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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안동의 사찰 燕尾寺(연미사)

청남이메일
燕尾寺(연미사)

1.위치: 안동시 이천동 산2번지
           054- 841- 4413

안동에서 5번국도를 따라서 영주방면으로 3km를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이곳은 제비원 주유소와 휴게소가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다. 한터재를 넘어 2km더 북쪽으로 가면 길가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마애불상을 만나게 된다.


             <연미사 현판 글씨. 중수하기 이전 법당에 걸려 있었다.>      


      <대웅전의 주련 글씨>

                                        








         <중수하기 이전의 연미사 법당. 새로 중수한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부처님의 노여움으로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다음 노여움이 가시면 다시 가서 사죄하고 새로 찍어서 여기 올리겠다.>


이 불상이 바로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이천동 석불상이다.
속칭 제비원미륵불로도 불리는 이 불상 됫편에 있는 조그만 절이 연미사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여주던 연비원이 있었다하여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민족의 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곳이다.

불상 정면에 있는 바위 위에는 1918년에 세운 연미사 중수비가 있다. 이 비의 높이는 125cm, 너비는 42cm이다.
또한 불상의 뒤쪽 암벽위에는 3층 석탑 1기가 있다.




2012년 11월 5일 11시경, 나는 영미사를 집중 취재하고 사진을 찍으러 연미사에 가서 미륵불 뒷산에 올라 미륵불의 머리 뒤를 찍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잘 나오던 사진이 오늘 따라 전부 나오지를 않아 낙심하였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뒤는 찍지 말라는 지시라고 생각하고 연미사 사진은 전적으로 싫지 않고 옛날에 찍은 미륵불의 사진만 올리기로 하였다.

정말 부처님은 무섭다.

2.유내와전설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는 부(府)서 북쪽 12리 떨어진 오도산(五圖山) 남쪽에 있다.
큰 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장(丈)이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8년(634)에 만들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
집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듯하다. 뒤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을 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재목은 다 옛것을 사용하였다.

燕飛院佛寺 在府西北十二里 五圖山南 因立石作佛像 高十餘丈 唐貞觀八年作 六間閣以覆地 飛夢褾渺翼然 苦半空厥後再次重創棟梁之材皆因舊焉
        永嘉誌 券六 佛宇條

위의 기록에 따르면 석불과 전각의 조성 연대가 634년(신라 선덕여왕 3년)이며, 전각은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후 두 차례 중창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재목은 옛것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가지가 편찬될 당시인 1608년에도 보전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의 이름은 없고 연미원불사라고만 기록하고 있어서 사찰의 이름은 이미 실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보덕법사(普德法師)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동사를 세웠고, 적멸·의응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고,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고, 사대는 계육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創 創金洞寺 寂滅 義融ニ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 大原等 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三國遺事 券第三 寶藏奉老 普德移庵條

이 기록에 나타나는 연구사는 바로 연미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세한 기록임으로 전해오는 전설과 제비원 미륵불을 덮은 전각을 짓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기둥을 세운 흠과 주춧돌을 통하여 제비 모양의 누가 불상과 앞면 바위까지의 공간을 덮고 있어서 석굴사원 형식을 띠고 있었으며, 이 공간이 법당이었고 법당의 위치가 바로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이 연구사라 붙였다고 전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 승 보덕법사 외 11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명덕이 634년에 불상을 새기고 '연자루'라는 전각을 세워 연구사를 창건하였다.

불상을 덮고 있는 전각이 제비모양과 흡사하여 연자루라 하였고,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제비꼬리 쪽에 있어서 연미사(燕尾舍)라 불렀으며 제비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법당이 있어서 연구사(燕口寺)라 하였다.

연구사가 있는 산을 오도산(五圖山)이라 하였는데 오도는 불상, 연자루, 삼층석탑, 연미사. 소나무이며 이 다섯 가지가 조화 있게 어울려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이란 뜻이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연구사는 페사 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만 남아있었다.
이 석불도 온전하게 본래의 모습을 보존하지 못하고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 후에 머리 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사찰의 이름도 실전되어 연비원불사로만 전하고 있었다. 일제시대때 봉정사의 신도 모임인 등촉계의 일원인 거사림(居士林)에서 연미사의 창건을 발의하여  옛 터에 3칸 법당을 새로 신축하여 연미사라 칭하였으니 이때가 갑술년인 1934년이었다.

해방이후 1947년 5월 신도들의 시주에 의하여 칠성각 1칸을 새로 지었으나 이것도 새마을 운동 때인 70년대 초에 무허가건물 철거령에 의거하여 철거 되었고 1962년 요사채 1동이 신축되었다.

법당인 대웅전은 협소하여 1978년 증축하였는데 기존의 정면3칸, 측면1칸의 대웅전을 정면4칸, 측면2칸으로 증축하였고 1986년 단청을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연미사와 제비원석불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오고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가) 燕(연) 처녀의 哀話(애화)

옛날 옛날 신라시대 古昌(고창)이라고 불리우던 옛 安東(안동)에 여관(당시에는 院이라고 하였다.)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8살 때 부모를 여의고 심부름을 하는 燕(연)이라는 예쁜 처녀가 이었다.
연이는 인물이 예뿔 뿐 아니라 마음이 고와서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후대와 적선을 다 했다.
방에 불도 따뜻이 넣어 주고, 밥도 후이 담아 주었으며, 빨래까지 빨아주는 연이는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자는 것이 아니라, 열심으로 글을 익히고 내일은 어떻게 하여 손님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도와드릴까 하는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불심도 대단해서, 새벽에 일어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가리지 않고 매일 매일 부처님 앞에 나가 염불을 하고, 부처님이 조성된 암벽 주변을 깨끗이 처소를 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치성을 드리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의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리하여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 착하고 부지런한 연처녀의 고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곳 건넛마을에 놀부보다 더 심뽀가 나쁜 부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광 마다 쌓인 많은 곡식을 썩히면서도 불상한 이웃에게 한톨도 배풀줄 몰랐고, 동냥오는 거지에게는 쪽박까지 깨트러 버리는 심술을 부렸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들을 늘 두들겨 페기나 서럼을 주기가 일수 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자는 갑자기 병을 얻어 실신하고 말았는데, 그가 쓰러지자 험상궂은 염라국 사자가 나타나서 그를 이끌고 염라대왕 앞에 나가게 되었다.


         <연미사 산신탱화>

그를 한참 노려보던 염라대왕은 「너는 아직 사바세계의 인연이 다하지 않었으니 혹 공덕을 쓰면 뒤돌아 갈수도 있으리다.」하였다.
부자는 「갑작스레 잡혀온 몸이라 아무것도 갖은것이 없으니 무엇으로 공덕 하오리까?」라고 하였다.
염라대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듣거라, 네 집 광속에 쌓아둔 재물 따위는 여기 이 명부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바세계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오면 그들을 위한 광이 이미 이곳에 하나씩 마련되어 있다.  
저것이 네 몫의 광이며, 다른 사람들의 광도 저기 있으니 둘러보아라.」
부자는 사자에게 끌려 자기 몫의 광을 구경하였더니, 냉기가 감도는 텅빈 광속 한쪽 구석에 볏 집 새 묶음만이 댕그라니 놓어 있을 뿐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반면 연처녀의 방에는 금빛 찬란한 온갖 보석하며, 곡식이 든 자루가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본 부자는 자기의 과거가 후회스럽고 현실의 허무함을 깨달았다.
다시 염라대왕 앞에 엎드린 부자는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여기 제몫의 광에는 볏 집 세 묶음뿐이니 어찌 하오리까.
염라대왕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듣거라, 빤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물거품 같은 인생을 살면서 탐욕의 포로가 되어 제물만 알고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았으니 너는 너의 죄 값을 받을 것이다.

인과응보의 순리대로 너는 네가 지은 죄 값으로 장차 소가 되어 인간세상보다 몇천만 갑절이나 길고 긴 세월을 힘겨운 일에 시달려야 하는데, 광속에 볏 집은 너의 멍애 줄을 만들 집이다.
네가 괄시하던 연처녀는 장차 이곳에 오면 온갖 보물과 재물을 갖고 영원히 행복을 누리도록 마련되어 있다.
이는 그 처녀의 착한 행실에 대한 값이니라.

그런데 너에게 그 연처녀의 보물을 빌려 주도록 할 것이니 다시 사바 세상에 되돌아가거든 연 처녀에게 갚도록 하여라.」
대왕이 말을 듣고 부자는 연처녀의 재물을 빌려 쓰기로 하고 다시 세상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크게 반성하고 뉘우쳤다.
다음 날 부자는 연처녀를 찾아가서 저승에서 생긴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저승에서 연처녀의 재물을 빌린 대가로 자신의 재물을 연처녀에게 많이 나누어 주었다.

뜻하지 않는 재물을 많이 받은 연처녀는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리라 마음먹었다.
평소 언덕위에서 비바람에 맞아가며 서있는 부처님을 늘 안타까이 여기든 터라, 당시 유명한 道詵國師(도선국사)를 찾아가서금 석불을 중심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재물을 몽땅 바쳤는데, 이 공사가 막대하여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상을 덮는 6칸의 전각이 완성되어 공중에 나래를 편것처럼 찬연히 떠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역사를 다 마치는 마지막 날 밥을 이고 그 높은 바위 위로 오르든 燕(연)처녀가 그만 바위에 미끄러져 열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 온 몸이 부셔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홀연히 한 마리의 제비가 되어 하늘 높이 치솟아 어디론가 날아 가버렸다.
그리하여 「제비가 날아갔다.」라는 뜻으로 燕飛寺(연비사) 혹은 燕尾寺(연미사)라 하고, 그 여관(院)을 燕院(연원) 혹은 燕飛院(연비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말로 「제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 미륵불의 목을 벤 이여송

제비원의 미륵불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 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한다.
그것은 李如松(이여송)이가 미륵불의 머리 부분을 칼로 쳐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온 이여송은 전란이 평정되자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찬장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만한 地穴(지혈)을 찾아 地脈(지맥)을 끊고 쇄말뚝을 박았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저 앞 제비원에 큰 미륵불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필경 저 미륵불의 조화 때문에 말이 못 움직인다고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미륵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말발굽이 떨어져 길을 갈수 있었다.
칼로 벤 까닭에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어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재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모양으로 불룩불룩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
그래서 지금 보면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 둔 것 같이 보인다.




    다) 제비원 미륵불을 조각한 형제
제비원의 미륵불 조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 어떤 형제가 一世(일세)에 뛰어난 조각가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현제는 서로 뒤질세라 늘 쉬지 않고 조가가하는 일을 계속하던 중 문득 일세에 제일가는 조각가는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태가운데 어느 한쪽이 당대 제일의 조각가가 된다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둘째가 될 수박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는 의논한 결과 서로 당대 제일의 조각가가 되려고 하나, 필시 하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서로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은 죽기로 하였다.

내기는 미륵불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기가 시작되자 동생은 훌륭한 미륵불을 만들려고 열심히 돌을 갈고 다듬었으나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날이 되자 그날 까지 동생은 미륵불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형은 미륵의 머리만 조각해서 바우이 위에 가져다가 얹어 훌륭한 佛像(불상)을 만들었다.
동생은 내기에 진 까닭에 죽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도 동생이 만든 조각은 개천가에 굴러다닌다고 한다.
지금 제비원 미륵불상의 목 부분을 보면 이어서 만든 흔적이 있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이것는 형이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붙었기 때문이다.
        (유중선. 영남의 절설, 형설출판사. 1971. 206면 )




 
   라) 제비원과 법룡사의 절짓기 내기

안동시에 法龍寺(법룡사)라는 고찰이 있었다.
6·25때 타버려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복원한 새로운 절이 들어서 있다.
옛날 건물은 신라 때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이는 법룡사 뒷편에 千年都邑地(천년도읍지)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로보아 추정한 것이다.
옛날에는 다래 덩굴이 절 둘래를 에워싸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왔다고 한다.
법룡사와 제비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 절을 잘 짓는 두 목수가 살고 있었다.
기술이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서로 경쟁의식이 강했으며, 서로 이 나라의 제일가는 대목이 되려고 늘 애썼다.
그러던 참에 법룡사와 제비원 절을 지으면서 내기를 하기로 했다.
「자네가 법룡사를 먼저 짓느냐, 내가 제비원을 먼저 짓느냐 내기를 하세. 그래서 누가 이 나라 제일의 목수인지를 판가름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는 자신 있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일세. 내가 법룡사를 먼저 지어서 뒷편에다가 千年都邑地(천년도읍지)라는 현판을 달면, 아마 그 瑞氣(서기)가 제비원 까지 뻗칠 것이니 그렇게 알게.」
「자네 큰소리치지 말게. 나는 제비원을 법룡사 보다 먼저 짓고 한티재를 넘어 올 터니 두고 보세.」
이렇게 약속을 하고 각자 열심히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제비원 절을 짓는 사람이 절을 다 짓고 한티재 위에 막 올라서 보니, 법룡사 뒤편에 千年都邑地(천년도읍지)라는 현판 글씨가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 瑞氣(서기)가 한티재에 까지 비친 것이다. 법룡사를 짓는 대목이 경쟁에서 이긴 까닭에
「예, 이놈아!」 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는 것이 었다.  
재비원 절을 지은 대목은 자기가 경쟁에서 진 것을 깨닫고
「내가 자네한테 졌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내가 지은 절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내 이름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은 절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밑으로 뛰어내렸다.
지붕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제비가 되어서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절의 이름을 제비가 되어서 날아갔다는 뜻으로 燕飛寺(연비사)라고 지었다.
그때의 법룡사는 불타 없어졌지만 아직도 제비원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마) 미륵불을 함부로 다룬 천벌

미륵불의 머리는 어느 때 어떻게 파손되었고 또 언제 복원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왜정말기에 어느 신도가 낡은 불상의 목을 석회로 땜질을 하고 목 부분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석회를 칠해서 염주를 두른 듯이 만들어서 부쳤다.
그러던 가운데 장난기가 발동하여 무엄하게도 입술에 붉은 칠을 하여 본래의 거룩한 모습을 다치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서 순사에게 잡혀가서 모긴 고문을 당하고 오래도록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칠한 입술의 붉은 칠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며, 미륵불의 얼굴이 흰 것은 많은 신도들이 그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의 마음도 또한 미륵불처럼 넓고 평안하게 해 달라고 하며 어루만져서 희어졌다고 한다.  



          <대웅전에 안치된 불상>




           <연미사의 본존불인 아미타불.>


마) 미륵불을 욕되게 하고 천벌을 받은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어떤 청년이 제비원에 소풍을 갔다.
함께 간 친구들과 술도 한잔하고, 노래도 부르고 자못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러던 중 趙氏(조씨) 썽을 갖인 한 청년이 만용을 부려 미룩불 어깨위에 올라가서 미륵불의 얼굴과 몸에 소변 세례를 퍼부었다.
함께 간 친구들은 깜짝놀라 그를 만류하였으나 술에 취한 그는 「이 따위 돌부처가 뭔데...」하며 호기를 부리며 막무가내였다.
친구들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구경만하다가 저녁이 되자 모두들 한티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밤, 미륵불 얼굴에 소변을 본 총각은 이상하게 붓두등이 아파왔다.

다음 날 부터 부자지가 부어올라 고통이 몹시 심했는데 아무약을 써도 듣지 않고, 어떤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 병으로 죽고 말았다.
함께 놀로 갔던 친구들은 그가 미륵불의 축(저주)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했다.
        (안동시 평화동 조여사 이야기 )



      <미륵불에게 자리를 빼앗긴 욱바위.>


    바) 미륵불에게 자리를 빼앗긴 욱바위

제비원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만큼 전설도 많다.
이천동을 넘어가면 욱바위골이라고 있다.
제비원에 미륵불이 조성되기 전에 큰 바위 둘이 서로 그 자리에 가서 坐定(좌정) 하려고 하였으나 지금의 미륵불이 먼저가서 좌정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바위 하나는 그리로 가지 못하고 지금 욱바위골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미륵불은 자리를 먼저 잡았기 때문에 佛徒(불도)들이 받들어 모시는 미륵불이 되었는데, 이 바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바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것을 원통하게 여긴 이 바위는 울면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사람들에게는 그 바위를 위는 바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우는 바위라고 해서 「욱바위」라고 부르게 되었고, 「욱바위」가 있는 곳을 욱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륵불 앞으로 가는 좁은 통로>




            <미륵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



3. 建築物(건축물)의 構成(구성)과 配置(배치)

오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연미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된 작은 사찰이다.
연미사는 대웅전이 정면3칸, 측면1칸의 규모였으나 협소하여 1978년에 증축하여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대웅전 옆에 칠성각이 정면1칸, 측면1칸의 크기로 있었으나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으로 무허가 건물철거령에 의거하여 철거된 후 다시 짓지 못하고 있다.


           <미륵불에게 기도하는 공간. 앞에 미륵불과 뒤에 바위 사이에 좁은 공간이 바로 미륵불에게 기도하는 허락된 공간이다.>

요사채는 대웅전 우측에 정면4칸, 측면2칸의 크기이며 신도들이 사용한다. 건축물의 건립 년대가 오래되지 않았고 특징적인 양식을 갖춘것도 아니어서 간단하게 기록한다.

대웅전은 시멘트로 미장한 기단위에 각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며 3량가구이다.
정면 4칸, 우측면2칸, 좌측면 1칸에는 금판이 있는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정면 4칸 중 우측 1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3칸이 법당이다.

법당 내부에는 정면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중앙에는 석가모니블 만 모시고 좌측에 신중탱화와 우측에 칠성탱화, 산신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신중탱화는 가로68cm, 세로 124cm 크기이며 광서 6년(1880년, 고종17) 경신 4월28일에 제작한 것이다. 칠성탱화는 가로182cm,세로122cm 크기이다.
산신탱화는 가로90cm, 세로122cm 크기이며 모두 근래작품이다.

석가모니불은 높이 120cm정도이며 뒤에는 가로 182cm, 세로122cmョ크인 후불탱화가 봉안되어있다.

불구로는 지름 36cm, 높이65cm인 소종 1점이 있다.

대웅전은 1978년 증축이 되었고 단청은 1586년에 하였다. 대웅전의 우측에 있는 요사채는 정면4칸, 측면1칸의 크기며 향집이다. 구조는 북측에서 부터부엌방, 방, 방의 형태이며. 정면 3칸과 우측면 1칸에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미륵부처님께 가는 길가에 진열된 많은 동자상과 불상>

(이 기사는 지금의 신축 건물이 신축하기 이전의 구 건물에 대한 기록인데, 연미사의 역사를 알기위해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새로 잘 지은 법당과 객사등은 이 모든 낡은 건물의 단점을 보완하여 잘 조성되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 한번 참배하시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기 권하는 바이다.)

4. 소장문화재

가.石佛像(석불상)
지정명칭: 이천동 석불상(泥川洞 石佛像)·
보물 제115호

연미사의 서쪽 끝부분, 영주로 향하는 국도 바로 옆에 우쪽서 있는 고려시대 초기의 마애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12.38m이다. 높이 9.95m, 너비7.2m의 거대한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몸체를 만들고 머리는 2.43m 크기인 다른 돌을 조각하여 올려놓은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파손되었으나 앞쪽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머리는 소발이 높은 육계를 갖추고 있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가 양각되어 있다.

얼굴은 아래턱이 아주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4각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눈썹은 이마의 양쪽 끝으로부터 길게 호선을 그으며 이어져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은 조금도 들어져 나온 눈두덩에서 수직으로 깎여 들어가 있어 위엄이 서려있고, 눈은 조각의 수법이 크고 풍만하면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미사 신중탱화>


코는 눈썹과 눈 사이에 큼직하게 조각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게 보인다. 눈썹과 눈을 크고 풍만하게 조각하여 상대적으로 코의 크기가 가려져서 적당한 크기로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입의 모양은 두툼한 입술이 가지런하여 근엄하면서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전체적인 얼굴조각수법은 크고 풍만한편이며 각선이 예리하면서도 딱딱한 느낌을 주어 자비로운 인상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크기 때문에 중압감을 자아낸다. 불상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얼굴윤곽이 분명하고 깨끗하며 육감적인 선의 흐름이 단아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주어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목에는 횡으로 그어진 三道(삼도)가 뚜렷하며 선을 따라가면서 목걸이로 보이는 돌기가 둘러져있다.

머리와 목 부분 까지도 윤곽이 뚜렷하게 조각되어있지만 몸체부분은 천연암석에 단순하게 선 새김 되어 있다. 부처의 거대한 몸체는 몇 줄기의 선으로 조형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왼쪽어깨에서 길게 내려오는 몇 개의 옷 주름이 오른쪽에서 직선으로 흘러내린 법의자락과 서로 교차되어 접혀있다.

거의 노출된 가습 밑으로는 內衣(내의) 자락이 수평으로 표시 되어있다. 몸체 위쪽의 수선들과 몸체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횡선들은 가슴 아래쪽에 직선으로 그어진 행선에 의하여 분할되면서도 어울려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몸체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모양이 분명하지 않다. 몸체를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도 거의 식별이 되지 않고, 법의의 제일 아래쪽은 거의 불분명하여 발의 모습이나 옷의 주름을 분별 하지 못한다.
양손은 얕은 부조로 오른손은 석불 후면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에 장지와 엄지를 맞댄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고 있다.

석불상의 앞에는 불상을 막아 서있는 또 다른 바위가 있다. 석불상을 막고 있는 이 바위는 석불이 새겨져있는 바위의 절반 정도의 크기이지만 첫 부분은 상당히 넓은 평평한 면을 가지고 있고 그 바위 위에는 불단으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응도로 사용 한 것인 지 분명하지 않은 사각형의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사각형의 널찍한 들인데 주출들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원래 석불상을 조성한 후 비바람으로부터 부처를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지어졌다는 전설로 보아 이 돌을 주추 돌로 추측하기도 한다.

석불상을 막아 서있는 이 바위는 석불상과 3m정도 떨어져있다. 연미사 대웅전에서 석불상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석불상 앞에는 마치 석굴사원과 같은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동쪽 바위에 석불이 조각되어 서향 하고 있고 그 앞에는 또 다른 바위가 서쪽에 막아 서있으며, 북쪽은 인위적으로 벽을 쌓아 전체적으로는 ㄷ자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공간은 4평정도의 크기이며 그 안에 들어가면 완전히 차단된 하나의 방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불상 앞을 막고 있는 바위에는 1918년에 세운 연미사 중수비가 세워져있다. 크기는 가로125cm, 새로42cm이다. 석불상의 조성 시기는 신라 말에서 고려초기로 추정 된다.



            <미륵불 뒤에 있는 3층석탑>



삼층석탑
삼충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석탑이며, 높이는약 3m이다.
이 탑은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 후방의 암벽 위에 있는 단성기단(單成基壇)의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기단부와 신부(身部)의 구성 비례가 맞지 않아 부조화스러워 원재(原材) 아닌 타부재(他部材)가 섞여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초층개석 이상은 조법(彫法), 결구(結構)가 명확하고 완전한 상태이며 상를부(相輪部)가 결실(缺失)되었다.

일상적의예
일상적인 의례는 사찰에서 행하는 의례가 행사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례는 조석예불로 출가승과 신도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예이다.
아침 예불시간은 새벽4시경이며, 茶器(다기)에다 맑은 물을 올린다. 저녁예불에는 물을 올리지 않고 향을 올리며 예불을 한다.

연중 세시의례
불교의 4대명일은 음력 2월8일 출가일, 2월 I5일 열반일, 4월8일 탄신일과 12월8일 성도일이다.



          < 칠성각이 별도로 없어 칠성탱화를 대웅전에 모셔노았다.>

이중 탄신일인 4월 초파일행사가 제일 크다.
2월 8일은 생로병사를 해결하기위해 왕자의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를 닦으려 출가한 날이다.
I5일은 석가의 열반일이다. 이때는 참선으로 봉양을 한다.
4월8일은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석탄일을 기념하고 신도들은 등을 켜는행사를 한다.
이외에 칠월칠석에 열리는 칠석기도, 8월에 하는 추석기도, 10월에 하는 상달기도, 11월에 열리는 동지기도가 있다
.
12월8일은 성도절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이다. 초와 향을 올리고 분향하며 삼귀의례라고 해서 불교의 삼보인 불법승에 귀의 한다는 공양으로 예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외우고 찬불가를 부른다.

연미사의 경우에는 다른 사찰과 비교해서 특이한 행사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음력 3월3일 삼짇날 행사이다.
이날은 불교의례에 있어서 특별한 내용은 없으나 연미사의 경우에는 제비와 연유된 여러 가지 전설로 인하여 삼짓날행사를 성대하게 치룬다.

이날에는 일반신도들이 모두모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행사를 한다.
삼짓날 행사는 법당이 아닌 석불상앞에 상을 차리고 신도들이 기도를 하며 공양한다.



            <연미사 동편에 조성된 넓은 공원>

****제비원 미륵불의 무서운 신통력.***

<이 편지글은 2012년 11월 5일 연미사 주지 스님께 보낸 내용입니다. 나는 미륵부처님게 사죄하는 뜻에서 나의 경솔함을 반성하고 이 편지를 세상에 공개 합니다.>


연미사 보림 스님께

나는 어제 실로 무서운 부처님의 영험을 체험 하였습니다.
생각하니 부끄럽고 부처님이 두렵습니다.

부처님의 영험은 기상천외의 어떤 가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적인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사진을 참 잘 찍는 사람입니다.
60여권이나 되는 나의 저서에 들어가는 삽화사진은 전부 내 손으로 찍었고, 80평생을 살면서 수 천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별로 실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거의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재비원 미룩 부처님의 사진을 찍을 때, 부처님의 좋은 앞면 말고 뒷면도 찍어서 세상에 공개하려고 생각하고, 산에 올라가 몇 판이고 찍었습니다.
카메라에 나타는 보기 창에서 잘 찍힌 것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 작업을 하니 이게 왼 일입니까?
그렇게도 잘 찍은 사진이 다 망가지고 하나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부처님이 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뜻에 맞지 않는 짓을 한 탓에 부처님께서 전부 지워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그날 애써 찍은 모운사와 풍산 중대사의 사진까지, 내게 내린 벌로 모두를 지워 버렸습니다.

스님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래도 부처님께서 내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은 그간 내가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덕과, 앞으로도 더 시키실 일이 있어서 다치게 하지는 안았는 듯 합니다.

진실로 참회 하고, 그리고 부처님께 용서를 빈 다음 다시 가서 이번에는 부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좋은 사진을 찍어 연미사 홈에 첨부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편지를 세상에 공개해서 신통한 제비원 부처님의 위신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한 나의 반성문으로 하겠습니다.



            <법당 기둥을 감고 부처님을 수호하는 용>



             <용은 닷집에서도 도사리고 부처님을 수호하고 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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