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頭山 龍壽寺 普賢菩薩記文
이 記文(기문)은 龍壽寺(용수사)에서 普賢菩薩(보현보살)을 모실 때 靑南(청남) 權寧漢(권영한)이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한지에 붓으로 글을 써서 부처님 품속에 伏藏(복장)한 내용임.
이 記文(기문)의 양식은 매우 소중한 자료이므로 앞으로 새로 부처님을 모시려는 경우 참고로 하기 바란다.
龍頭山 龍壽寺 普賢菩薩記文
龍壽寺 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高麗時代에 誠源大師가 창건한 古刹로서 創建當時의 寺勢는 매우 繁昌하였으며 安東地方의 中心寺刹이 었다.
그 當時의 寺勢를 나타내는 記錄에는 創建當時의 事情을 잘 알수 있는 다음과 같은 內容의 글이 적혀 있었다.
龍壽寺는 安東縣 北方 二十二里 龍頭山에 있으며, 高麗時代에 誠源大師에 依하여 創建되었다.
高麗 毅宗이 釋胤和尙에게 龍壽寺로 賜額하고 崔詵에게 碑文을 쓰게하여 절 안에 碑石을 세우게 했다.
이 절은 巨大한 寺刹이었기 때문에 首僧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맞게하여 三寶를 住持케 하였다.
法堂의 名稱은 圓通寶殿이며 東便은 別室이며 東便에는 地藏殿이 있고 西便에는 祖堂이, 左便에는 禪堂이 右便에는 內僧堂이 있다.
前方에는 樓閣이 있으니 鐘樓요, 西便의 樓閣은 水月樓이며 또한 層階房이 있으니 圓通藏師와 客室이다.
東便의 樓閣은 三寶房이다.
法堂 뒤에 두 殿閣은 極樂殿과 羅漢殿으로 各處에 크고 작은 幀畵들이 걸려 있다.
龍壽寺를 創建하게된 動機는 늘 外侵이 잦은 것을 念慮한 毅宗이, 外侵을 能히 물리칠수 있는 훌륭한 人材가 많이 나기를 祈願하는 뜻으로 風水地理學에 밝은 사람을 시켜 名山을 찾아 절을 짓게 하였는데, 그 절이 바로 이 龍頭山 龍壽寺었다.
地理學上으로 龍頭山은 安東의 主山이고, 龍頭山 중턱에 龍壽寺를 지으면 地氣가 衝天하고 陰陽이 和合하여 틀림 없이 國家가 必要로 하는 훌륭한 人材가 많이 나게되리라한다.
그래서 그런지 龍壽寺를 지은 以後 安東에는 많은 人材가 났고 李朝 500年을 通하여 閔妃를 비롯, 여러분의 王妃가 安東에서 났다.
王妃로 揀擇되려면 蛾眉山峰이 보여야 하는데, 龍壽寺에서는 蛾眉峰의 두 봉우리가 바로 마주보인다.
그런데 李朝 때 排佛政策으로 寺刹이 頹落되자 李退溪가 龍壽寺祉에 書院을 開設하여 龍壽寺는 弊寺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後 625 事變이 일어나자 書院으로 변한 龍壽寺祉마저 完全히 燒失되고, 龍壽寺는 痕迹조차 없어졌다.
龍壽寺가 弊寺가 되자 安東에는 人材도 옛 처럼 많이 나지 않게 되었다.
이 事實을 안 願行大師는 龍壽寺 옛 터에, 새로 龍壽寺를 復元하기로 願을 세웠다.
鳳巖寺 住持의 所任을 맡아 어려운 가운데도 鳳巖寺 大佛事를 完遂한 願行大師는 또다시 龍壽寺 復元佛事를 始作하여 佛紀 2536年, 寺地 약 2萬坪을 買入하고, 佛紀 2538年에 堂宇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 세운 堂宇는 大雄殿 44坪, 療舍 2棟 各各 98坪을 세우고, 佛紀 2540年 法堂에 普賢菩薩를 奉安하게 되었다.
앞으로 未備한 堂宇를 增築하여 龍壽寺의 옛 모습이 完全히 復元되기를 願하며 이 記錄를 남긴다.
佛紀 2540年 九月 二九日(陰曆)
十一月 九 日(陽曆)
山中帙
證明: 西庵, 月下, 淸霞
禪德: 香果, 信行
首座: 願行
閑住: 法光
持殿: 黙助 妙法
侍者: 何有, 閑守, 梵友, 浪林, 龍聲, 龍珠
佛母: 靑苑, 覺苑
金魚: 林石煥
供司: 李起粉, 蓮池華, 普賢心, 大乘心, 朱敏勅
采供: 黃孝女
負木: 鄭基鳳
都木手: 金範植
都片手: 金應漢, 白永睦
石工: 卓熙烈
瓦工: 金殷東
書記: 權寧漢
事務: 金振燮, 申鉉煜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