 효자다, 王尊(왕존) 충신이다, 라고 일컬어졌다.

艱險(간험)........ 험한 모양.

國士恩(국사은).... 國士(국사)란 나라에서 으뜸가는 인물이라는 뜻이며, 국사로서 대우받는 은 혜를 말한다.

季布(계포)........ 중국 한()나라 때의 무장(武將). ()나라 사람. 항우(項羽) 밑에서 장 수가 되어 한초가 싸울 때 한나라의 왕 고조(高祖)를 괴롭혔다. 항우가 멸 망한 후 고조는 천금(千金)으로 계포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주 (周氏)집에 숨어서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황금 100근을 얻 음은 계포의 일낙을 얻음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라는 고사 (古事)가 생기게 되었다. 계포일낙(季布一諾)이란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 의 틀림없는 승낙을 일컫는 말이다.

侯嬴(후영)...... 전국시대의 사람. 속세를 피해 ()城門(성문)을 지키는 수위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의 공자 信陵君(신능군)의 후대에 감격해서, 목숨을 걸고 그의 계획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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