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鼓篇(석고편) 1059~1068 蘇東坡(소동파)
蘇氏(소씨) 삼부자를 태운 배는 蜀(촉)의 眉山縣(미산현)을 출발해서 60일, 荊州(형주) 즉 湖北省(호북성) 江陵(강릉)에 도착하였다.
지금 전하는 蘇軾(소식)의 시의 초기에 것은 이 뱃속에서 부자 셋이서 화창한 작품들이다. 이 여행중에 시를 모은 南行集(남행집)이 있다고 하아 지금은 저하지 아니하고, 50권의 시집 1권에 수록된 42수의 시가 그때 것이 라고 추정된다.
동생 蘇轍(소철)의 欒城集(란성집)을 보면 형의 시와 같은 제목, 같은 운으로 지은 시가 많이 있어, 그 唱和(창화)의 모양을 짐작할 수가 있다.
蘇軾(소식)의 후년의 작품에 비하면 아직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으나 嘉州(가주) 樂山縣(낙산현)에서 시작되는 이 시에는 사랑스러운 젊은 마음이 담겨 있다.
蘇軾(소식)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수도 開封(개봉)에 갔을 때, 閬州(랑주)에서 長安(장안)으로 가는 蜀(촉)의 棧道(잔도)를 지나갔음으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가는 여행은 그에게 처음이었다.
연안의 풍경도 고적도 모두 청년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三峽(삼협)의 협곡을 지나는 배 안에서 절벽 위로 가는 나그네에게 손을 흔들며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荊州(형주)에 한 달 가량 있을 때 荊州十首(형주십수)의 連作(연작)이 있다. 嘉祐(가우) 5년의 신녕을 荊州(형주)에서 보내고, 정월에 육로로 漢水(한수) 가를 따라 襄陽(양양), 許州(허주)를 거쳐 2월 15일 수도인 開封(개봉)에 도착 했다.
다음 해 동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大理評事(대리평사) 簽書判官(첨서판관)으로서 長安(장안)의 서쪽 鳳翊府(봉익부)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26살이고, 아버지는 勅選(칙선)의 書(서)인 太常因革禮(태상인혁례) 편찬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蘇軾(소식)은 동생과 아버지를 이별하고 홀로 부임하게 되었다.
鳳翊府(봉익부)에 착임한 뒤로도 동생과의 서신은 계속 이어졌다. 官舍(관사) 북쪽 공지에 정자를 세우고 연못을 만들고, 연못 주변에 꽃나무를 심었다.
鳳翊府(봉익부)에 있을 때 명작으로는 石鼓(석고)가 있다. 鳳翊府(봉익부)에 부임한 다음 날, 蘇軾(소식)은 孔子廟(공자묘)에 착임 신고를 하로 갔다. 거기에 鼓(고)의 모양을 한 10개의 돌이 있었다. 그가 師(사)로 추앙하는 歐陽修(구양수)에 集古錄跋尾(집고록발미)라는 저술이 있는데, 이 돌이 발견된 경위와 그 돌에 조각된 古代文(고대문)에 대한 기술도 있고, 梅堯臣(매요신)도 石鼓(석고)를 읊은 七言古詩(칠언고시)를 지었다.
蘇軾(소식)은 250년전 韓愈(한유)가 지은 石鼓(석고) 노래에 대향해서 자기도 雄篇(웅편)을 남기고 싶은 의욕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鳳翊府(봉익부)에서 볼만한 것 8가지를 골라 鳳翊八觀詩(봉익팔관시)를 짓고 그 가운데 石鼓詩(석고시)를 수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鳳翊府(봉익부)의 임기가 끝나고 開封(개봉)으로 돌아간 것이 治平(치평) 2년 정월. 그해 부인인 王(왕)씨가 27살로 죽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治平(치평) 3월에 아버지가 졸하였다. 太常因革禮(태상인혁례) 100권의 편찬은 마쳤으나 아직 天子(천자)에게 바치지 않는 상태였다. 천자는 시신을 蜀(촉)에 보낼 수 있도록 배려 했다. 蘇軾(소식)의 시도 상중인 이때를 기해 3년간 시를 짓지 않고 휴식기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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