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鼓(석고) 蘇東坡(소동파)
冬十二月歲辛丑(동십이월세신축) 我初從政見魯叟(아초종정견노수)
舊聞石鼓今見之(구문석고금견지) 文字鬱律蛟蛇走(문자울률교사주)
細觀初以指畫肚(세관초이지화두) 欲讀嗟如箝在口(욕독차여겸재구)
韓公好古生已遲(한공호고생이지) 我今況又百年後(아금황우백년후)
强尋偏旁推點畫(강심편방추점화) 時得一二遺八九(시득일이유팔구)
我車旣攻馬亦同(아거기공마역동) 其魚維鱮貫之柳(기어유서관지류)
古器縱橫猶識鼎(고기종횡유식정) 衆星錯落僅名斗(중성착낙근명두)
模糊半已隱瘢胝(모호반이은반지) 詰曲猶能辯跟肘(힐곡유능변근주)
娟娟缺月隱雲霧(연연결월은운무) 濯濯嘉禾秀稂莠(탁탁가화수랑유)
漂流百戰偶然存(표류백전우연존) 獨立千載誰與友(독립천재수여우)
上追軒頡相唯諾(상추헌힐상유낙) 下挹冰斯同鷇殼(하읍빙사동구각)
憶昔周宣歌鴻雁(억석주선가홍안) 當時籒史變蝌蚪(당시주사변과두)
厭亂人方思聖賢(염난인방사성현) 中興天爲生耆耈(중흥천위생기구)
東征徐虜闞虓虎(동정서노감효호) 北伐犬戎隨指嗾(배벌견융수지주)
象胥雜沓貢狼鹿(상서잡답공낭녹) 方召聯翩賜圭卣(방소련편사규유)
遂因鼓鼙思將帥(수인고비사장수) 豈爲考擊煩矇瞍(개위고격번몽수)
何人作頌比嵩高(하인작송비숭고) 萬古斯文齊岣嶁(만고사문제구루)
勳勞至大不矜伐(훈노지대부긍벌) 文武未遣猶忠厚(문무미견유충후)
欲尋年歲無甲乙(욕심년세무갑을) 豈有名字記誰某(개유명자기수모)
自從周衰更七國(자종주쇠갱칠국) 竟使秦人有九有(경사진인유구유)
掃除詩書誦法律(소제시서송법률) 投棄俎豆陳鞭杻(투기조두진편뉴)
當年何人佐祖龍(당년하인좌조룡) 上蔡公子牽黃狗(상채공자견황구)
登山刻石頌功烈(등산각석송공렬) 後者無繼前無偶(후자무계전무우)
皆云皇帝巡四國(개운황제순사국) 烹滅强暴救黔首(팽멸강포구검수)
六經旣已委灰塵(륙경기이위회진) 此鼓亦當遭擊掊(차고역당조격부)
傳聞九鼎淪泗上(전문구정륜사상) 欲使萬夫沈水取(욕사만부침수취)
暴君縱欲窮人力(포군종욕궁인력) 神物義不汙秦垢(신물의부오진구)
是時石鼓何處避(시시석고하처피) 無乃天工令鬼守(무내천공령귀수)
興亡百變物自閒(흥망백변물자한) 富貴一朝名不朽(부귀일조명부후)
細思物理坐嘆息(세사물리좌탄식) 人生安得如汝壽(인생안득여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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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鼓(석고)
辛丑(신축) 12월 겨울
나 처음으로 임관되어 공자묘를 참배하다가
옛날부터 듣던 石鼓(석고) 지금 처음 보았는데
구불구불한 문자는 뱀이 기어간 것 같다.
자세히 보며 먼저 손가락으로 배에 그려보고
읽어도 보려하는데 입에 재갈이 물린 듯 말이 안 나오네
옛것을 좋아하던 韓公(한공)도 세상에 태어나기 늦었는데(그때도 이미 마모되어)
지금 내가 항차 백년 뒤에 태어나니 더욱 읽기 어렵다.
굳이 변과 방을 분석하고 점과 획을 관찰하여
한 두 글자는 읽어도 여덟아홉 글자는 못 읽고 남기니
읽어낸 글자는 我車旣攻馬亦同(내 차 이미 공격하고 말 역시 같다)과
其魚維鱮貫之柳(그 고기는 연어 버들가지로 꿰자)라는 몇 자.
이는 예를 들면, 고대 집기는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鼎(정)만 알 수 있는 것 같고
많은 별들이 석여있는 하늘에서 다만 北斗(북두)의 이름만 아는 것과 같이 극히 일부.
이들 문자는 모호해서 반은 이미 흠집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구불구불한 문자의 팔과 팔꿈치는 분별이 되네.
구름에 숨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이지러진 달이라 할까
잡초 속에 묻혀서도 잘 익은 벼와 같은 것이라고 할까.
여러 번의 전란에도 흘어와 오늘까지 우연히 남아 있으니
천년을 홀로 서서 누구와 벗하려는가.
위로는 軒轅(헌원)씨 軒詰(헌힐)씨와 서로 상대하고
아래로는 李陽冰(이양빙)과 李斯(이사)와 함께 형제 하려는가.
생각건대 주의 宣王(선왕) 찬미하여 백성들이 鴻雁(홍안) 시를 읊을 때
당시의 史官(사관) 籒(주)는 蝌蚪(과두) 문자를 변형하고
사람들은 난세를 싫어하고 성현 나타나기 바랐는데
하늘은 周(주)의 중흥을 보고 史籒(사주)를 내리셨네.
동으로는 徐(서) 지방을 정벌하고 범같이 호령하며
북으로는 伐犬(벌견)를 굴복시켜 개를 길 드리듯 길 드렸고
속국의 사신 관장하는 象胥(상서)에는 공물로 바치는 이리와 사슴으로 붐비었는데
方叔(방숙)과 召虎(소호)도 옥으로 된 선물 이어서 갖고 왔네.
그래서 宣王(선왕)은 石鼓(석고)를 만들어 장수의 노고를 생각하려 했으며
이를 처서 음악을 연주해 악관을 괴롭히는 일 생각지도 않았네.
嵩高(숭고)의 시와 비교되는 시를 지어 선왕을 찬미한자 누구일가.
이 글은 만세를 전해오는 岣嶁山(구루산)에 비와 같이 전해 왔네.
공적은 지극히 큰데도 자랑스럽게 노래하지 않았는데
문왕 무왕의 시대 아직 멀리 지난 것이 아니 여서 겸손의 덕 탓이리.
제작 연대를 알려 해도 干支(간지)가 없고
누구의 작이라고 이름자도 없다.
周(주)가 망하고도 다시 七國(칠국)을 거쳐
드디어 秦(진)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니
詩書(시서) 책을 말살하고 法律(법률) 책만 공부시켜
제기를 버리고 채찍과 형틀만 늘어놓았다.
그때 秦始皇(진시황)을 보좌한 자는 누구였던가.
형장에서 다시 黃犬(황견) 몰고 사냥가고 싶다한 上蔡(상채) 공자 李斯(이사)였네
그는 산에 올라 始皇(시황)의 공덕 돌에 새겨 칭송하고
始皇(시황) 같이 위대한 자 전에도 후에도 없다고 하며
비문에 「모두 말하기를 황제는 사방을 순방하여
강하고 포악한 자 죽이고 백성을 구했다」라고 썼다.
六經(육경)은 이미 불타 재가 되었고
이 石鼓(석고) 역시 부셔질 운명을 당했을 것인데
듣건대 九鼎(구정)이 泗水(사수)에 빠졌다고 들은 始皇(시황)은
만 명의 인부를 물속에 넣어 찾으려 했다하네.
폭군이 욕심을 부려 人力(인력)을 다 해도
神鼎(신정)은 의롭지 않는 秦(진)에게 더렵혀지지 않았으며
이때 石鼓(석고)는 어디에 피했던가.
이를 하늘의 신이 귀신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지 않을까
흥망은 백번이나 변해도 石鼓(석고)는 스스로 한가하고
부귀는 하로 아침에 살아져도 이름은 만세에 썩지 않으니
지금 자세히 사물을 도리를 생각해보니 탄식이 절로 나는데
인생은 어찌하여 너 石鼓(석고)의 수명같이 영원하지 못한가.
【註】
石鼓(석고) 북 모양을 한 10개의 돌로 大篆(대전)으로 쓴 銘文(명문)이 있다. 歐陽修(구양 수)의 集古錄(집고록)에 의하면 唐(당) 이전에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唐(당)에 이르러 관심을 갖게 되었다. 韋應物(위응물)이 시를 지어 「周(주) 文王(문왕)의 북이며 宣王(선왕) 때 시를 적은 것이다.」하니, 韓愈(한유)는 「宣王(선왕)의 鼓 (고)」라 하였다. 돌을 그때까지도 들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鄭餘慶(정여경)이 鳳翔 縣(봉상현) 孔子廟(공자묘)에 수납했다. 그때 한 개 없었으나 宋(송)의 皇祐(황 우) 4년 向傳師(향전사)가 민간에서 발견하고 10개를 모두 갖추었다. 해독 가능 한 문자는 465자이고 마멸된 글자가 과반수가 넘는데, 嘉祐(가우) 8년 6월에 썼 다. 集古集(집고집)에 기록한 歐陽修(구양수)도 宣王(선왕)의 共和(공화) 6년에서 그때 嘉祐(가우) 8년까지, 실로 1904년간 이렇게 가늘고 얕게 판 글자가 남아날 수가 있을까, 몇 가지 의문을 들고 있으나, 宋(송)의 鄭樵(정초)는 秦(진) 때 제 작된 것이라는 설을 내 놓아 학자들의 논의는 그치지 않는다. 문자는 그 뒤 더욱 영락되었으나 淸(청)의 范氏(범씨) 天一閣(천일각)에 北宋(북송)의 拓本(탁본)이 소장되어 있어 阮元(원원)은 杭州(항주) 府學(부학)에서 重刻(중각)하여 金石萃編 (금석췌편)에 소록했다. 지금은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蘇軾(소식)의 이 시는 韓愈(한유)의 石鼓歌(석고가)와 함께 古文眞寶(고문진보)에 등제되어 있다.
魯叟(노수) 孔子(공자)
鬱律(울률) 굽고 뒤틀린 모양.
蛟蛇走(교사주) 교룡이 달리다.
畫肚(화두) 唐(당)의 虞世南(우세남)은 항상 옷 속에 손을 넣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배에 썼다 고 한다.
箝(겸) 대나무로 만든 재갈.
古器(고기) 고대의 靑銅器(청동기). 殷(은), 周(주)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錯落(착낙) 흐트러져 뒤석인다.
斗(두) 北斗(북두)
模糊(모호) 멍청하게.
瘢胝(반지) 손발이 트는 것.
詰曲(힐곡) 굽도 비틀어진 것. 고대 문자가 읽기 어렵다는 것.
濯濯(탁탁) 사에 초목이 자라지 않는 모양.
稂莠(랑유) 조와 흡사한 잡초. 열매를 수확 할수 없다.
軒頡(헌힐) 黃帝(황제) 軒轅(헌원)씨와 蒼頡(창힐). 태고에 문자를 고안해서, 그때 까지 사용 하던 結繩(결승)에 대신한 것은 庖犧氏(포희씨)가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역 繫辭傳(계사전)에서는 黃帝(황제)와 堯舜(요순)이 한 일인 九事(구사) 가운데 한 가지라 한다. 蒼詰(창힐)은 黃帝(황제)의 史官(사관)으로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 를 만들었다고 後漢(후한)의 許愼(허신)이 쓴 說文解字(설문해자) 서에 적혀 있
다.
冰斯(빙사) 唐(당)의 李陽冰(이양빙)과 秦(진)의 李斯(이사). 李陽冰(이양빙)은 小篆(소전) 의 명수. 李斯(이사)는 秦始皇(진시황)의 재상으로 小篆(소전)의 발명자. 泰山刻 石(태산각석) 등 그가 쓴 것을 지금도 탁본으로 볼 수가 있다.
鷇殼(구각) 모이를 주고 젖을 주는 것.
周宣(주선) 周(주)의 宣王(선왕). 武王(무왕)에서 10대인 厲王(여왕)의 失政(실정)을 이어받 아 명정승 尹吉甫(윤길보)를 얻어 周室(주실)를 중흥시킨 英主(영주)
籒史(주사) 宣王(선왕)의 太史(태사) 史籒(사주). 大篆(대전)을 만든 사람.
蝌蚪(과두) 올챙이. 籒文(주문)이전의 서체. 周代(주대)의 고문. 옻으로 대나무에 쓴 글자가 올챙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魯(노)의 共王(공왕)이 孔子(공자)의 생가를 허물 어 그 벽에서 나온 고문의 경전이 모두 蝌蚪(과두) 문자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耆耈(기구) 60세의 노인.
徐虜(서노) 徐州(서주) 부근에 나라를 세운 이민족.
闞虓虎(감효호) 범이 크게 울부짖는 모양.
犬戎(견융) 북방의 유목민족. 이들이 처들어 온 것을 宣王(선왕)이 물리 쳤다.
指嗾(지주) 개를 부리는 소리.
象胥(상서) 來朝(내조)한 이민족을 맞아 통역을 하는 사람.
貢狼鹿(공낭녹) 周(주)의 穆王(목왕) 때, 犬戎(견융)을 정벌하고 4필의 白狼(백랑)과 4필의 白鹿 (백록)을 갖고 개선한 한 것.
方召(방소) 宣王(선왕) 때 동방 淮夷(회이)를 정벌한 召虎(소호)와 두 사람의 신하의 이름.
聯翩(련편) 계속 이어지고 그치는 않는 상태.
圭卣(규유) 옥으로 만든 禮器(예기). 술을 담는데 쓰임.
考擊(고격) 종이나 북을 치는 것.
矇瞍(몽수) 보지 못하는 소경.
頌(송) 王業(왕업)을 칭송하며 宗廟(종묘)에 고하는 노래.
嵩高(숭고) 宣王(선왕)을 칭송한 시.
岣嶁(구루) 산의 이름. 湖南省(호남성) 남부 衡陽市(형양시) 북. 산상에 夏(하)의 禹王(우왕) 의 治水(치수)의 공을 칭송한 비가 있다.
自從(자종) .....에서
七國(칠국) 戰國(전국)의 七雄(칠웅). 秦(진), 楚(초), 韓(한), 趙(조), 魏(위), 燕(연), 齊 (제).
九有(구유) 천하. 九州(구주).
詩書(시서) 詩經(시경)과 書經(서경)
俎豆(조두) 제물을 제기에 담아 바친다는 뜻에서, 先王(선왕)의 禮樂(예악)을 말 한다.
鞭杻(편뉴) 채찍
祖龍(조룡) 秦始皇(진시황)
上蔡公子(상채공자) 李斯(이사).
牽黃狗(견황구) 李斯(이사)는 咸陽(함양) 시에서 腰斬(요참)의 형을 당할 때 차남을 보고 「나 그 대와 함께 黃犬(황견)을 몰록 함께 上蔡(상채)의 동문을 나가 교활한 토끼를 잡으 려한다.」라고 했다.
登山刻石(등산각석) 秦始皇(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사방의 명산에 송덕비를 세웠다. 그 글씨 는 李斯(이사)가 손수 썼다고 한다.
黔首(검수) 始皇(시황) 26년 백성을 黔首(검수)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六經(륙경) 詩經(시경), 書經(서경), 禮記(예기), 禮樂(예악), 周易(주역), 春秋(춘추).
暴君(포군) 始皇(시황) 28년, 해상 三神山(삼신산)을 찾다가 귀향 중 彭城(팽성)을 지나 천 명의 인부를 물속에 잠수싴켜 周(주)의 鼎(정)을 泗水(사수)에서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하는 횡포.
安得(안득) 도저히 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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