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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안동의 사찰 遊夏寺(유하사)

청남이메일
안동의 사찰 遊夏寺(유하사)

1. 위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79번지.
    (054)- 857- 0076

와룡면은 영가지에 의하면 부동(雰)과 부북(府北)이라 칭하였다. 그 후 광무(光武) 10년에 동선(東先)·북선(北先)에 면장을 두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두 면을 합병하여 와룡면으로 개칭하였다. 이 면에는 5번 국도가 면을 가로지르며 도산, 녹전, 예안면을 연결하는 중심지이다. 면 소재지는 가구리이며 안동에서 8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와룡면 농협 앞길에 있는 유하사 안내판. 안동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다가 이 안내판이 지시하는 대로 우회전해서 약 2km가량 가면
            유하사가 있다.>


유하사는 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뻗어있는 919번 지방도를 따라 예안면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살앞”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조선조(朝鮮朝) 단종(端宗)때 생육신(生六臣)을 숭배한 우송정(友松亭) 선생이 입향 하여 우송정(友松亭)을 창건한 후 송정리(松亭里)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우송정(友松亭) 지선생표충비(池先生表忠碑)가 있다.



        <와룡면 사무소에서 달려 오면 오른 쪽에 돌로 깎아 세운 유하사 안내석이 또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해서 천천히 가면 약 500m 정도
          가면 유하사에 도달하는데 그 길은 비교적 좁은 도로이니 교차하는 차량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간다.
          유하사는 산에 있는 절이 아니고 평지에 있는 사찰이므로 접근성이 매우 좋아 쉽게 참배 할 수 있는 편안한 사찰이다.>
  


이 곳 비각 앞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뒷골에 유하사가 있다.

유하사는 해발 460m인 와룡산(臥龍山)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2. 유래와 전설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인 유하사는 1897년(丁酉)에 창건하였다.
창건부터 현재까지의 연혁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단계는 최초 창건한 월선보살(月仙菩薩)의 초기 건립과정이며, 두 번째 단계는 무심대사(無心大師)의 포교활동시기이고, 세 번째 단계는 1969년에 무심대사의 뒤를 이은 묘행(妙行) 스님의 중흥기로 나눌 수 있다.
유하사는 와룡산(臥龍山)의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지역은 풍수지리설로 보면 행주형(行舟形)에 속하는 吉地(길지)이다. 사찰이 위치한 와룡산은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龍(용)이란 신령스러운 영물이며 바람과 비, 구름을 몰고 다니며 무궁한 풍운조화를 부리는 동물로 상징된다. 따라서 용은 물과 친숙하고 물에서 노닐다가 승천하여야 적당한 비와 바람과 구름을 주어 인간 세상이 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하사의 주변 지형은 용과 연관된 여러 가지 풍수지리의 비보로서 조성이 되었다.

사찰의 이름도 놀유(遊) 자(字)에 여름하(夏) 자를 써서 사찰명으로는  잘 쓰지 않는 특이한 명칭을 쓰고 있다. 이것도 이곳의 지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와룡산의 지형이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므로 지기가 좋지 않아 용이 힘차게 움직이고 활발하게 활동하여 승천할 수 있도록 사찰 경내의 세 곳에 우물을 파서 용이 활동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놀유자에 여름하자를 써서 유하라 이름 짓고 용이 승천하고 땅의 복록을 불어 地氣(지기)를 강하게 해 줌으로서 마을과 사찰이번영할 수 있다고 유하사라는 이름 붙였다.



          <우측으로 접어들어 조금 가면 높지 않는 산이 있는데 그 산 기슭에 월선보살 기녀비와 무심선사 부도비 및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찾아간 날은 눈이 쌓여 부도도 추워보였다.>        



            <위에 비석과 부도 사진인데, 이 사진은 내가 옛날 여름철에 찾아 갔을 때 때 찍은 사진이다. 월선 보살님 고히 잠드소서.>


유하사는 월선보살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정유년 8월에 법당 3칸을 짓고 미륵불을 모시고 삼정산유하사(三井山 遊夏寺)라 명하였다. 월선은 신령스러움이 있어 기도로 많은 병자를 치료하였고 소망을 비는 신도들이 소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어 신도가 많이 늘어나고 사세를 불려 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들은 오히려 모두 일적 죽게 되는 고난을 겪는다.

이는 자신의 업보를 딛고 원력으로 기도하면 신도들은 오히려 소원성취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월선보살의 뒤를 이은 무심대사는 산천을 헤매고 방랑하다 이곳에 닿게 되고 월선의 보살핌으로 1925년 을축년에 출가하게 된다.

무심대사 때에는 법당을 중수하고 요사인 중향각을 신축하게 된다. 무심대사의 법륜에 의하여 유하사는 많은 신도들이 찾아들게 되니 사찰의 세는 크게 늘려나갔다.
그러나 무심대사가 1960년에 열반에 들게 되자 급격히 신도들이 떨어져 나가고 1969년 묘행(妙行)스님이 유하사로 들어오기 전 9년 동안 폐사되게 된다.

묘행은 1969년 3칸 법당을 5칸으로 중수하고 해탈문과 요사인 동선당을 신축하였다. 또 경내 중정에 약왕보살(藥王菩薩)을 세운 후 대웅전 신축과 선방을 신축하였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넓은 유하사의 뜰이 보이고 거기 약왕보살의 석상이 보인다. 뒤에 두 그루 커다란 소사무를 등지고 우리들을 맞는
        약왕보살은 우리의 인생고를 모두 감당해 주시는 듯 자비로운 모습으로 굽어 보신다.>


3. 건축물의 구조와 배체

살앞마을에서 유하사로 들어가는 길 좌측 산비탈에 월선보살 기녀비와 무심선사 부도비 및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무심대사 부도비는 자연암반위에 비신과 이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도는 시멘트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37cm 정도 크기의 부도를  올리고, 1987년 12월 6일 「무대선사지탑」이라는 명문을 적어 세웠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외편 대나무 울에 해우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비구니 사찰답게 정답게 디자인되어 미소를 품게한다.
          원주스님의 미적감각의 발로일까.>



        <유하사의 종무소로 사용되는 이 두 건물은 東禪堂(동선당) 衆來閣(중래각)인데 유하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유하사를 방문하는 신도들은 여기서 차를 마시며 스님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기도하고 소원을 말하기도 하는 곳이다.>



        <東禪堂(동선당) 현판 글. 동방에 있는 선방이라는 뜻이다.>



        <衆來閣(중래각) 현판 글. 많은 대중이 오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눈속에 묻혀있는 유하사의 장독. 장독에는 종일 해가 들면 장맛이 좋다하는데 이 장독대에는 종일 해가 잘 들어 유하사 장맛은 과연
          일품이라고 생각되는데, 한번도 공양을 받을 수 없어서 아쉽게도 장맛을 볼 기회가 없었다.>


이 부도를 지나 200m 정도 들어가면 유하사의 법기헌(法起軒)을 마주한다.

법기헌은 평소에 문이 닫혀 있어 안을 잘 들어 다 볼 수가 없다.

그 바로 앞에 해탈문(解脫門)이 있고, 해탈문을 들어 서면 오른쪽에 선방이 새로 신축되었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대웅전, 용화전이 배치되어 있다. 옛날에는 대웅전 옆에 요사가 이었는데 지금은 헐어리고 서편으로 넓은 대지를 확보하여 그 곳에 요사를 지어 공양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대웅전 앞 중정에는 약왕보살 입상이 세워져 있다가.



        <웅위한 유하사의 대웅전. 팔작지붕에 아름답게 단청이 잘 되어 볼수록 거륵하며 신심이 저절로 끓어 오른다. 옛날에 갔을 때 공사를
          하느라 어지러웠는데 정말로 대단한 역사를 잘하여 불교계의 큰 보물이 또 새로 생겨난 듯하다. 원주스님의 능력과 월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대웅전 현판 글씨>



         <대웅전 안에 모신 유하사의 석가모니불과 두 협시보살.>



       <대웅전 안에 신중탱화>



           <대웅전 서편에 있는 영단. 스님들의 정성어린 천도로 모두 극락왕생 하셨을 것이다.>



           <대웅전 천정에 아름다운 3중의 닫집과 부처님을 수호하는 용의 조가.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가 大雄殿(대웅전)

이 건물은 오래 전부터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아름답고 거륵하게 완공이 되어 있다. 대웅전은 서남향의 좌향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이다. 110cm 정도 높이의 다듬돌 기초위에 세됐다. 기단 중앙과 좌 ·우 측면에는 법당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놓여 있다. 증앙계단의 난간에는 법륜이 화강석에 조각되어 있고 좌·우 계단의 난간에는 옴자가 쓰인 화강석이 올려 있다.

옴자는 사찰의 재앙을 막아 법통을 이어가고 사찰 수호기능을 한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양 글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불교에 있어서 용은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네 가지 신령스러운 영물로 삼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리며 하늘과 바다를 자유스럽게 넘나들 수 있는 용이야 말로 부처님을 수호할 수 있는 영물이기에 법당의 안과 밖에 많이 장식한다.
공포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다. 정면 5칸 중 어칸이 조금 더 큰 규모이고 좌·우 두 칸씩의 협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칸에는 꽃살문이 아름답게 조각된 여닫이문이 나있다.

전면의 중앙 기둥에는 바깥쪽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안쪽에 몸통과 꼬리부분이 조각되어 있어서 장중함과 위엄이 서려있다.
법당의 전면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십방중)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내일절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汪洋覺海竗難窮(왕양각해묘난궁)
衆會圍繞諸如來(중회위요제여내)
廣大淸淨妙莊嚴(광대청정묘장엄)

<해>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두루 하시니
        삼세여래가 모두 한결같으시네.
        광대한 서원은 구름같이 다함이 없고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네.
        모든 중생들 모여 부처님 에워싸고 있네
        장엄하고 오묘한 그 모습 광대하고 청정하도다.

법당의 내부 중앙에는 175cm 정도 높이의 불단을 조성하여 부처님을 모셨고 양측 면에는 130cm 정도의 높이로 2층 불단을 설치하였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을 가운데에 봉안하고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실천적 특성이 강조된 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반야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지혜의 상징으로서 석가모니의 지덕(知德)과 체덕(體德)을 맡아서 석가모니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돕기 위한 보살이다.
보현보살은 시방세계에 널리 나타나는 방편을 갖고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석가모니불의 이(理)·정(定)·행(行)의 덕을 맡은 보살로서 석가모니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도우며, 특히 중생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덕을 갖추고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탱화로도 봉안되는데 이때 문수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에 비해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탄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더불어 석가모니불의 협시불로 석가삼존을 이룬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가구가 은폐되어 있으며 불단 위 닫집은 보개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바닥은 마루 바박이다.



          <대웅전과 그 앞에 있는 두 석등. 어두원 미혹의 세계에 빛을 밝혀 줄 영원한 등불이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의 동기가 된 사문유관을 태마로 인생의 生老病死(생로병사)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뜻으로 그린 벽화이다.
           좌측 상단에 아기가 태어나는 그림,
          우측 상단에 사람이 늙어가는 노인의 그림,
          그 아래 병들어 누운 그림,
          좌측 하단에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그림이 있고 그 중아에서 인생고를 깊게 번빈 하는 젊은이의 그림으로 이룩되어있다.>




         <이 벽화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해서, 중생 제도를 위해 세상에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아기를 좋아하는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포대화상」은 중국의 승려인데, 이름은 契此(계차)이고 明州(명주) 봉화현 사람이었다.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늘 찡그리며 깊은
           주름이 잡혀있고, 커다란 배는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이 일정치 않고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잘 지껄였으며,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잘 눕고, 졸리면 어디서라도 잠을 잤다.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걸머메고 다니는데,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그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는데 얻은 물건도 모두 자루 속에 넣었다.
          먹을 것을 주면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자루 속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포대화상」이라고 붙였다. 특별히
         날씨 예측이나 사람들의 吉凶禍福(길흉화복)을 잘 예언하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고 계속 어디론가 방황하면서 늘 길을 걸어다니며 일생을 보냈다.
          그가 남긴 게송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一鉢千家飯(일발천가반)        바룻대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으며
        孤身萬里遊(고신만리유)        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靑日覩人少(청일도인소)        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렵고
        問路白雲頭(문로백운두)        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기 916년 3월 명주 岳林寺(악림사)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入寂(입적)하였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불 중에도 진짜 미륵불
        分身百千億(분신백천억)        백천억가지로 몸을 나투어
        時時示時人(시시시인)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그때서야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化現(화현)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鹿野傳法相(녹야전법상)
           보리수나무 밑에서 도를 깨쳐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제일 먼저 향한 곳이 녹야원이다. 거기에는 처음 함께 수도하던 다섯 비구들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행주의를 버린 태자와 헤어져 녹야원으로 가서 수행하고 있던 다섯 수행자는 어느 날 태자가 자기네들을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태자가 성도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그들은 서로 태자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태자가 곁에 이르자 자기네들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자리를 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阿若憍陣(아약교진) 등의 처음으로 가르침을 폈으니 이것을 佛法(불법)의 첫 펼침, 즉
          初轉法輪(초전법륜)이라고 한다.
          이때 부처님은 5비구에게 출가 수행자는 慾樂(욕락)과 苦行(고행) 두 극단을 버리고 中道(중도)를 취해야 할 것을 가르쳤으며
           四聖諦(사성제)의 법문으로서 그들을 깨우쳐 진리의 세계에 눈뜨게 하였다.>



         <흰쥐와 검은 쥐의 비유
           옛날 어떤 사람이 큰 들판에 나갔다가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그는 크게 놀라 뒤도 돌아 볼 겨를 없이 도망쳐 가다가 들 한 복판에 있던 옛 우물터에 뻗어 내려간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는 또 다른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 네 구석에서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우물 한복판에서는 무서운
          독룡이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위에서는 미친 코끼리가 발을 둥둥 구르고, 밑에서는 용과 뱀이 혀를 널름거리니 오도 가도 못한 나그네는 오직 하나의 생명선인
          등나무 넝쿨에만 몸을 의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서로 번갈아 등나무 줄을 쏠기 시작하였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머리 위에 큰 나뭇가지에는 몇 마리의 꿀벌들이 집을 짓느라 앉았다 날았다하는데 때마다 꿀방울이 떨어져서 그것이 입에
          닿았다. 그는 꿀의 단맛에 취해서 모든 위험을 잊고 그 꿀맛에만 도취되었다. 그러는 동안 대지에는 난데없이 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 賓頭說經(빈두설경) 속에 설화」 」
          여기서 넓은 광야는 無明長夜(무명장야), 어떤 사람은 인생, 코끼리는 無常(무상), 옛 우물은 생사, 등나무 줄기는 명줄,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뱀과 독룡은 죽음, 벌은 삿된 생각, 너덧 방울의 꿀은 5욕, 불은 늙고 병드는 것 등을 비유한 말이다.>




         <雪山童子(설산동자)의 求法(구법)
           설산동자는 雪山大士(설산대사)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불이 아득한 과거세에, 菩薩因行(보살인행) 할 때의 동자로 눈 쌓인 산에서
           수행하던 시절의 이름이다.  
          설산동자는 오로지 해탈의 도를 구하기 위해서 가족도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고 설산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帝釋天(제석천)은 설산동자의 이와 같은 구도의 뜻을 시험해 보려고 마음먹고 아주 무서운 살인귀인 나찰의 모습으로 둔갑
          하여 하늘나라에서 설산에 내려왔다.
          그리고 설산동자 가까이 가서 지난날에 부처님이 설한 偈頌(게송) 가운데서 「諸行無常(제행무상)하니 是生滅法(시생멸법)이라」라고
          偈文(게문)의 반만을 소리 높이 읊었다.
         이 偈頌(게송)을 들은 설산동자의 마음은 비길 대 없이 기쁘고 환희로웠으며 깨달음의 등불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고행을 하던 설산동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게송을 설한 분은 누구입니까?」 하고 주위를 살펴봤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서운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설산동자는 나찰에게 물었다.
          「지금 게송의 반을 읊은 자가 바로 그대인가?
          「그렇다.」
          「그대는 어디서 과거 부처님이 설 하신 半偈(반게)를 들었는가? 나에게 그 나머지 반도마저 들려주기 바란다. 만일 나를 위해서
         게송의 전부를 들려준다면 나는 평생 그대의 제자가 되리다.」
         「그대, 바라문이여! 그렇게 물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단다. 나는 벌써 며칠이나 굶어 허기에 지쳐서 말을 할 기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먹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을 무섭게 할뿐이니까.」
         「여기에는 너와 나밖에 없으니 어서 말해 보아라.」
         「정 그렇다면 말하지. 내가 먹는 것은 오직 사람의 살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피다.
        설산동자는 한참동안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나머지 게송을 마저 들려다오. 그 반게를 듣기만 한다면 나는 이 몸뚱이를 기꺼이 그대의 먹이로 바치리라.」
         「어리석도다. 그대는 겨우 8자의 게송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참말로 그대는 무지하구나! 옹기그릇을 깨고 금 그릇을 얻는다면 누구라도 기꺼이 옹기그릇을 깰 것이다. 무상한 이 몸을 버리고
         金剛身(금강신)을 얻으려는 것이니 게송의 나머지 반을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다. 어서 나머지
         반게송이나 들려 다오.」
         나찰은 지그시 눈을 감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머지 반게를 읊었다.
        「生滅滅已(생멸멸이)이면 寂滅爲樂(적멸위락)이니라.」
        나머지 반게를 읊은 나찰은 지체 없이 설산동자의 몸을 요구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설산동자는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죽으면 세상 사람들이 이 귀중한 진리를 알 수 없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已(생멸멸이)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는 게송을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바위나 돌, 나무, 길 등에 이 게송을 많이 썼다.
        그리고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서 나찰이 있는 곳을 향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설산동자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찰은 다시 제석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커다란 손으로 설산동자의 받아 고이 땅위에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제석천을 비롯하여 모든 천상의 사람들은 설산동자 발아래에 엎드려 찬미하였다.
  
        諸行無常(제행무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무엇이든 항상 함이 없도다.
        是生滅法(시생멸법)     이것이 바로 생멸하는 우주만물 속에 내재 해있는 진정한 법칙이다.  
        生滅滅已(생멸멸이)        그러므로 생하고 멸하는 것 마저 이미 멸해 버린다면
        寂滅爲樂(적멸위락)        고요하고 고요한 진정한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연등불에게 꽃을 바치는 전생의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이 전생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燃燈佛(연등불)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儒童(유동= 그때의 석가여래의 이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연등불이 오시는 곳으로 막 달려갔다.  그리고 연등불에게 무엇을 공양
            하면 좋을까  궁리를 했다.
           그런데 마침 한 童女(동녀)가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동은 그 처녀에게, 연등불님께 올리게 그 꽃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처녀는 꽃을 주는 대가로 다음 세에서 자기를
           부인으로   맞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유동은 기꺼이 승낙하고, 그 꽂을 받아 처녀와 함께 연등불 앞에 나아가서 五華(오화) 연꽃을 연등불에게 바치고 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세에서 부처가 되리라는 구체적인 약속을 받았다.(授記를 받았다.)




         <努肹夫得(노힐부득)과 怛怛朴朴(달달박박)
           옛날 신라 서라벌 가까운 仙川村(선천촌) 마을에 「노힐부득」와 「달달박박」이라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풍체와 골격이 범상치 않는 좋은 친구였는데, 나이 20이 되어서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리하여 「달달박박」은  白月山(백월산) 북쪽 고개에 있는 사자암에 자리를 차지하고, 「노힐부득」는 동쪽 고개 밑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박박」은 아미타불을 성심껏 구했으며 「부득」는 미륵불을 경례하고 염송했다.
          3년이 지난 어느 해 4월 8일 저녁, 나이 20세가량인 젊은 낭자가 북쪽에서 공부하는 「박박」을 찾아가서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여기서 지체하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 보시오, 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동쪽으로 가서 「노힐부득」를 보고 역시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이 말하기를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는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고, 더구나 깊은 산골에서 날이 저물었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 할 수 있겠소」
         하며 단칸방에 자고 가기를 허락했다.
         밤이 되자 마음을 깨끗이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등불을 벽에 걸고 염불에 전념하였다.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게도 마침 해산할 기미가 있으니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촛불을 밝혀 도와주니, 해산을 마치고는 목욕하기를 청하였다.
         「노힐부득」은 부끄럽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가엾이 생각하고 물을 데워 낭자를 목욕시키니, 이미 통속의 물에서 향기가 짙게
         풍기며 금빛으로 변해있었다.
        「부득」이 놀라니 낭자가
        「우리 스님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다.」하기에 그는 마지못해 낭자 말대로 하였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고 온몸이 금빛이
        되고 그만 미륵부처가 되었다.
        낭자는 관세음보살인데 대사를 도와서 대 보리를 이루려고 왔던 것이다.
        한편 「박박」은 지난밤에 「부득」이 반드시 계를 깨트린 줄 알고 찾아가 보니, 「부득」은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있었다.
        「부득」이 모든 까닭을 말해주자 「박박」은 부처님이 오셔도 모시지 못한 어리석음을 탄식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교분을 생각해서 자기도 일을 함께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부득」은 아직도 통속에 금빛 물이 남아 있으니 목욕을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함께 무량수를 이루니 그도 부처가 되었다.
        그러나 금빛 물이 조금 부족해서 그의 발은 금빛으로 빛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三國遺事 券3>



         <元曉大師(원효대사)와 해골
          신라 말기의 고승인 원효대사(617~686)는 많은 일화를 남긴 한국불교의 거성이다.
          대사께서 34세 때, 가장 친한 벗인 義湘大師(의상대사)와 함께 불법을 구하려 당나라에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넓은 들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낙비를 동반한 폭풍이 불어 왔다. 해는 저물어 날은 어두운데, 주위를 살펴봐도 비바람을 피할만한
          곳이 없었다.
          온 몸이 비에 젖고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 할 무렵 겨우 비를 피할만한 땅굴을 하나 발견하여, 굴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게 되었다.
          잠자다가 목이 마른 원효는 물을 찾아 이리저리 더듬으니, 머리맡에 낡은 바가지가 하나 있는데 거기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물을 마셨다. 물맛이 꿀맛 같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날이 새고 그 바가지를 보니, 그것은 바가지가 아니고 사람의 해골이었다.
          지난밤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것이다.
          그 바가지가 해골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지난 밤에 그렇게도 맛이 있던 물이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뱃속에 있던 모든 것을 다 토하고
         말았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모든 것을 깨달았다.
        心生則種種法生(심생칙종종법생)
        心滅則髑髏不二(심멸칙촉루불이)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三界(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라 하였는데, 내 마음이야 당나라에 가나 고국으로 돌아가나 항상 그 마음이 그 마음인
        것을!」 하시며 그 길로 당나라 가시는 것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팔을 끊어 믿음을 바친 慧可(혜가)
           禪宗(선종)의 제 2조인 慧可大師(혜가대사 487~593)는 중국 洛陽(낙양)사람이며 이름은 神光(신광)이고 성은 姬(희)씨다.
           낙양 용문의 향산에서 득도하여 儒佛(유불)를 배우다가 32세에 향산으로 들어가 좌선, 40세에 승산 소림사에 達磨大師(달마대사)를
           찾아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바위 굴 속에 面壁(면벽) 하고 있는 달마 대사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혜가는 堂(당) 안에 들지 못하고 뜰에 서서 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밤새도록 꼼짝도 안하고  달마의 응답만 기다리고 서
          있었다.  더구나 그날 밤엔 눈이 내려 혜가의 몸을 덮었으나 혜가는 의연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달마대사는 아침에야 내다보니 어제 찾아온 사람이 눈 속에 그대로 서 있으므로 「그대는 무슨 까닭에 나를 찾아 왔는가?」하고 입을
          열었다.
         「법의 가르침을 받으려 왔습니다.」라고 혜가는 대답하였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달마께서는 위엄 있는 큰 소리로
          「너의 믿음을 바치라!」 하였다.
        혜가는 지체 없이 예리한 칼을 뽑아 왼팔을 끊어서 바치니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끊어진 팔을 바치었다.
        그제야 입당이 허가되었고, 혜가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달마의 가르침을 받고 禪宗(선종)의 第二祖(제이조)가 되었다.

        왼쪽 위 그림은 달마대사가 죽은 지 오래 된 후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 지팡이에 짚신을 매달고 천산산맥을 걸어가는 가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의 그림이다.>




         <成道(성도)를 방해하는 마왕
           태자는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서, 內心(내심)의 깊은 省察(성찰)에 잠겨 모든 것이 緣起(연기)하는 도리를 관찰하였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가 조건에 의해서 생성된다는 것인데, 이 절대적인 진리가 연기의 법칙이다.
          그리하여 마침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려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다가 왔다.
          온 세상이 기뻐하고 경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왕 波旬(파순= Mara papiya)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태자의 성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우선 태자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인 魔軍(마군)을 태자가 수행하는 보리수 나무 밑으로  보내어 태자를 공격했다.
          그러나 태산반석과 같은 태자는 끄떡도 하지 않고 마군을 물리쳤다.
          1차 방해공작에 실패한 파순은 이번에는 부하들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둔갑을 시켜 태자 곁으로 보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온갖
          교태로 태자의 성도를 망해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역시 실패하고, 태자는 드디어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 성불하였다.  
          그리하여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 되셨다.

          이 벽화는 그 내용을 현대감각을 가미하여 그린 그림이다.>




         <阿難尊者(아난존자)의 득도
          아난존자(Anand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한사람이며, 25년간이나 부처님 바로 곁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을 시봉함에
          게으르거나 싫증을 느끼지 않았었던 분이다.
          그 긴 세월을 통하여 한 번도 불경스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부처님의 설법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도를 깨달은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카아샤파」의 주재로 칠엽굴에서 제1회 結集(결집)을 할 때 거기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문자가 없었던 그 당시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과, 부처님 열반 후에 교단의 운영문제등을 상의
          하는 첫 번째 회의가 제1 결집이었다.
          거기에는 모두 도를 깨친 500명의 阿羅漢(아라한)만이 참석하는 곳이기 때문에 도에 이르지 못한 「아난다」는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이에 크게 분발한 「아난다」는 홀로 절벽 끝에 가서,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7일간이나 꼼짝 않고 서서 용맹정진 한 결과 드디어
         도를 깨달아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로들만 모이는 제1회 결집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
          


성보는 다음과 같다.
o석가모니불 - 높이 165cm
o문수·보현보살 - 높이 160cm
o 후불탱화 - 가로 330cm, 세로 220cm
o 신중탱화 - 가로 326cm. 세로 208cm나.



        <대웅전의 동편, 용화전 옆에 새로 잘 지은 전각이 있는데 전각 이름이 없어 무슨 집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 단청은 되어 있지 않고
          유하사 노스님의 처소로 이용할 듯하다 하다 하나 확실하지 않다.>



         <새로 지은 용화전. 옛날에는 이 용화전이 유하사의 중심 법당이었다. 아직 완전히 공가사 이루어 지지않아 문이 결려 있어서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쉽게 돌아 왔다.>



          <龍華殿(용화전) 현판 글씨. 이 현판은 길이 유하사의 보물이 될 것이니 잘 모셔야 하리라 생각한다.>



나 龍華殿(룡화전)

대웅전의 동쪽에 위치한 용화전은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전각이다. 미륵불은 도솔천이라는 하늘나라에서 보살로 있으면서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못다 구제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이다.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모든 행과 도를 원만히 닦아서 미래에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는 약조를 받고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나라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미래불인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미륵불을 안치한 전각의 이름을 '용화전' 혹은 '미륵전'이라 한다.

용화전의 좌향은 서향이며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초기 창건 시 3칸 크기의 건물을 중창하여 현재의 모습이다.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시멘트로 마감한 후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접처마이다. 용화전의 내부에는 1m 크기의 미륵불을 가운데 모시고 그 우측에 아미타불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우측에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미륵불의 좌측에 산신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건물의 전면은 크기가 같은 5칸의 규모에 띠살문이 설치되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좌·우 측면 1칸에도 띠살문이 있다.

내가 찾아간 날은 눈이 많이 쌓이고 몹시 추웠으며 문이 잠겨 있어 내부에 들어 갈수가 없어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였다. 이 기사는 전에 갔을 때 기록한 내용인데 아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개축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단청을 하지 않았다.

옛 용화전 건물 벽에 여러 가지 다양한 벽화가 있었는데, 개축하면 모두 사라진 것이 몹시 아깝다.

용화전 기둥의 주련은 다음과 같다.

                                                  



煩惱斷盡福智圓(번뇌단진복지원)
位極一生補處尊(위극일생보처존)
寂光土中不留意(적광토중부류의)
放大光明助佛化(방대광명조불화)
宏施七變之言音(굉시칠변지언음)
普化五乘之聖衆(보화오승지성중)
                       <출전- 미륵청, 청성의문서 등>
<해>
              번뇌를 다 끊으시고 복덕과 지혜 원만하시니
              지위는 부처님 보좌하는 높은 자리에 계시고
              적광토 속에만 머물지 않으시고
              대 광명을 놓으시어 부처님 교화를 돕고계시네.
              넓은 지혜와 방편으로 중생근기에 따라
              오승의 성중을 교화하시네.


유하사의 옛 건물 벽에는 다음과 같은 벽화가 있었다.
내가 「재미있는 벽화 이야기」 책을 편집할 때 유하사에서 찍은 벽화 사진이 있기에 용화전을 완공하고 다시 단청할 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때 그 벽화를 여기 소개 한다.

유하사 뿐만 아니고 전국 각처에서 고찰을 개축 할 때, 벽을 해체하니 귀중한 벽화들이 모두 없어지는데 그것이 무척 안타깝다.




     <毘藍降生相(비람강생상)        
       아기 부처님이 태어나자 하늘에서 9마리의 용이 나타나서 입으로 물을 뿜어 아기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탄생한 아기부처님의 몸을 깨끗이 했다는 말은 많은 용이라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있다.
       9라는 수는 10진법의 수에서 가장 큰 수이며, 數之終(수지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부처님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7발자욱식을 걸은 다음 한쪽 손으로 하늘을, 또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天上天下
       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친다.
       당당한 아기부처님에게 경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弘忍(홍인)대사와 慧能(혜능) 대사와의 대화
      방아를 찧으며 공부를 하던 혜능은 수행의 경지가 최상에 달해서 도통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홍인대사가 잘 보이는 곳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적어 놓았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菩提(보리)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닐세
        本來一無物(본래일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이 게송을 본 오조 스님은 혜능스님의 공부가 이미 도통경지에 들어갔음을 알고,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방아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육조 혜능을 찾아갔다.
       그리고 쌀을 찧고 있는 혜능을 보고
       「쌀은 다 찧었느냐?」   ( 공부는 다 되었는가 하는 뜻)하니,
       혜능은
       「쌀은 다 찧었는데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 (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印可(인가)를 못 받았습니다. 라는 뜻) 라고 대답하였다.
        오조스님은 돌연 지팡이로 방아머리를 탁, 탁, 탁, 세 번 치고 뒷짐을 지고 묵묵히 돌아 가버렸다.
        혜능은 선듯 그 뜻을 알아들었는데, 지팡이로 방아를 세번 친 것은 밤 三更(삼경)을 뜻하는 것이요, 뒷짐을 지고 가신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의미 였다.
       그날 밤  삼경에 조실 방에 가니, 그곳에서는 병풍이 돌려 있고 그 병풍 뒤에 앉아서 오조스님으로부터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六祖(육조) 慧能禪師(혜능선사)는 양자강 이남에서 禪宗(선종)을 크게 선양해서 南宗(남종)의 조종이 되었다.




     <대웅전 벽에도 있는 <成道(성도)를 방해하는 마왕>의 벽화 이다. >



     <이 벽화도 대웅전에 있는 <鹿野傳法相(녹야전법상)>의 내용이다.>




   <이 벽화 역시 대웅전 벽에 있는 <팔을 끊어 믿음을 바친 慧可(혜가)>의 벽화와 같은 내용의 그림이다.>




     <浮雪居士(부설거사)
       浮雪居士(부설거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난 사람이며 성은 陣(진)씨, 이름은 光世(광세) 였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주 불국사에서 圓淨(원정)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靈照(영조)·靈熙(영희) 등과 함께 智異山(지리산)· 天冠山(천관산)· 愣伽山(능가산) 등지에 수년 동안 수도하다가 文殊道場
       (문수도량)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들이 있는 杜陵(두릉)의 仇無寃(구무원)의 집에서 하룻
       밤을 자게 되었다.
       그 집에 있는 18세의 딸 妙花(묘화)는 나면서부터 벙어리였으나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열렸으며, 그때부터 묘화는 부설을 사모
       하게 되어 함께 살자고 하였다.
       부설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자 묘화는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자 부설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로다.」하며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후 15년을 살면서 아들 登雲(등운)과 딸 月明(월명)을 낳아 부인에게 맡기고 별당을 지어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수년이 지난 다음 영희와 영조가 부설을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은 서로의 조력을 시험하였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줄에 매달아두고 병을 쳐서 깨트려도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로 도력을 간음하기로 하였다.
       영희도 영조도 병을 치자 병이 깨지며 물이 흘러내렸지만 부설이 그 병을 치자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으며 흘러
      내리지 않았다.
      부설은 거사로서 열심히 수행하여, 수행공덕이 스님을 능가했던 것이다.
      부설은 참된 법신에 생사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설법을 한뒤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영희와 영조가 茶毘(다비)하여 사리를 妙寂峰(묘적봉) 남쪽에 안치하였다.
      그때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은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으며, 부인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은 부설거사가 도력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摩耶宮(마야궁)에서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를 탄 護明菩薩(호명보살)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




      < 부처님의 관에서 두 발이 나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구시니가라」 성밖에 무성한 「사라수」 나무 숲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기셨다.
        발길을 옮기 시면서도 계속 주위를 살피시며 무엇인가 찾는 듯,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듯 마음이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머지않아 이 사바세계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영원하고 완전한 해탈의 길을 얻는 無餘涅槃(무여열반)의 길에 드실 때가 바로
        눈앞에 다가 왔는데도 기다리던 제자 「가섭존자」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침 그때 포교활동을 하러 먼 곳에 가 있는 10대제자 중에 한사람인 「가섭존자」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자 그가 오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기다리던 가섭존자는 오지 않았고, 부처님께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안은 채 열반에 드셨다.
        슬픔에 잠긴 여러 제자들은 당시의 장례법에 따라 부처님을 관 속에 모시고 화장을 하려고 관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은 불에 타지 않았고, 불은 모두 꺼저버리고 말았으며, 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멀리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온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관을 붙들고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그러자 갑자기 관에 구멍이 뚫리고 부처님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불쑥 나와 마치 가섭존자를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두 발에 얼굴를 비비대고, 두발을 가슴에 안고 그칠 줄 모르고 슬피 슬피 통곡하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부처님의 마음과 가섭존자의 마음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以心傳心(이심전심)의 슬픈 이별은 드디어 끝을 내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관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마치 가섭존자를 기다리고 계셨는 듯 아무 일 없이 장례는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상 유하사의 정문인 산문. 사찰의 규모에 비해 유하사에는 일주문이 없고 이 문이 바로 유하사의 유일한 산문이다.



      <옛날 내가 찾아 았을 때는 이 문 옆으로 담을 쌓아 두었는데 지금은 담을 헐고 그 대신 대나무로 울을 만들었는데 운치가 더욱 좋다.
        그리고 문 우측에 있던 스레드 가건물도 말끔히 정리되어 매우 품위가 높다.
        아마도 지금의 원주스님의 보통이 아닌 것 같다. >



        <臥龍山遊夏寺(와룡산유하사)라고 적힌 이 현판 글씨는 일기가 내우 난해 하다. 글을 쓰신분은 탄허스님이며, 이미 입적하신
          고승이시다.>




        <산문인 해탈문에는 두분의 금강역사 그림을 그려 산문을 들어 가는 사람의 마음을 긴장시켜 속세의 잡념을 없애게 한다.>


        <해탈문에 있는 유하사의 금강역사>


다. 해탈문

유하사의 사실상 산문인 이 해탈문은 그 문을 통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모든 번뇌와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라는 상징적인 문이다.
마음속에 가득한 탐욕과 집착을 없애고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와 지혜에 의해서 어리석은 무지에서 벗어나 만물의 실상을 똑바로 직시하며 정확한 판단으로 부질없는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라는 말이다.

해탈문은 2칸 크기의 규모이다.
좌측 1칸은 출입하는 문으로 사용하고 우측 1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문에는 금강역사가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 모든 번뇌를 어리석음의 고난을 베어버릴 듯이 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의 금강역사도가 그려 져 있다.

번뇌와 고통을 잊고 어리석음과 질투심을 버리고 평안한 마음가짐으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라는 가르침을 주는 해탈문의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 있다.

그 글귀는 다음과 같다.

          

神光不昧萬古微猷(신광불매만고미유)
入此門來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출전: 전등록 9>
<해>
거룩한 광명이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에 밝도다.
이 문을 들어오려면 망상을 피우지 말라.


라. 法起軒(법기헌)
이 건물은 무심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한 후 큰 덕을 쌓고 유하사를 중창할 수 있는 틀을 잡은 곳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크기인 이 건물은 좌측 1칸에는 무심대사의 진영이 걸려 있다. 그 크기는 가로 71cm. 세로 107cm이다. 우측 1칸에는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 탱화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는 것으로 크기는 가로 190cm, 세로 145cm이다.
내가 간 날 눈이 많고 조건이 나빠 촬영을 할 수 없어 여기 싫지 못하였다.
다음 날씨가 풀리면 다시 가서 보충할 생각이다.

마. 療舍(요사)

경내에서 서쪽에 자리 잡은 옛 요사채는 무심대사가 지은 중향각(衆香閣)과 현주지연 묘행(妙行)이 지은 동선당(東禪堂) 2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건물 뒤로 넓은 땅을 확보하여 거기 가건물인 공양간을 지어 스님들과 신도들의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 두 건물은 종무와 스님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유하사 중흥에 지대한 힘을 실은 묘행스님은 근간 몸이 불편하여 유하사의 모든 종무를 원주 스님에게 넘겨주고 조용히 기도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소임을 맡은 원주스님은 젊은 나이인데도 대단한 법력과 능령이 있어 그 어느 스님에게 뒤지지 않게 유하사를 잘 운영하고 있고, 소임을 맡은 뒤 가시적인 많은 업적을 남긴 유능한 스님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유하사 선방에는 평소 많은 비구니스님이 와서 수도를 하고, 젊은 신도들이 많아 늘 활기가 넘친다.
특히 차량의 접근이 쉬워 경향 각지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신앙심을 굳히고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 희망을 갖고 돌아가는 알찬  부처님의 도량이다.




           <유하사 마당에 큰 소나무는 유하사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낙낙장송이 되었다. 소나무 뒤로 종무소 건물이 보이는데 그 안에
             수도하는 유하사의 청정한 스님들이 살고 있다. 유하사여! 길이 발전하여 미혹한 중생의 마음에 인과의 깊은 뜻을 깨닫게해서
             모두 부처님에게 귀의하도록 길을 인도해 주시기 바랄 따름이다.



            <아무리 봐도 또 보고싶은 유하사의 대웅전. 50년만에 많이 온 눈을 몇 사람되지 않는 유하사 스님 힘으로는 다 치울 수가 없어
              눈 녹는 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소한도 이미 지나갔고 대한도 멀지 않았으니 따스한 봄이 와서 이 반갑지 않는 눈 더미를
              잘 치워 줄 것이다.>


          <유하사의 선방. 전국 각처에서 기도하는 비구니스님이 모여 이 선방에서 기도를 한다. 유하사는 그 스님들이 온 힘을 다해
            용맹정진 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뒷 바침을 하고 있다. 이 구역은 외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이여서 내부 촬영을 삼가했다.>




         <종무소 뒤로 넓은 땅을 확보하여 지금은 가건물을 지어 스님들의 주차장과 공양간 채전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넓은 부지를
            확보한 지금의 원주스님 넘무나 많은 힘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유하사 해탈문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본 유하사. 낮은 대나무 울타리 넘어 뜰과 경내가 잘 보인다. 유하사는 이같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생활 사찰이다.>





         <유하사의 해우소는 멀리 서편에 있다. 한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조금 먼데 있는 듯 하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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