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의상을 사랑한 선묘
소재지: 경북 영주시 보석면 북지리 鳳凰山(봉황산) 에 있는 절.
어느 사찰을 막론하고 고찰이 우리들에게 주는 편안과 안정은 다 가추고 있다고 하지만 부석사만큼 큰 평안을 가슴에 안겨 주는 사찰은 다시없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멀리 비탈길을 오른 다음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오르면 울창한 주변 산세(山勢) 속에 부각(浮刻)한 듯 커다란 안양루가 보이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은 다른데서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공중으로 날라 갈 듯 한 날렵함 속에서도 기풍을 잃지 않는 정교함이 있고, 그 뒤에 무량수전과 어울려 말 그대로 극락의 신비를 연상하게 한다.
부석사에는 많은 문화제가 있고 유명한 유적이 많지만 석벽(石壁)도 또한 볼만하다. 불국사 석벽이 유명하다 하지만 부서사의 석벽역시 크고 작은 자연석이 잘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무늬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기하학적 황금불활의 지식이 그 벽을 쌀을 때 있었는지 알 수 는 없지만, 우리 선조들의 감각적 審美感(심미감)이 이런 걸작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부석사를 찾을 때 꼭 땀을 식히며 조화로운 석벽에도 눈길을 준다.
의상(義湘)을 사랑한 선묘(善妙)
의상(義湘)은 출가하여 입산한지 8년 만에 큰 뜻을 품고 더 깊은 불교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당나라로 갔는데, 그만 양주에서 병을 얻어 성(城)의 守衛長(수위장) 집에 병이 낳을 때 까지 며칠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선묘(善妙)라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는데, 잘 생긴 젊은 의상(義湘)을 보자 그만 한 눈에 반해 가슴에 깊은 연정(戀情)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의상이 완쾌되어 떠나던 날 선묘(善妙)는 간절한 마음을 달리 표현 할 수 없으나 다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귀국할 때 꼭 다시 들러달라고 부탁하였다.
당(唐)나라에 도착한 의상(義湘)은 지상사에서 지엄대사 밑에서 수학하다가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알고, 그 급한 일을 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급히 서둘러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하는 도중에 약속대로 선묘(善妙)의 집에 들렀으나 마침 선묘가 출타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이를 안 선묘가 울면서 의상을 뒤 쫓아와 바다 저 멀리 사라지는 배를 보고, 의상(義湘)에게 주려고 만들어두었던 옷을 던지며 무사히 잘 가라고 축원(祝願)하니 해풍이 일어 의상에게 날라다 주었다고 한다.
의상(義湘)을 향한 그리움에 가슴이 타는 선묘(善妙)는 이어 용(龍)이 되어 의상의 귀국을 돕게 해달라며 바다에 몸을 던져버렸다. 옥황상제는 이 가련한 선묘의 청을 받아들여 선묘를 용이 되게 하였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義湘)이 탄 배를 호위하니 배는 험한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달려 무사히 귀국 할 수가 있었다.
귀국한 의상은 당나라의 침략 의도를 조정에 알리고 그 침략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 뒤 사찰을 건립하라는 왕명을 받고 鳳凰山(봉황산)에 터를 잡으려 했으나 먼저 자리를 잡고 세를 누리던 도적 때 때문에 뜻을 잘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때 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어 올렸다 놓으니, 도적들이 겁을 먹고 의상(義湘)에게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건립한 것이 바로 浮石寺(부석사)이다.
그리고 그때, 용이 들어 올린 큰 바위는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자리 잡고 있다. 善妙龍(선묘룡)은 부석사의 수호신으로 안좌(安坐)했는데 무량수전 주불 밑에서 석등까지 뻗쳐 있어 비늘 모습까지 아련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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