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찬(僧璨)
그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 처음에 속인의 몸으로 2조를 만났다. 중이 된 뒤에 법을 전해 받고는 舒州(서주)의 완공산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후주(後周)의 武帝(무제)의 破佛(파불) 사태를 만났을 때에 대사는 태호현(太湖縣)」의 사공산(司空山)에 왕래하면서 일정한 장소가 없이 10년을 지났다.
隋(수)의 개황(開皇) 12년 임자에 이르러 道信(도신)이라는 사미가 나이 열 네살의 몸으로 와서 대사에게 절하면서 말했다.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하는 법문을 일러주소서」
「누가 너를 속박했더냐?」「아무도 결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이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9년을 힘껏 모셨다. 뒤에 길주에서 계를 받고 시봉을 계속했는데 대사는 자주 현묘한 법으로써 그를 시험해 보다가 인연이 익었음을 알자 곧 옷과 법을 전해 주었다
華種雖因地(화종수인지)
從地種華生(종지종화생)
若無人下種(약무인하종)
華地畵無生(화지화무생)
꽃과 종자는 땅에서 나고
땅으로부터 종자와 꽃이 나지만
만일 종자를 뿌리는 사람이 없으면
꽃도 땅도 나지 않게 된다.
「옛날 慧可(혜가)대사가 나에게 법을 전하신 뒤엔 바로 鄴都(업도)로 가서 30년 동안 교화하다가 입적하셨는데 나는 이제 그대를 만나 법을 전했거늘 어찌 여기에 묵고 있으랴.」하고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2년 동안 노닐다가 다시 옛터로 돌아와서 한 달이 지나니, 백성들이 모여와서 크게 공양을 베풀었다.
대사는 대중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널리 연설한 뒤에 법회 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하고 임종하니, 때는 곧 수나라 煬帝(양제) 대왕 2년 丙寅(병인) 10월 15일이었다. 당의 현종(玄宗)이 감지선사(鑑智禪師)라 시호하고, 탑호를 각조(覺照)라 하였다.
처음에 하남(河南)의 원 이상(李常)이 본래 조사의 가풍을 흠앙하여 현묘한 이치를 깊이 깨달았었는데 天寶 4년 乙酉(을유)에 하택신회(荷澤神會)를 만나 3조의 묘소가 나부산에 있는 것을 듣고 산곡사 스님들과 함께 간서 묘소를 참배하고 광중의 시체를 화장하여 사리 3백개를 얻었다. 그중 백개는 하택에게 주고 백 알은 탑을 세우고, 백개는 자기 집에 모시고 봉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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