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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안동의 사찰 龍壽寺(용수사)

청남이메일

안동의 사찰 龍壽寺(용수사)

 



1. 위치: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60번지.
   (054) 856- 3089


천년 고찰을 복원한 왕의 원찰 용수사.

도산면은 안동에서 북동쪽으로 약 27km 떨어진 곳으로 원래 예안군에 딸린 의인현의 동쪽이 되므로 의동면(宜東面)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통합에 따라 도산면이 되었다.
청량산을 감아 내려오는 낙동강이 면의 중심을 관류하여 안동호로 흘러들며. 서쪽으로는 영지산(靈之山)이 솟아 있고 그 한 줄기가 동으로 뻗어 陶山(도산)이 되었다.



        도산온천으로 가는 안내판
        이 안내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접어들면 용수에 가는 길과 같이 통한다.


용수사는 도산면사무소가 있는 온혜에서 도산 온천 쪽으로 약 4 떨어진 운곡리의 뒷산 자락에 龍頭山(용두산)과 國望峯(국망봉) 사이에 이룩된 도곡, 구래실, 갈골, 서암, 황정 등의 마을로 이루어진 동리다.

이 가운데 갈골마을은 칡이 엉켜 우거진 골짜기를 이루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웃마을인 구래실과 샘골(서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마을의 북쪽이 용수사가 있는 절골이다.



        용수사 안내 석물
        안동에서 오면 길 왼편에 있는 안내 석물은 높이 2m 정동의 크기지만 뒷배경 때문에 주의해야 볼 수 있다.


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여남이며 그곳에 靈隱庵(영은암)이 있었고 조금 더 위에는 白雲庵(백운암)이 있었다고 한다.




        용수사 가는 길가에 연자매와 휴식처
        도산온천 가기 직전에 있는 숲과 돌 연자매 옆에는 의자와 좁지 않는 공간이 있어 잠시 쉬어 가기에도 편리하다.





       온천 앞 안내판.
       도산온천 앞에도 용수사로 가라는 안내판이 전주에 걸려 있다. 처음 찾아오는 손님의 혼돈을 막기 위한 스님의 따듯한 마음의
       배려로 본다.


2. 유래와 전설
고려 명종 11년(1181년)에 崔詵(최선)이 찬(撰)한 용두산 용수사 개창기에 따르면 용수사 개창 이전에 이곳에는 이미 古刹(고찰)이 있었으나 수차례의 산불로 인해 옛터만 남아 있었다.

奉化(봉화) 覺華寺(각화사)의 주지인 誠源(성원)이 의종 원년(1146년)에 옛터의 수백 보 남쪽에 암자 몇 칸을 지은 뒤 입적하자 그의 문인인 處彛(처이)가 수년 동안 수십 칸으로 증축해 비로소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력이 부족하여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승 釋胤(석윤)에게 청탁했고, 석윤은 의종 18년에 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소견을 개진하였다.



          일주문.(여름)
          용수사 일주문은 1,000년 고찰의 면모 답게 듬직하고 무게가 있다.




        일주문 (겨울)
       일주문을 경계로 속계와 부처님의 세상 경계로 갈라진다. 원래를 일문을 들어 설 때 차에서 내려, 본당 쪽을 향해 함장 재배하고 들어
       서는 것이 기본예절이다.



        일주문 현판




일주문 주련

                           


         國王之願刹(국왕지원찰)
        儒學之本鄕(유학지본향)
           <해>
        국왕의 원찰이요
        유학의 본고장.


이에 국왕은 예종이 膺公(응공)이란 고승을 위해 각화사를 창건하여 화엄교리를 폈듯이 자신도 각화사에 못지않은 사찰을 지어 화엄교리를 펴고자 했다.

그래서 釋胤(석윤)은 용두산의 암자를 추천했고 의종은 日官(일관)인 榮緯(영위)를 보내어 터를 살펴보고 龍壽寺(용수사)라 사액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증축을 돕게 하였다.

다음 해인 1165년에는 본당(本堂)과 요사, 강사(講舍) 및 창고, 부엌 등 90여 칸을 완공하고 100여 보의 담장을 둘렀다.

명종 3년에 용수사의 실질적인 창건주지인 釋胤(석윤)이 입적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제자인 雲美(운미)가 주지가 되었으며 뒤를 이어 廓心(곽심)이 주지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용수사의 창건 이후 3대 주지이며 그의 대에서 용수사가 완성되었다.

그는 釋胤(석윤)에게 수업한 사람인데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經律論(경률논) 등 대장경을 갖추고 13층의 靑石塔(청석탑)을 세웠다.

불사가 완료되자 명종 8년에 이르러 국왕이 차(茶)와 향(香). 그리고 찬미하는 글을 보내서 700여 대중을 모으고 화엄법회와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후에도 용수사에 대한 국왕의 지원이 지속되었는데 당시에 의종의 胎藏所(태장소)였던 嚮福寺(향복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명종은 향복사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토지를 용수사로 이적하고 의종의 薦福(천복)과 忌日齋(기일재)를 올리는 願刹(원찰)로 삼았다.




           영수사에 들어 오는 길목에 있는 하바비.
           옛날에는 어떤 사람도 이 하마비가 있는 곳에 으르면, 말에서 내려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서 절에 들어 갔다.

        

이상이 龍壽寺(용수사) 창건과 관련된 용수사 개창비문에 드러난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용수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의 불교유적이 그렇듯 소상한 기록이 없고 단지 조선중기의 고승이었던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에 실린 「용두산 용수사 극락전기(極樂殿記)」를 통해 당시 용수사에 있었던 극락전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

극락전은 3칸의 황금전각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 한구를 봉안하였는데 선조 11년(1578)에 공사를 하여 1580년 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용수사는 조선중기 이 후에는 聾巖(농암) 선생이나 退溪(퇴계) 선생 집안의 학문탐구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高宗代(고종대)에 이르러서는 수만금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중흥을 꾀했으나 고종 1년(1896) 乙未義兵(을미의병) 전쟁의 와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인 영은암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용수사는 축대와 초석만남은 채 근 백 여년 동안 폐사지로 내려오던 것을 願行(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願行(원행)과 불자들은 나라의 평안과 국운의 융성을 위해 불사를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1992년 이곳의 부지 2만여 평을 매입하고 1994년에 법당과 요사 2동을 건립하였다.



           용수사에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넓어 차량의 통행이 너무나 자유롭고 편안하다. 길가에 걸어서 가는 신도가 있을 때,
           극히 조심 하며 서행하는 것은 기본예절이다.


그리고 1995년에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넘의 점안식을 거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대웅전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점안식을 거행하였다.

현재 용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인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초대주지인 願行(원행)의 뒤를 이어 梵友(범우)가 주지를 이었으며 현재는 祥雲(상운)이 주지로 있으며 寺勢(사세)를 더욱 확창시키며 願行(원행)이 못다한 나머지 많은 불사와 문제들을 잘 이루고 있다.




          사찰로 가는 길가에 용수사에서 기도하던 한 처사의 힘으로 많은 돌탑이 쌓여져 있다.



龍壽寺開刱記(용수사개창기)는 다음과 같다.

天下之名山 三韓爲多 三韓之勝地 東南爲㝡 東南之巨者 太伯稱爲首焉 孕靈富媼作鎭綿世 何巫盧衡작霍之足陳耶 自太伯而南起 伏三百餘里 突如而 委出者 是爲龍頭山 實永嘉郡所負而都者也 夫有非常之境 必有非常之事 山之南有洞 洞之口有藪焉 土人稱爲大王藪 盖我神□□□□之際 略地至於南方 頓兵於此三日而後 乃行從此以南 諸不服者靡然納款 至今其地多喬木衆卉 樵蘇者不敢近 謂有神物護之者 邑之□□□傳云 苦於之作 大伽藍闔境 帖然無劫奪饑饉之患也 先是洞中 有古寺 累遭山燒灰滅 無餘獨遺基隱 然在於草莽中 盖不如年紀矣 越毅廟元年丙寅秋 覺華寺住持比丘 誠源聞 其境勝而 悅之遂占地 於舊基南數百步 始立屋數間 未幾源師沒而 門人處彛繼之 凡寘力於其中 累變星霜 其前後所立唯十餘間而 已彛知力屈 財彈乃諗於高僧胤公以卒



        용수사의 전경.
        잘 가꾸어진 잔디와 넓은 뜰이 있는 용수사.  이 마당 앞에 서는 순간 답답하던 마음이 펑 뚫리는 것만 같다.


先師之業爲請 公乃目擊而 心許之時 公五承其授住 覺華寺至 甲申歲 承命 赴關上從容問公曰 先祖睿王嘗爲膺公□立 覺華俾弘揚華嚴敎理至于 今人受其賜 朕亦爲公立一華嚴精舍無俾覺華 專美於前其如 公意何 公乃以龍頭山之事 應命上心頗喜 卽命 日者榮緯往 省其地緯 承命日弘大法利國家 非此地莫可 於是賜號龍壽寺 申命守土之臣 管其務遂 庀徒鳩材經始 於乙酉歲增 搆佛宇 僧寮齋講偃息之□□至庖廚庫 廐無盧九十餘間繚以周墻一百許步 人無勞□□過煩適于制度不古不今是役也 門人雲美實賁㧾其事焉 又刻木塗金造□□□□□□□□□□□□ 各一覆以龕室列以 幡幢莊嚴之飾吁 其可駭叶器 儲偫罔不備具 又立長生庫 蓄穀一千碩 歲權其以爲油香□□□ 斯皆出於公之□□□及 諸門弟子施長物而 爲之者也




            대웅전 벽에 화엄변상도.
            용수사에는 보물급인 80 화염변상도가 작의 정교한 손으로 그려져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及歲在癸巳 公忽惑疾而 化先期數日 以狀擧雲美於朝以 自代復薦高第□□廓心以主 是寺心亦開士也 自幼受業於公 小問多悟 穎脫而出及 其居是專以弘揚聖敎爲事 又奉先師之遺囑 立經律論藏及十三層靑石塔□座 於是乎 洪願盡矣 能事畢矣 乃以戊戍歲十一月 宣送茶香及 慶讚詞疏集 淸衆七百□設 大華嚴會以落成焉 是今上 龍飛之九載 大金大定十八年也 尋有旨仍屬古寺田柴一十結 又慮其口衆食寡 其於經久之道 不能無□加賜 新寧郡嚮福寺 田四十結 藏獲三十口及 旁近地閑田四十結下 左右街司及 諸主者施行勿替 先是嚮福 卽毅宗藏胎之所也 中遭兵火 靡有子遺因以田 與民移籍 是寺以爲 追福毅宗駕謝幽塗登樂岸之捷徑也 又每於忌日 齋僧作法以薦流年 恒式因以知聖上 弘大佛事之爲至 亦以識友于之義不間於幽明也 至是住持廓心等實懼 歲月徂謝 文字漫滅 聖君之韶旨 先師之行跡 將因莽 鹵無聞於後 具狀其事以 聞上命臣詵以記之 臣聞 自漢明以來像敎熾于 天下大都小邑名 山勝境鮮不□梵刹而 聚緇流盖 將使大法光揚 以爲不朽之道也 故當其始作之際 無不欲規萬世圖千劫然 或繼之者□其人 又無世主之外護則 徒厚殖資産以□□□而使圖 像毁滅 屋宇殘圮者 比比有之今 是寺者胤公 以大德宿望得福地而 營之上承人主護 念之勤下 得門弟精進之 人其爲貽久歷□也 雖劫石成灰 泰山若礪烏有窮已 豈源深者流必長 根茂者葉必盛乎



       용수사에는 모두 3기에 탑이 있는데, 두 기는 대웅전 앞에 있고 한 기는 대웅전 옆에 있다. 모두가 정교한 석탑이며 크기도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어 크기가 알맞으며 잘 조화가 되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탑.



       대웅전 우측에 있는 탑.



      다보탑을 축소한 듯 정교하게 조성된 아름다운 석탑.


公俗姓 元氏 名釋胤 北原人也 考沖翼 爲州戶長 母方娠夢抱摩尼珠 覺而心異之 生有異相 自髫齔時  善事其親年甫十三 酒然有出世之志 以告二親 二親以前夢貴徵惜之 未卽頷 無何竊出 投雉岳山三泉寺 慧詣法師 求剃髮師以 非其親所託難之 父母百計引還卒 不可忽一夕 母夢公爲僧 合掌向佛而 作梵唄於是 父母議許出家 雖在妙年 志尙素朴 戒行殊特口亦羅什之門 瑚璉玄奘之門 沉檀蘭蕙者 已年至十六依無㝵智國師受學 盡傳其業歷住 雉岳山開善寺 三角山淸源寺 最後 住覺華寺 皆上所命也 公常以傳道授業 爲樂學者輻湊所□成 市閒因檀越所 請法會者三十餘所 凡所度學者 後皆爲聞人 公所住處無不革 舊創新俾 佛事增煥 又於諸山搆修眞之 地凡有四所 鳴呼 公非徒於道 詣極之如彼抑 其所樹立 卓卓如此 是皆宜書以 示後者歟觀 夫古之記事者 傳信傳著焉 耳臣父先臣嘗與公串昵參問 道要平上日矣 時臣以稚齒脩 酒掃於左右 竊聽緖餘 及見行己之大方甚熟 今掇門人之所錄 以爲信且著 故直書其事之 始末如此 大定卄一年龍集辛丑季夏哉 生魄文林郎試禮賓少卿知制誥賜紫金魚袋 臣崔談奉
宜記幷書 門人住持道人臣 廓心立石
門人開善寺住持道人臣 立心刻字




          뜰에는 대웅전 앞에서 잔디 사이로 많은 맷돌을 땅에 깔아 한층 더 운치를 더하고 있다.


3. 건축물의 구성과 배치
용수사는 좌청룡, 우백호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용두산 자락 대지 위에 남향으로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 요사 2동이 전각을 호위하듯 자리 잡고 있다.

용수사 자리는 이미 고려 의종이 日官(일관) 영위를 보내 터를 살펴보고, 사찰의 개창에 적극적인 후원을 했듯이 절터로는 최적의 자리라고 한다.

지관들이 볼 때 이곳은 용의 여의주 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용이 놀자면 구름이 있어야 하는데 구름은 물이 따뜻한 기후에 의해 상승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안동은 2개의 댐으로 인해 주변이 물로 둘러져 있고 또 용수사가 소재하는 도산면소재지의 지명이 온혜(溫惠)로 1992년부터 개발된 도산온천이 있으며 절 가까이에는 구름마을이라는 구레실(雲谷)이 있다.
거기에다 이웃한 면이 용이 누워 있다는 와룡면으로 그 곳이 용의 꼬리부분에 해당된다면 이곳 용두산은 용의 머리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 이러한 자리에 용에게 여의주를 물려 놓으면 조화를 이룬 다는 생각으로 이 좋은 자리에 불사를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대웅전의 전경.



         대웅전의 현판 글씨



가, 대웅전
대웅전은 1994년 12월에 상량식을 거행하였으며 규모는 총 44평이다. 이 전각은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화강석 다듬돌로 1m 높이의 기단을 만들고, 기단의 정면과 양측면의 면석에는 봉우리 머금은 연꽃송이를  돋을새김 하여 미적인 면을 더하였으며 또 승강(昇降)의 편리를 위해 기단의 전면과 양측 면에 돌계단을 조성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화강석의 연화문 주출들 위에 원주를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전면 3칸에는 4분합 꽃살문을 달았고 양측 면과 뒷면에는 빗살문을 두었다.

전각의 뒤쪽에 문을 만든 것은 보기 드문 경우인데 이 건물의 경우에는 불단이 벽에서 떨어져 있어 필요시 뒷문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측 면과 뒷면의 벽체는 11점의 화엄변상도와 2점의 사대천왕도로 장식 하였는데 벽면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니고 천에다 그린 다음 벽체에 맞추어 넣은 것이다.
이들 벽화 중 화엄변상도는 별도로 용수사에서 제작하여 소장하고 있는 80점의 변상도 중의 일부이며 벽면이 부족하여 80점을 모두 벽에는 그릴 수가 없었다.



           대웅전 옆에 있는 인자한 포대화상


사대천왕도는 전각의 안에 조성된 사천왕상과 더불어 잡귀의 범접을 막고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그 위치를 뒷문의 좌우에 두어 문으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법당 전면의 기둥에는 칠언절구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그 내용은 부처님의 무한한 원력과 자비심을 찬양한 것이다.


대웅전의 주련.

주련은 다음과 같다.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내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汪洋覺海竗難窮(왕양각해묘난궁)
   <해>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하시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광대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어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헤아릴 수 없네.




         대웅전의 주불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협시 보살.


법당의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 벽면과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불단을 조성하였으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였다.

불단 위에는 대웅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협시불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상을 봉안하였다.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은 특별히 불보살들이 입는 가사인 금난가사를 착용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제작기법은 먼저 목불을 조성한 다음 비단을 붙이고 다시 비단을 한 번 더 입혀 채색하여 개금한 것이다.




        용수사의 인자하신 관세음보살님





         지혜와 슬기를 주시는 용수사의 문수보살님


본존불이 좌정한 머리 위에는 천상의 보궁을 상징하는 닫집을 꾸며 놓았는데 용· 봉황·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좌측 벽면에는 신중단이 조성되어 「신중목탱화」를 봉안하였다. 「신중목탱화」는 동진보살을 탱화의 중심에 두고 탱화의 상단에 제석천과 대범천·천동·천녀·일천자·월천자를 두었다.
중단에는 토속신장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금강역사와 신장상을 배열하였다. 기타 법당 내부의 빈 공간에는 건물 외벽에 조성한 「대방광불화엄변상도」와 연계하여 「화엄변상도」로 장식함으로써 화엄 사찰로서의 면모를 나타내었다
          



         옥으로 된 관세음보살.


후불탱화는 목탱화로 1996년 9월 29일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탱화의 상단 양측 면에는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시방세계의 일체제불을 표현하였고 그 아래에는 삭발한 모습의 10대 제자상이 조각되었으며 화려하게 장식하여 장엄하다.




        문수보살의 반신상.




         관세음보살의 반신상.



좌측벽면에는 신중단이 조성되어 신중 목탱화를 봉안하였다.
이 탱화는 동진보살을 탱화의 중심에 두고 탱화의 상단에 제석천과 대범천·천동·천녀 ·일천자·월천자를 그리고 중단에 토속신장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금강역사와 신장상을 배열하였다.




         불단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보시토끼.
         이 토끼에게 보시하면 불교발전과 용수사 불사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된다.


기타 법당 내부의 빈 공간에는 건물 외벽에 조성한 대방광불 화엄변상도와 연계하여 화엄변상도로 장식함으로서 화엄사찰로서의 면모를 나타내었다.



           특수하게 조성된 용수사 신중탱화. 이 탱화의 복장기를 내가 써서 봉안하였다.


나는 용수사와 인연이 있어 이 보살님과 후불탱화의 복장기를 원행스님의 부탁으로 써서 지금 보살상과 후불탱화 복장 속에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뒤편에서 부처님을 수호하고 계시는 용수사 나한상.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木像(목상)인데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찾아보기 힘 든다.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한 다양한 나한상은 너무 많아 여기 다 소개 할 수 없으니 직접 참배하시고 살펴보시면 복 받으실 것입니다.





         마이당 전경.
         대웅전 앞에 마치 두 마리 용이 꿈틀거리듯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용수사의 요사.

나. 寮舍
요사는 1994년에 조성된 건물로 대웅전을 사이에 두고 2동의 건물이 서로 마주보는 배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각 98평이다.

2동의 요사를 같은 구조로 조성하였는데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이며 공포구성은 초익공양식이다.

화강석 다듬돌로 높이 80cm 정도의 기단을 쌓고 연화문 주출들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기단에는 승강의 편의를 위해 앞뒤에 6개, 측면에 2개의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앞뒤의 것은 너비가 4m 30cm이고 측면의 것은 2m 20cm이다.  
건물의 앞과 뒤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앞뒤 각 5칸은 각기 반 칸을 물러 마루를 구성하고 있다.

각 칸에는 쌍 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상인방 위에 벗살창인 교창을 두었다.

대웅전은 향해 우측에 있는 요사를 麻衣堂(마의당)이라 하는데 주로 객사와 스님의 거처하는 방으로 이용하고 있고 있다.

그리고 마이당 서쪽 끝 방에서는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공간이 있다.
즉 마이당 전 면적 만금 다락방이 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작은 방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참선 할 수 있는 비밀의 방이 있다.
나는 원행스님의 안내로 그 방과 다락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거기에서 용수사의 보불인 화엄변사도 원본도 볼 수가 있었다.




         麻衣堂(마의당) 현판 글씨
         용수사는 마의태자의 전설이 답겨 있다하여 이 전각의 이름을 마의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麻衣堂(마의당)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다.


                             


氣似將軍戰一場(기사장군전일장)
卒地逢人揮正令(졸지봉인휘정령)
飜天覆地也辱常(번천복지야욕상)
參禪只在起疑団(참선지재기의단)
疑去疑來似火団(의거의래사화단)
三際求心不可得(삼제구심불가득)
隨緣應物豈非無(수연응물기비무)
了知法界皆平等(료지법계개평등)
<해>
        기운은 마치 장군 같아 한바탕 전쟁이라.
        졸지에 유능한 사람 만나 바른 명령을 휘두르니
        하늘을 뒤집고 땅을 엎는 것은 항상 함을 욕되게 함이라.
        참선은 다만 의단을 일으키는데 있으니
        오직 의정으로 오고가 불덩이 같이 되어
        현재 과거 미래의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니
        인연에 따르고 사물에 응함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결국 법계의 모두가 평등함을 알게 되리라.

대웅전을 향해 좌측 요사를 月午觀(월오관)이라 하는데 현재 상운 스님의 거처와 종무소로 이용하고 있다.
月午觀(월오관)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다.




       월오관의 전경.
       이 건물 안에 용수사 중흥을 이룩하고 있는 상운스님이 기거하시고, 또한 종무소와 접빈실이 있다.


月午觀(월오관) 현판 글씨.


觀(관)이란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뜻이다.”그리고 月(월) 즉 달은 禪宗(선종)에서 心月(심월)이라 해서 “마음의 달“ 즉 참선을 뜻한다. 그래서 월오관은 밤에는 당연이 발이 보이지만, 낮에도 달을 본다는 뜻으로 “밤낮으로 달은 본다.”에서 轉用(전용)되어 「밤낮으로 찬선하고 수도한다.」라는 뜻으로 풀이 한다.


월오관의 주련

                                 


自然物物非長短(자연물물비장단)
十方世界一毛中(십방세계일모중)
無量劫時彈指頃(무량겁시탄지경)
元來妙道體虛然(원래묘도체허연)
何用揮毫妄示人(하용휘호망시인)
一念未形前薦得(일념미형전천득)
寄言妙句盡爲塵(기언묘구진위진)
無明法性非一異(무명법성비일이)
生死眞如豈兩般(생사진여기량반)
<해>
        자연의 온갖 사물은 장단이 따로 없으니
        이 세상은 터럭 한 올 가운데 있다네.
        무한한 영겁의 시간도 찰나일 뿐이며
        원래 묘도는 체가 텅텅 비고 허망하니
        어찌 눈썹을 움직여 망연되이 사람에게 보이겠는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깨닫는다면
        기이한 말과 글귀는 모두 티끌이 되리
        무명과 법성은 서로 다르지 않으니
        생사와 진여에 어찌 두 가지 진리이겠는가.




       미륵전의 전경.
       한 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지만 그 앞에 기도 할 수 있는 넓은 단이 있어 월남한 부처님을 참배하기 매우 편리하다.




       월남한 미륵부처님.
       이렇게 큰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고 그 험한 죽음의 길을 무사히 넘었을까? 정말로 신기하다.


다. 彌勒殿(미륵전)

대웅전 북측에 있는 미륵전은 특이하게도 북한에서 월남한 미륵좌불상이 있다.
이 부처님이 용수사 까지 오게 된 데는 많은 사연이 있었고, 그 극적인 사연은 이미 국내 여러 언론사에 보도된 바도 있어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도하면 지극한 영험이 있다는 이 부처님을 참배하시고 기이한 월남의 인연을 스님에게 물어보면 잘 설명 해 주실 것입니다.



미륵전의 주련


          

一切衆生(일체중생)
平等饒益(평등요익)
<해>
        무든 중생을 모두
        평등하게 이익 있게 하신다.




       산신각 전경



       산신각의 산신상.



        산신각 현판

라. 山神閣(산신각)
산신각은 용수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모셔져 있다.
완만한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단정한 산신각이 산허리에서 용수사의 모든 전각을 내려다보며 산세와 지세를 진압하고 있다.
한 칸 크기에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산신 상을 모시고 있으며 다른 복잡한 꾸밈은 없다.



          


산신각의 주련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威鎭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해>
        영축산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신 산신은
        강산에 떨치는 위신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네.




       산신각 옆에 꾸민 돌 탁자와 의자.
       여기서 한 숨 돌리며 용수사의 넓은 뜰을 바라보며 용두산의 정기를 받아보면 내일의 생활에 더욱 활력이 생길 것이다.




       산신각 앞 계단 위에 있는 작은 돌 사자상.   규모는 작지만 조각의 솜씨가 정교하다.



용수사가 역사가 있고 오래 된 사찰이라는 증거는 다음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봐도 잘 알 수가 있다.

○龍壽寺 在慶尙北道禮安(今入安東) 龍頭山 高麗僧誠願始構 毅宗爲僧釋胤改構 賜名龍壽 命崔詵記之 金大定二十一年六月立.
        -東國輿地勝覽 25券478頁 大嶺志-
<해>
용수사는 경상북도 예안(지금은 안동에 편입) 용두산에 있다. 고려의 승려 誠願(성원)이 처음 지었고  毅宗(의종)이 釋胤(석윤) 스님을 시켜 改修(개수)하였다. 그리고 崔詵(최선)에게 명해서 龍壽寺(용수사) 記文(기문)을 金大定(김대정) 21년 6월에 쓰게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25권 478항 대령지-

○崔詵龍壽寺記 略曰 龍頭山之南有洞 洞之口有藪 土人稱爲大王藪 蓋我太祖 略地至南方 屯兵於此 三日後乃行 至今其地 多喬木衆卉 樵蘇者不敢近 謂有神物護之者
        -東國輿地勝覽 25券禮安群古蹟條大王藪註.-

<해>
崔詵(최선)이 쓴 龍壽寺(용수사) 기문에 이르기를 龍頭山(용두산) 남쪽에 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 어귀에 숲이 있다.
그 곳을 지방 사람들은 대왕숲이라 한다.
우리 太祖(태조)계서 지형을 살피러 남방을 갈 때 이곳에서 병사를 머물게 하였다가 3일 뒤에 떠나가니, 지금은 그 땅에 많은 나무와 잡초가 무성하여 나무꾼들이 감히 접근을 않는데 신들이 보호하는 곳이라고 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25권 예안군 고적조 대왕수 주-



           사세를 말하듯 용수사에는 많은 장독대가 있다.
           하로 종일 햇빛이 들어 오는 곳에 장독을 놓아서, 용수사 장맛이 천하 일품이다. 누구라도 오시면 맛있는 공양을 드실 수 있다.



          용수사의 해우소
          바로 옆에 주사의 공사가 진행중이여서 주변이 좀 어지업다. 공사가 끝나면 말끔히 청소되고 단장되리라 생각한다.



          지근 한창 공사중인 용수사 신축 주사.
          상운스님과 원행스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이 큰 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 섰다. 이 요사의 기문을 내 손으로 써서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잘 봉안 하였다. 먼 훗날 이 요사를 해체 하면 이 공사의 전말을 알게 되는 역사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용수사 입구에 있는 용수사 중건비



            옛 절터를 말 하듯 용수사 주변에는 많은 유적들이 출토 된다.
            왕의 원찰로 크게 번성했던 시절의 영화를 말 하듯 용수사에는 옛 절터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용수사 중건 공사 중 출토된 용수사 사적이 적힌 비석.



            시원한 물이 나오는 용수사 수조            




           용수사에서 기더하던 한 처사가 공들여 쌓은 돌탑



             용수사 주방의 조왕단
             적혀 있는 글씨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南無左補處擔柴力士(남무좌보처담시력사)
                 南無八萬四千竈王大神(남무팔만사천조왕대신)
                 南無右補處造食炊母(남무우보처조식취모)




             

         용수사 입구에 있는 부도.
        


              대웅전의 용마루에 용


그리고 용수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3호인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安東龍壽寺大定參年銘金銅鼓)를 소장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인 안동 용수사 금호비(安東龍壽寺禁護碑)가 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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