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선등록(景德傳燈錄) 제5권(중국편)
① 제33조 혜능(惠能)대사
경덕전등록 제5권에는 제 33 조 혜능(慧能)대사와 그외 법을 이은 43 인의 역사가 나온다
혜능대사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그의 선조는 범양(范陽) 사람이다. 아버지 행도(行瑢)가 무덕(武德) 때에 남해의 신주(新州)로 귀양을 와서 살게 되었다. 3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수절을 하면서 길렀는데 그가 자람에 따라 집안이 어려워서 대사가 나무를 팔아서 살아갔다. 하루는 나무를 지고 시장에 갔다가 어떤 이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아 나그네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법이며, 누구에게서 얻었오.」
「이 경은 금강경이라는 것인데 황매(黃梅)의 홍인대사께서 얻었오.」
대사는 급히 어머니에게 스승을 찾아갈 뜻을 아뢰고 바로 소주(韶州)로 가다가 유지략(劉志略) 거사를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그의 고모인 무진장(無盡藏)비구니가 항상 열반경 (槃經)을 읽고 있었다.
대사가 잠시 듣고서 그 이치를 해석해 주니, 비구니는 드디어 책을 들고 와서 글자를 물었다. 대사가 말했다.
「나는 글자는 모르니 이치나 물으라.」
「글자도 모르면서 어찌 뜻을 아시오.」
「부처님의 묘한 이치는 문자에 구애되지 않는다.」
비구니가 깜짝 놀라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혜능은 도가 있는 사람이니, 청해다가 공양하시오.」
이때에 마을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절하고 공경하였다. 그 근처에 보림사(寺) 옛터가 있는데 무리가 의논하기를 집을 지어서 대사를 살게 하자 하니, 사방에서 무리가 구름 같이 모여 잠깐 사이에 좋은 집이 이루어졌다. 하루는 생각하기를「내가 큰 법을 구하러 나왔는데 어찌 중도에서 그치겠는가」 하고, 이튿날 길을 떠나 창락현 (昌) 서산에 있는 석실(石室)에 이르러서 지원선사(智禪師)를 만났다.
대사가 법을 물으니, 지원이 대답했다.
「그대의 신기를 살피건대 예사 사람이 아니다. 내가 들으니 서역에서 온
리달마가 황매에게 마음법을 전했다 하니 그대는 거기에 가서 의심을 풀라.」대사는 곧 하직하고 떠나서 바로 황매의 동선(東神)에 이르르니, 당의 합혈(咸) 2년이었다. 홍인대사가 첫 눈에 보고 알아 보더니, 뒤에 의발을 전해주고회)·집 (集)이 맞닿는 지역에 숨어 있게 하였다.
의봉(鳳) 원년 병자 정월 8일 남해로 가서 인종법사(印宗法師)를 만나정사(寺)에서 열반경을 강했다. 대사가 낭무 (廊無)에 있는데 그날 밤에 람이 불어서 깃대 위의 번기가 나부끼었다. 때마침 두 스님이 다투는데 하나 기가 흔들린다 하고 하나는 바람이 움직인다 하였으므로 대사가「점잖은 토론에 속된 무리가 참례해도 좋겠는가. 그는 바람과 기가 움직이것이 아니요, 그대들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말했다.
인종이 이 말을 몰래 듣고 모골이 오싹해지면서 이상히 생각했다. 이튿날 사를 방으로 불러들여 바람과 번기의 이치를 묻자, 대사가 앞뒤 이치를 밝히 말하니 인종이 얼른 일어나서 물었다.
「행자는 예사 사람이 아닌것 같은데 스승이 누구시오.」
대사는 하나도 숨기지 않고 법을 얻은 동기를 자세히 말하니 인종이 제자예를 갖추어 선법을 묻고, 이어 4중에게 고했다.
「인종은 구족한 범부로서 이제 육신보살(肉身菩薩)을 만났다.」
하고는 전해 받은 법의를 보여 달라 해서 모두가 절하고 공경케 하였다. 정월 15일에 여러 대덕들을 모아 머리를 깎았고, 2월 8일에 법성사(法性에 가서 지광율사(智光律寺)에게 구족계를 받으니, 그 계단(戒壇)은 송의 干발다라삼장(那跋陀羅三藏)이 설치한 것이었다.
구나발다라는 「뒤에 육신보살이 이 계단에서 계를 받으리라」 예언하고 또 (梁)의 진제삼장(眞諦三藏)계단 옆에다 보리수 두 포기를 심으면서 말하기 「이후 12년 뒤에는 큰 보살이 나와서 이 나무 밑에서 위 없는 법을 연설하여 량없는 무리를 제도하리라」하였는데 과연 대사가 계를 갖춘 뒤에 이 나무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개설하니, 완전히 옛 예언이 맞은 것이다.
이듬해 2월 8일에 홀연히 대중에게 말하기를「나는 여기에 살고싶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겠다.」 하니, 인종 법사와 승속 천여인이 대사를 전송하여 사로 돌아가게 하였다.
소주자사 위거(葦據)가 청하여 대범사(大梵寺)에서 법률을 굴리게
하였고, 아울-상심지계 (無相心地戒)를 받았는데 문인이 기록해서 단경(壇經)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한다. 그리고는 다시 조계로 돌아와서 큰 법비를 뿌리니, 언제나 학자들이 천명 이하에 내리지 않았다.
중종(中宗)이 신룡(神龍)원년에 조칙을 내리어 「짐이 혜안(慧安)과 신수(神秀), 두 대사를 궁중으로 청해서 공양하고, 틈틈이 일승의 이치를 강구하였는데 두 대사가 늘 사양하기를 「남방에 있는 혜능선사가 홍인대사의 법을 비밀히 받았으니, 그에게 물으라 하였소. 이제 내시(內侍), 설간(薛簡)을 보내서 대사를 부르는 터이니, 대사는 자비를 베풀어 속히 서울로 오오」하였다.
대사는 병을 핑게로 하여 사표를 내고 숲속에서 일생을 마치겠다고 하였다. 설간이 물었다.
『서울에 있는 선덕(禪德)들이 모두 말하기를「도를 알고자 하면 반드시 좌선을 하여 선정을 익혀 해탈을 얻으라」하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법을 말씀하십니 777?
『도는 마음을 인하여 깨닫는다. 어찌 앉는데 있으랴. 경에 말씀하시기를「만일 여래가 앉거나 다닌다고 보면 그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만일 생멸이 없으면 그것이 여래의 청정한 선정이오. 모든 법이 공적하면 그것이 여래의 청정
한 앉음이다. 끝끝내 증득할 것이 없거늘 하물며 앉을 것이 있겠는가.』「제자가 돌아가면 반드시 주상(主上)께서 물으실 것이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 자비로 지시해 주소서.」
「도는 밝음도 어두움도 없다. 밝음과 어두움은 서로 바뀌는 뜻인데 밝음과 밝음이 끝없다 하여도 다함이 없다.」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움은 번뇌에 비유하는데 수도하는 사람이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리지 않으면 비롯함이 없는 생사를 어찌 벗어나겠읍니까?」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리는 것은 2승의 근기이다. 높은 지혜의 큰 근기는 모두 그렇지 않다. 밝고 어두운것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진실한 성품이니, 진실한 성품이란 범부에 있어서도 줄지 않고, 성현에 있어서도 늘지않고, 번뇌에 있어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에 있어서도 고요함이 아니다. 끊이지 않고 항상치 않으며, 가지 않고 오지 않으며 중간이나 안팎에 있지도 않으며, 나지 않고 멸하지도 않아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 변천하지 않음을 도라 한다.」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함으로써 남을 그치고 남으로써 멸함을 드러내니, 멸함도 멸함이 아니고 남을 남이 없다 하거니와 내가 불생불멸을 말하는 것은 본래 남이 없고 지금도 멸하지 않는다. 그 까닭에 외도와 같지 않다. 그대가 만일 마음의 요점을 알고자 하면 온갖 선악을 생각치 아니하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의 본체에 깨달아 들어가서 당연히 항상 고요하고, 묘한 작용이 항하사모래 같이 많으리라.」
대사께서 불생불멸을 말씀하시니, 어찌 외도와 다르겠읍니까.」
설간이 가르침을 받고 활연히 크게 깨달아 절하고 물러가서 궁궐로 돌아가 대사의 말대로 아뢰니, 조칙을 내리어 대사께 사례하고 아울러 마납가사 한벌과 비단 백필과 바루 한벌을 하사했다.
12월 19일에 조서를 내리어 보림사를 고쳐 중흥사(中興寺)라 이름하고, 3년 11월 18일에 다시 소주자사에게 조서를 내리어 더욱 융성한 대접을 하사하고 법천사(法泉寺)라는 편액(額)을 하사했다.
신주의 옛절, 국은사(國恩寺)에서 어느날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 선지식이여, 그대들은 제각기 마음을 맑히어 내말을 잘 들으라. 그대들의 마음이 곧 부처이다. 다시 망서리지 말라. 그 밖에 어떤 법도 건립할 것이 없다. 모두가 본 마음에서 갖가지 법이 난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하였다. 만일 종지(種智)를 이루고자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통달하라.
만일 온갖 곳에서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형상에 대하여 밉다 곱다 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취하고 버리는 생각도 않고 한가히, 고요히, 담박히 하면 이것이 일상삼매요, 온갖 곳에서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누움에 순일하고 곧은 마음으로 도량을 움직이지 않으면 참으로 정토를 이루나니, 이를 일행삼매라 한다.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삼매를 갖추면 땅에 있는 종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힘을 갈무리한 것 같나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도 그러하다. 나의 설법은 마치 때에 맞춘 비가 온 누리를 널리 적시는 것 같고, 그대들의 불성은 종자에다 비유할 수 있으니, 이 비를 맞으면 모두가 싹이 틀것이요, 나의 가르침을 받드는 이는 결정코 보리를 얻을 것이요, 나를 의지해서 행하는 이는 반드시 묘한 과위를 얻을 것이다.」
선천(先天) 원년에 무리들에게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홍인대사의 의발을 전해 받았는데 이제 그대들에게 설법만을 하고, 법의는 전하지 않노니, 그대들의 믿음이 순수하게 익어서 큰 일을 감당할 것이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게송을 들으라.
心地含諸種 심지함제종 普雨悉皆萌 보우실개맹
頓悟花情已 돈오화정이 菩提果自成 보리과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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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마음자리에 여러 종자 있으니
두루 내린 단 비에 모두가 싹이 트네
꽃의 심정 전부를 문득 깨닫고 나면
지혜의 열매는 스스로 익으리.
대사가 게송을 마치고 다시 말했다.
「그 법은 둘이 없고, 마음도 그렇다. 그 도는 청정하고 형상들도 없다. 그대들은 행여 조촐함을 관찰하거나 마음을 비우려 하지 말라. 이 마음은 본래 청성하여 취하거나 버릴것이 없으니, 제각기 노력해서 인연 따라 떠나라.』
대사가 이렇게 설법하기 40년이 되는 해 7월 6일에 제자에게 명하여 신주 국은사에 가서 보은탑(報恩塔)을 세우게 하고, 이어 공사를 다른 것 보다 「곱이나 잘 하라」하였다. 이때에 촉승(蜀僧) 방변(方)이 와서 인사를 하는데 조각(彫像)에 능하다 하니 대사가 반듯이 앉으면서 말했다.
「내 형상을 조각해 보라.」
방변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대사의 진영을 조각하니 높이가 일곱치 가량 되었는데 교묘한 재주를 다하였다. 대사가 이를 보고 말했다.
「그대가 형상은 잘 조각하나 불성에는 능숙하지 못하구나.」
그리고는 옷과 물건으로 삯을 주니, 그 스님이 받아 절하고 물러갔다. 선천2년 7월 1일에 문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신주로 가려 하니, 그대들은 속히 배를 손질하라.」
이 때에 대중이 슬피 울면서 좀 더 머무시기를 청했으나 대사가 대답했다.「부처님들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도 열반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니, 왔으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의 이 몸도 반드시 가야 한다.」대승이 말했다.
「스님께서 지금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겠읍니까?
「입사귀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니, 다시 올 날을 말할 수 없다.」
「스님의 법인은 누구에게 전하십니까?」
「도 있는 이는 얻고, 마음 없는 이는 통달한다.」「뒤에 환란이 없겠읍니까?」
「내가 죽은지 5,6년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내 머리를 끊어가들으라.」 하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頭上養親(두상양친) 口裏須餐(구리수찬)
遇滿之難(우만지난) 楊柳爲官(양류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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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머리 위에 어버이를 기르고
입안에 밥을 찾는다.
만의 환란을 만나면
양유(楊柳)가 관리가 된다.
「내가 간지 70년에 두 보살이 동쪽에서 오리니, 하나는 집에 나는 출가한 이로서 동시에 교화를 펴서 나의 종지를 붙들어 세미고 법손이 번창하리라.」
말을 마치자 신주의 국은사로 가서 목욕한 뒤에 가부좌를 맺고 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하고, 흰 무지개가 땅에서 뻗었다. 이는 일이었다.
이 때에 소주와 신주의 두 자사가 각각 탑을 세우니, 승속이 데 두 고을의 자사가 같이 향을 피워 축원하기를 「향 연기가 뻗ㅎ께서 돌아가시려는 곳이다」하였다. 이때에 향로가 하늘로 곧게로 날아가니 11월 13일에 탑에
넣었다. 수명은 76세였다. 시자가 맡았다.
이때에 소주자사 위거가 비문을 찬술하였고, 문인들이 먼저 말억해서 먼저 철엽포(鐵葉布)로써 대사의 목을 견고히 보호하였다.가 전한 법의를 넣었고 중종(中宗)이 하사한 마납가사와 보배 바투조각한 동상과 도구들은 탑을 관리하는
개원(開元) 10년 임술 8월 3일 밤중에 갑짜기 탑에서 쇠사슬이리가 들렸다. 스님들이 놀라서 일어나 보니 어떤 효자가 탑에서 달아다. 이내 살펴보니, 대사의 목에 상처가 있었다. 도적이 생긴 사실을 을에 알리니, 군수 양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丞)이 보고를 받으려 하다가 5일만에 석각촌(石角村)에서 도적을 붙들었다. 소주로 문(鞠問)하니, 장정만(張淨滿)이란 자로서 여주의 양현 사람이 었다다.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의 스님 金大悲가 돈 2천양을 주고 6조의 머리를 끊어 해동(海東)으로 가지고 가서 공양하려 했음을 알았다.
유자사는 바로 형을 내리지 않고 몸소 조계에 가서 대사의 상족(上足=맏게자)인 영도(鞱)에게 물었다.
「어떻게 처단하리까.」
「만일 국법으로 따진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지만 불교의 자비로는 원수와 친한 이가 평등 합니다. 하물며 그는 갖다가 공양하려든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자사가 탄복하고 놓아 주었다.
상원(上元) 원년에 숙종(肅宗)이 사자를 보내 대사의 의발을 내도량으로 모셔다가 공양하겠다 하였드니, 영태(永泰)원년 5월 5일에 이르러 대종의 꿈에 6조대사가 자기의 의발을 달라 하므로 7일에 자사 양함(楊咸)에게 조서를 내리었다.
「짐이 혜능선사께서 법을 전해 받은 가사를 다시 조계로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꿈을 꾸었기에 이젠 진국대장군(鎭國大將軍), 유숭경 (劉崇景)을 시켜받들어 모시고 가게 하노라. 짐은 이를 나라의 보배라 하노니, 경들은 본사에다 법다이 봉안하여 여러 스님들 가운데 종지를 잘 받드는 이로 하여금 엄숙히 수호하여 실수함이 없게 하라.」
나중에 혹 도적을 맞더라도 모두 멀리 가기 전에 붙들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네 차례나 거듭하였다.
헌종(宗)이 대감선사(大鑑禪師)라 시호하고, 탑은 원화영조(元和靈照)라 하였다.
송나라 개보(開寶) 때에 왕사(王師)가 남해를 평정할 때에 유(劉)씨의 패잔병(兵)이 작란하여 대사의 탑과 절이 쓰러지고 불탔으나 대사의 유해는 탑을 지키는 스님들에 의해 하나도 손상함이 없었다.
이어 다시 짓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공사가 끝나기 전에 대종(大宗)이 즉위하여 선문(禪門)에 마음을 기우려서 훨씬 더 장엄스럽게 꾸몄다.
대사가 당의 선천(先天) 2년 계축에 입멸하신 이래 지금의 경덕(景德) 원년 갑진에 이르기까지는 무릇 292 년이요, 법을 받은 이는 인종법사 등 33인이 한 지방에서 교화하여 정통으로 알려졌고 그 밖에도 이름과 자취를 감춘 이는 헬 수 없는데 이제 제방의 전기에는 간략히 열 사람만을 기록하고 곁가지라 한다.
출전: 불교통신대학 “경덕전등록”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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