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月篇(추월편) 蘇東坡(소동파)
蘇軾(소식)이 杭州(항주) 通判(통판)으로 저정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은 文同(문동)은 소식에게 시를 보냈다.
「北客(북객) 만일 오거든 사실을 밝히려 하지 말게
西湖(서호) 좋다 해도 시를 짓지 말게.」
직언을 해서 또 화를 입을까 염려하는 친구의 마음은 매우 고마우나, 한 편 눈앞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을 보니,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회의 모순을 시로 읊고, 시로 풍자하고, 또 그 시가 採詩官(채시관)에 의해 천자 귀에 들어가, 정치가 잘 되고 인민의 고통이 덜어 진다. 그리고 그 발언자는 아무 죄도 묻지 않을 분만 아니라 천자의 정치를 도운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전통 시인의 임무이고 또한 포부였다. 그래야만 비로소 詩人(시인)이라고 자부 할 수 있는 것이다. 蘇軾(소식)에게는 이러한 신념이 있었다.
蘇軾(소식)은 杭州(항주) 지사 임기만료를 앞두고 密州(밀주)로 가기를 청했다. 그 부근 濟南(제남)에 동생 蘇轍(소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杭州(항주)를 떠나기 전에 먼저 朝雲(조운)을 제2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錢塘(전당) 사람이며 성은 역시 王(왕)씨이고 그때 나이 12세였다. 繼室(계실) 王(왕)씨의 사후 東坡(동파)의 재앙을 함께하며 멀리 嶺南(영남) 까지 데리고 가서 惠州(혜주)에 뼈를 묻은 사람이다.
密州(밀주)에 부임한 것은 11월, 그 12월에 “雪後北台壁書(설후북태벽서)”의 시를 지었다. 密州에서는 대 한발과 메뚜기의 습격, 거기에다 도적의 정벌 등 지사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熙寧(희녕) 9년 河中府(하중부)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고 우선 수도로 올라갔다. 그러나 칙명으로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무엇인가 위험한 낌새가 보였다.
명령은 다시 내려 徐州(서주) 知事(지사)로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春秋時代(춘추시대)의 彭城(팽성)으로 성은 좁고 작은 도시였으나 군사상, 교통상 중요한 도시었다. 徐州(서주)에 당도한 것은 4월 21일.
동생 蘇轍(소철)은 서기를 그만두고 형보다 먼저 수도에 왔다가, 형을 따라 徐州(서주)로 가서 100여일 놀다가 南京(남경) 留守(유수) 簽判(첨판)으로서 南都(남도)로 떠났다.
다음 해 徐州(서주) 성 동문에 황토로 누각을 만들어 黃樓(황루)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中秋(중추) 밤에는 병이 나서 달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元豊(원풍) 2년 3월, 湖州(호주) 知事(지사)로 가라는 명을 받고 4월 20일 착임하지만, 7월 28일에 御史臺(어사대) 관원들이 포박 하로 와서 신변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 蘇軾(소식)은 죽음을 각오 했다. 동생은 자기의 관직을 삭탈하는 대신 형을 살려달라고 탄원을 해서, 蘇軾(소식)은 겨우 筠州(균주) 鹽酒官(염주관)으로 보내졌다. 蘇軾(소식)이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神宗(신종) 가슴에 자비의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100일간의 취조는 무척 엄해서 20년 전에 지은 시까지 문제 삼아 조사를 했다. 그때 蘇軾(소식)은 한 자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을 해 조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재 시인은 다시 세상에 숨을 붙여 계속 詩作(시작)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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