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명찰 修德寺(수덕사)
수재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德崇山(덕숭산) 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는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남쪽 기슭에 솟은 德崇山(덕숭산)에 우뚝 서 있다.
산과 서해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그곳이 바로 옛 부터 小金剛(소금강)이라고 일컬어 졌는 명승지이며, 또한 그 곳이 바로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이 면면히 계승되고 많은 고승과 선지식이 배출된 한국불교의 종찰(宗刹) 수덕사이다.
몇 개 남지 않는 백제의 고찰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내를 거닐어보면 옛 역사가 다시 새로워져 가슴에 묘한 감회를 받는다. 사찰과는 무관한 낭랑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도 옛 백제 땅을 밟기 때문일까.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山地形(산지형) 가람을 돌아보면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백제 사람을 만나는 것만 같고 잠시 천 년 전의 태고로 돌아가는 듯 한 상념(想念)에 잠긴다.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 아니고, 산은 옛 그대로의 산이지만 초목은 그때 그 시절의 초목이 아니다. 흐르는 세월 ! 변하는 세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리(法理)가 가슴을 친다.
수덕(修德) 도령의 애틋한 사랑.
옛날 사천리 마을에 수덕(修德)이란 총각이 있었다. 수덕(修德)은 부유하고 가문도 좋은 집안의 도령이었고 공부도 많이 한 장래가 촉망되는 도령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에서 우연히 한 아름다운 낭자를 보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몰래 바라보니 선녀같이 아름다운 낭자였다.
도령은 그 모습에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려 도저히 가슴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 않고 오직 눈에 아른 거리는 그 낭자 생각뿐이었다. 상사병에 걸린 듯한 도령은 하인을 시켜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사는 덕숭(德崇)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령은 곧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그러나 수덕(修德)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德崇)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인부들을 모아 낭자의 마음에 들게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낭자를 얻고자하는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한 도령은 절을 지으면서도 내내 낭자 생각만 하면서 절을 지었는데, 절이 완성되자 그날 밤, 불이 나서 애써 지은 절이 모두 불타 버렸다.
도령은 목욕재개 하고 예배를 드린 다음 다시 절을 지기 시작하였으나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몸으로는 절을 지으나, 마음으로는 역시 낭자 생각을 하면서 절을 지었는데, 이번에도 절을 다 짓자 원인모를 불이 나서 또 다 지은 절이 불타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절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절이 무사히 잘 지어지고 아무 탈이 없었다.
그리하여 낭자는 약속한 대로 혼인을 했으나, 첫날 밤 수덕도령이 손을 대려 하자 낭자는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德崇)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령은 커다란 바위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하며, 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수덕(修德) 도령이 지은 절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修德寺(수덕사)라 하고 산은 덕숭(德崇)낭자의 이름을 따서 德崇山(덕숭산)이라 하여 德崇山(덕숭산) 修德寺(수덕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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