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海篇(남해편) 蘇東坡(소동파)
宣仁太皇(선인태황)의 서거한 뒤 18세의 哲宗(철종)이 親政(친정)하여, 章惇(장돈)등이 임용되고, 연호도 紹聖(소성)이라고 고쳤다. 章惇(장돈은 정국을 담당하자 우선 募兵法(모병법)을 부활하고, 新法(신법)을 하나 하나 부활 해나갔다. 그러나 王安石(왕안석) 같이 新法(신법)을 연구발전 시키는 열정은 없었고, 오직 舊法黨(구법당) 관료들 추방에만 부심하여, 이미 세상을 떠난 司馬光(사마광)등의 관직까지 追奪(추탈)하였다.
그리하여 東坡(동파)도 윤 4월, 龍圖閣(용도각) 학사와 翰林學士(한림학사)의 직을 삭탈당하고 英州(영주) 지사로 좌천하는 명령이 내렸다. 동생도 3얼에 역시 좌천되어 汝州(여주) 지사가 되어있었다.
東坡(동파)는 汝州(여주)로 가서 동생을 만나고, 金陵(금릉)을 거쳐 當塗縣(당도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惠州(혜주) 司馬(사마)로 유배된다는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가족을 常州(상주)로 보내고 삼남인 過(과)와 朝雲(조운)만을 대리고 嶺表(영표), 득 五嶺(오령)을 지나 廣東省(광동성)으로 길을 떠났다. 江西省(강서성)에 들어가 鄱陽湖(파양호)로 들어가는 강을 거슬러 惶恐灘(황공탄) 까지 갔다.
大庾嶺(대유령)이 눈앞에 가로놓인 것을 바라보며, 梅嶺(매령)을 지나 淸遠縣(청원현)까지 가니 廣州(광주)는 멀리않고 風物(풍물)은 일변했다. 광주에서 羅浮山(나부산) 기슭을 지나 10월 2일 惠州(혜주)에 도착하였다. 定州(정주)를 떠나 실로 반 년 만에 여행이었다.
惠州(혜주)에 와서 3년 紹聖(소성) 3년(1096) 7월에 멀리 혜주까지 말없이 조용히 따라온 朝雲(조운)을 잃엇다.
紹聖(소성) 4년(1097) 2월, 白鶴峰(백학봉)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이전에는 嘉祐寺(가우사)와 合江樓(합강루)를 서로 왕래하며 살아왔다. 그 새집에 윤2월 廣東省(광동성) 韶州(소주) 仁化(인화) 縣令(현령)이던 장남이 손자를 대리고 왔다. 汝州(여주) 지사로 좌천되어 있던 동생 轍(철)도 雷州(뇌주)로 유배되기로 되어, 그도 廣州(광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東坡(동파)에게는 4월 17일, 瓊州(경주) 別駕(별가)로 昌化軍安置(창화군안치)로 한다는 명이 내렸다. 瓊州(경주)라는 곳은 海南島(해남도) 北岸(북안)인데, 실제로 유배되는 곳은 경주에서 北岸(북안)으로 150㎞인 지금의 儋縣(담현)이었다. 新法黨(신법당)이 舊法黨(구법당)에게 가하는 처절한 보복이었다.
紹聖(소성) 4년(1097) 7월 2일, 해남군 儋縣(담현) 配所(배소)에 도착하였다. 관사를 정리하고 東坡(동파)를 맞이한 昌化(창화) 軍使(군사)인 張中(장중)은 가엽게도 얼마 뒤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관사에서 쫓겨난 東坡(동파)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아주 조잡한 집이 완성되었다.
섬 주민들은 고구마나 잡곡을 먹고 살면 거의 만족할 만한 논은 없었다. 폭풍이 불어 본토에서 배가 오지 않으면 쌀값은 진주를 사는 것 같이 비싸게 뛰었다. 동파는 여기서도 스스로 경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먹고 굶고 하는 생활 속에서도 시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해남도에 와서 3년(1100) 5월 廣西省(광서성)에 안치한다는 명을 받았다. 이 해 정월 9일, 哲宗(철종)이 죽고 徽宗(휘종)이 즉위하고, 섭정을 하는 向(향) 태후가 新舊派(신구파)의 싸움을 방치 할 수 없다고 舊黨派(구당파) 관료도 조정에 불러 양자 서로 中庸(중용)의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침을 내 놓았다.
11월에 朝奉郞(조봉랑)에 복귀하고 주거는 원하는 대로 아무데나 살아도 좋다는 명이 내렸다. 명의상의 한직이고, 은급을 받아 노후생활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建中(건중) 靖國(정국) 원년(1101) 1월, 동파는 大庾嶺(대유령)을 넘어 다시 虔州(건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潤州(윤주)에서 毘陵(비능)에 돌아와 表(표)를 바치고 致仕(치사)하다가 7월 28일 병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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