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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안동의 사찰 金井庵(금정암)

청남이메일
안동의 사찰 금정암(金井庵)

위치: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 247

길안면에서 포항 쪽으로 가는 포장된 길을 따라 약 5km 가량 가면 작은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용담사(龍潭寺)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푯말이 있으니 조금만 주의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금학산 금정암과 화엄강당 현판 글씨>


용담사 까지 가는 길은 지금 보수중이여서 앞으로 포장된 넓은 길이 생기리라 생각되지만 지금의 산길로 가야 하는데, 산길이긴 해도 비교적 편하게 갈 수가 있다.

용담사 바로 앞에 작은 길안천의 지류가 흐르는데, 그 다리를 건너서  그야말로 깊고 가파른 산길을 약 2KM 오르면 구불구불 달려서 금정암까지 닿을 수가 있다.

길은 험하지만 그 대신 천고의 밀림 같은 깊은 숲과 오염되지 않았을 청초한 경치를 바라 볼 수 있어 가파른 길을 오르는 보상은 청분 하다고 본다.

저물어가는 壬辰年(임진년)의 늦가을, 80이 넘는 내 처지에 이번 말고 또 다시 또 금정암을 찾을 수 있을 까 하는 서글픈 마음으로 금정암을 찾아 갔다.


        <화엄강당 동쪽에 별채 당호를 傳燈殿(전등전) 이라 생각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 옛날 여기서 많은 청년 불자와 스님과 함께 모여
         밤세워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길가에 서 있는 노송과 기암절벽이 산을 휘감아 흐르는 밝은 물속에 투영되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정암 입구 오른쪽 산허리에는 부도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조금 위에 화엄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터는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고 또는 아름다운 여인이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김방걸 선생의 비각>



금정암 좌측으로는 조선 숙종 때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1623~1695)선생의 묘소가 있고,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고 하는 의상바위도 찾아볼 수 있다.

옛날, 자주자주 금정암에서 상주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 불자들과 함께 며칠씩 묵으면서 진지하게 인관의 法理(법리)에서, 연기의 법칙 까지 깊게 파고들어가 토론을 벌리기도 하고, 아비달마구사론의 이론을 강설하며 토론했던 생각이 바로 어제 같은데 어언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금정암의 전경>



금정암의 대표적인 건물은 화엄강당으로 규모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일자형(一字形)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로 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기둥은 배흘림으로 다듬었다. 세월과 풍파에 시달려 기둥과 석가래는 풍화가 되어 부식이 심하다.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용마루 양쪽 끝에는 망새(雉尾)기와가 언쳐있다. 정면 8칸은 건물의 쓰임새로 보아 4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왼쪽으로 2칸은 부엌이며, 그 다음 3칸은 법당이고, 그 옆 2칸은 선원(禪院:강당), 제일 우측 1칸은 창고로 쓰고 있었다.
2칸의 부엌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는 전면으로 1칸 넓이의 툇마루가 깔려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한 옛 부엌에 그래도 조왕 탱화와 조왕단을 모시고 있다.>

이 통칸의 화엄강당은 온돌로 되어 있어 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때는 가꿈 군불을 때고 하였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몹시 허술해서 방바닥도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 하였던 것으로 생각 하는데, 이번에는 들어가 보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스님 말로는 건물이 기울기 시작하여 곳 보수한다고 한다.

그때 불단은 뒷벽에 붙여서 장방형의 단을 놓고 그 위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석가모니불을 모셔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방에 잘 때 부처님과 함께 자게 되니 조심해야 되며 방귀 끼서는 아니 된다고 농담도 하였다.

부엌을 들어다 보니, 지금은 부엌으로 사용하지 않는데도, 그래도 조왕의 초상화와 조왕단이 모셔져 있었다.




       <산령각과 천태각. 천태각은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인데, 전국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보기 드문 이름이다.
         전에 왔을 때도 의심을 가젔는데 지금도 외 그런 이름을 붙혔는디 알 수가 없다.>




       <천태각의 탱화. 나반존자의 상이라고 한다.>




         <산신각의 탱화. 산신령의 상이라 한다.>



용담사(龍潭寺)느 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때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임란 때 화재로 소실 된 것을 1574년(선조 7) 송혜증법사(松惠證法師)가 중건하였다한다. 그로 미루어 봐서 금정암도 신라시대에 지은 암자가 아닌가? 추측 할 뿐 정확한 사적을 추론 할 수 없는데 이번에 보수한다면, 그 때 상량문을 발견해서 그 기록을 보면 소상한 내력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금정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바위가 암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금정암 중수기에 의하면 1710년 혜심대사에 의하여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금정암 중수기를 싣는다.

金井庵重修記
龍潭寺之別院, 曰金井庵, 以其在金鶴高山之下, 而簷楹之側, 有井, 自涌甘寒, 盖合山泉之美, 而名之云 初, 惠心大師, 與其徒, 弅是庵. 賁明陵庚寅歲也.
至今上四十一年乙酉春, 玉仁大師, 使碧淳·善湖, 募緣重修焉. 方其未也,
余以曾叔祖大司成公, 移葬其右, 隔一壟之地. 爲之往來憩息, 庵中累日, 愛其幽靜淸廻. 宜爲定禪所住, 不知其傾壤腐黑, 必可更新而後安也.
旣歸, 未數月, 聞其興工役已訖. 於是, 心異其成之速, 且想棟宇丹碧, 洗然改觀, 欲更往遊, 而未及也.
一日, 庵之僧存學來, 見余, 求爲文以記之, 學亦大師也.
余旣重叔祖衣冠託在其近, 視庵, 異於他日. 又嘉仁之老而勤, 學之少而文, 於其請, 有不可得而拒者矣.
夫寺之有庵, 所以迎奉大師, 而修道敎衆於中也.
浮屠之法, 其徒, 有曉經理, 解文辭者, 衆皆推尊, 謂之大師, 別其居處, 不敢與之齒, 使之升座講說, 環向而聽之, 大師每發一義, 營一事, 必謹諾而齋趨之, 如吏人之使於官長, 而誡意過之. 故, 功不期速而速, 玆庵之役, 實亦用是道也.
向使爲大師者, 嫌於自尊, 而不敢有所命, 爲衆信者, 恥於自屈, 而不肯用其命, 則吾知一木不可運, 一瓦不可覆, 心安能弅之於前, 仁安能修之於後. 嗟乎, 彼非有官位勢力, 以相上下也.
徒以才識長短, 定爲階級, 相與維持唱和, 而成就事功. 使今之鄕薰庠序, 能如被之所爲, 則賢不肖, 各得其分, 而不混不背, 敎之則從, 倡之則應,  夫豈有乖張, 而不可一者哉.
昔明道先生適僧舍, 見其方食, 歎曰 : 三代威儀, 盡在是. 余謂 : 古者, 尊賢樂職之義, 乃見於叢林中. 此其可取, 有大於食時威儀之可觀. 遂書所感於心者, 以歸之. 是歲五月旣望芝谷散人.

<해>
金井庵(금정암) 중수기

용담사의 別院(별원)을 金井庵(금정암)이라 하는데, 그것이 높은 금악산 아래 있고, 그 처마 기둥 곁에 우물이 있어 스스로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고 있으며 山泉(산천)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금정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처음 惠心(혜심) 대사와 그 제자들이 암자를 연 것은 실로 인현황후의 능인 明陵(명릉)을 만들 무렵인 庚寅(경인)년인데, 지금의 왕 41년 乙酉(을유)년에 와서 玉仁(옥인) 대사가 碧淳(벽순)·善湖(선호)를 시켜 중수에 필요한 재원을 시주받게 하였으나 아직 다 이루어 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曾叔祖(증숙조)인 大司成公(대사성공: 芝村 金邦杰)의 묘가 그 오른쪽 조금 떨어진 언덕에 이장하게 됨에 따라 암자에서 며칠 휴식하러 왔는데, 맑고 고요하고 청초한 기운이 감도는 정취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선정을 하기 매우 좋은 곳으로, 검고 썩은 마음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모르며, 정신이 다시 새로워진 뒤에 편안하게 되었다.

돌아 온지 몇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공사를 다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속히 이루어졌는가?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 아름다운 당우를 상상해 보고, 다시 새로워진 모습도 볼 겸 가보려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암자에서 공부하는 스님이 찾아와서 나를 보고 학인들과 대사에 관한 기문을 써달라고 청한다.

나는 이미 나의 重叔祖(중숙조)의 묘가 그 옆에 있고, 또한 암자도 볼 겸 얼마 뒤 늙은이가 부지런하게도, 아는 바도 적고 문장도 졸렬하지만 그 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사찰에는 암자가 있어, 거기서 大師(대사)를 맞이하며 배우는 무리들에게 도를 닦고 가르치고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의 법에는, 그 학인들에게 새벽에 경의 이론을 강의 하고, 경전을 해석하여 말하는 분으로서, 무리들이 모두 높이 추앙하는 분을 대사라고 한다. 그분이 따로 거처하는 곳엔 접근을 삼감하며, 함께 먹고 마시고 하지 않고 높이 우러러 강설을 하게 하여 모두 모여 앉아 경청한다.

대사가 한 가지 옳은 말을 할 때 마다, 마치 장관이 벼슬아치에게 명하면 정성을 다해 따르는 것과 같이, 대중들도 대사의 지시하는 일을 행하며, 반드시 삼가 응낙하며 실천해 나간다.
고로 이 암장의 공사도 기한 보다 더 빨리 이루어 젓는데 이것이 또한  道(도)인 것이다.

대사를 향해서는 자신을 높이는 것을 꺼려하고 명령을 감히 어기는 일이 없다. 많은 신자들도 그 명을 어기는 것을 자신에 대한 굴욕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신자라면 나무 하나라도 나르지 않을 수 없고 기와 한 장이라도 덮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중생의 마음은 공사하기 전에도 편안하였고, 공사를 다 마친 뒤에도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관가의 강압적인 세력도 없었고 또한 상하의 구별도 없었다.
대중들은 재주와 식견의 장단에 따라 직분을 정하고, 서로 화합하는 가운데 화목을 유지하며 공사를 성취한 것이니 지금의 鄕黨(향당)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즉 현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 각자 그 응분의 분수를 지키며 서로 함께 화합하여 배신하지 말고 가르치는 대로 따르며 응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대의를 어기며 어그러지는 자가 하나라도 있어야 하겠는가.

옛날 明道先生(명도선생)이 승방에 가서 그들이 공양하는 것을 보고
기탄하며 말하기를 「삼대의 威儀(위의)가 모두 여기 있구나.」 하였다.

나도 말한다. 「옛 사람은, 존귀하고 현명한 사람이면 義(의)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른 사람들은 叢林(총림)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에 그분들을 보면, 식사를 할 때 威儀(위의)가 있는 것이 볼만하다.」

마음에 있는 것을 적고 돌아오다.

이때가 5월 16일이라.
              芝谷(지곡) 散人.

이 중수기는 영조 41년(1765) 음력 5월 16일 김정한(金正漢, 1711~1766)이 지은 것이다. 그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字)는 부중(扶仲), 호(號)는 지곡(芝谷)이다.


우리를 맞아준 분은 한 떨기 들국화 같이 청초한 비구니 스님이었다.
법명도 알려 주었는데 잊어버리고 모른다.
스님이라면 스님이면 되지 구태여 법명까지 알 것이 없다.

이런 깊은 골짝에, 찾아 주는 사람도 드문 한적한 절에서 무엇을 먹고 이런 가냘프고 어린 비구니가 혼자 어떻게 사는지 걱정이 되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無所有(무소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뒤집어 생각하면 모두를 갖은 부자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 눈으로 보면, 이렇게 적적하고 답답하게 어떻게 사느냐고 생각하지만, 스님이 우리를 보고는 그렇게 복잡하게 어떻게 사느냐? 고 반문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실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하면 역시 그 답은 주관에 있지 객관에서 구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禹像堂(우상당)의 현팡.>


우상당 방문을 열러 보았더니 말끔히 장판이 깔려 있는 방안에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야 말로 텅비어 있다.
이 방에 앉아 잘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쓸대 없는 것을 얼마나 많이 모아놓고 그것에 억매여 생각마져 복잡하고 번잡하게 사는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거 공간이 허락 한다면 가정에서도 방 하나는 텅 비워 두고 가끔 그 방에 들어가 혼자 앉으면, 마음이 더 편안하고 차분해지며 내면의 자성을 볼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우상당의 주련

                                        


十二大願接群蒙(십이대원접군몽)
一片悲心無空缺(일편비심무공결)
凡夫顚倒病根深(범부전도병근심)
不遇藥師罪難滅(불우약사죄난멸)  -약사여래 정근-

<해>
           열두 가지 큰 원을 세워 온갖 중생 건지시고
          중생 향한 자비심에 부족함이 없으신데,
          범부와 중생 잘못하여 병의 뿌리 깊었으니
          약사여래 만나지 못하면 죄 멸하기 어렵다네.



그런 가난한 절에서 우리는 스님의 양식을 축을 내고, 점심을 얻어먹고 왔다.
우리를 먹인 만큼 혹시 스님이 굶지나 않을까?

가난한 절에서 차려 주는 아욱국과 버섯 무침은 이 세상 어떤 음식보다 더 맛이 있었고 스님의 손맛이 담긴 소박하지만 귀한 음식으로 한 끼 요기를 하니 나도 또한 이 처지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욕심을 버리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고, 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경지가 바로 열반의 행복 경지이가 아닐까.

행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스님은 모두를 버리고 무소유에서 사니, 진실로 가장 편안하고 모두를 갖은 부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갖은 것이 없어 많은 빗과 부담만 안고 돌아 왔는데 그 대신 순수한 마음만은 금정암에 바치고 왔다.

그야말로 속세를 떠나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진여의 성품을 닦는 고고한 수도스님의 도가 크게 이루어지기  바라며 복잡다단한 속세로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다본 금정암의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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