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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아동의 사찰 鳳凰寺(봉황사)

청남이메일

아동의 사찰 봉황사

1. 위치: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563번지
    주지: 도견 스님
    (054)- 822- 2562

안동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임동면 소재지가 있는 중평리 까지는 25 km 정도이다.
안동시가지를 벗어나 기암절벽으로 된 속칭 "선어대"라는 곳에서 안동대학교를 지나 이곳까지는 줄곧 반변천을 옆으로 끼고 달리는 길이다. 이 길을 20여분 달리면 내앞(川前)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부터는 임하댐의 건설로 구도가 물에 잠기게 되어 새롭게 이설도로를 건설하여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임하호의 정취를 느끼며 중평리로 향한다.


        <왕룡면 사무소 앞에 있는 봉황사로 가는 안내판. 직진하면 도산서원 쪽으로 간다.>

면소재지가 저 만치 보일 때쯤이면 오른쪽으로 높게 세운 수곡교가 있다. 이 다리는 임하댐의 준공과 때를 같이하여 완공되었으나 지반이 약하여 교각에 균열이 생기고 지반이 침하되어 일부 교각과 상판을 들어내고 보수공사를 하여 지금은 안전하게 완공 되였다.




        <지금은 잘 보수되어 통행이 자유롭게 된 수곡교.>




        <수곡교를 건자 바로 앞에 왼쪽으로 가라고 세워진 봉황사 안내판. 오른쪽으로 가면 지례예술촌이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약 500m 정도 더 올라가면 아기산 중턱에 봉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다리를 건너 조금 더가면 산 밑에 봉황사로 접어드는 길을 안내하는 또 하나의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 부터는 산길이지만 잘 포장이 되어 있고 외길이여서 찾아가기가 쉽다.>


2. 유래와 전설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나 확실한 사료가 없어서 누가 언제 세웠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영가지에 따르면 임하현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기산(岐山)아래에 있는 신라 고찰이란 기록만 전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50년전 전인 1980년, 당시의 주지가 사찰 옆 개울 속에서 아기산봉황사사적비(鵝岐山鳳凰寺事蹟碑)를 찾아냄으로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석은 높이 136cm, 너비 50cm, 두께16cm 크기의 화강암에 비문이 음각되어있으며 봉황사(鳳凰寺) 大雄殿(대웅전) 동쪽 벽 옆에 세워져 있는데 비문(碑文)은 매우 마멸되어 있다.




        <봉황사 대운전 동편에 서 있는 아기산봉황사사적비(鵝岐山鳳鳳寺事蹟碑) 비석.



옛 사적비가 헐어서 18세기 초에 다시 세운 듯 한 이 비는 비석 머리에 아기산봉황사사적비(鵝岐山鳳鳳寺事蹟碑)란 9자만 뚜렷할 뿐 그 외 비문(碑文)은 거의가 판독할 수 없다. 그러나 몇 구절의 문구(文句)와 현존하는 사찰에 대한 기록문헌(記錄文獻)을 상고(相考)하여 풀이해 본다면 이절의 이름이 한때는 “황산사”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봉황사에는 대웅전(大雄殷), 극락전(極樂殿), 관음전(觀音殿), 僧堂(승당), 만월대(滿月臺), 범종각(焚鐘閣), 만세루(萬歲樓), 친왕문(天王門) 등 여러 채의 건물(建物)이 있었고 부속암자로 낙서암(樂西庵), 정수암(淨水菴)도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동서암자(東西庵子)인 것 같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점은 사적비에서 어렴풋이 나타나는 기록과 함께 주위 전답에 발굴되고 있는 주초의 범위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이름이 언제부터 황산사(黃山寺)였고 또 현재 봉황사(鳳凰寺)는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봉황사 사적비를 세운 연도는 비록 재건(再建)한 구비(舊碑) 이긴 하지만 숭정(崇禎) 후 118년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1813년에는 이미 봉황사라 했음을 알 수 있다.




           <20여 년 전 찍은 대웅전 사진. 그때는 여름이여서 녹음이 짙었다.>


그러나 1608년에 기록을 정리한 영가지에는 황산사라고 적으니 당초에 황산사로 창건되어 뒤에 봉황사라 했음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사적비의 일부 판독문을 보면 구아기산사명왈봉황창금(舊鵝岐山寺名曰鳳鳳刱今)이란 글에서 당초에는 봉황사라 한 것을 입증해도 가능할 것 같다. 비문이 매우 낡고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확인 가능한 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頭篆) 鵝岐山鳳鳳寺事蹟碑
(碑文) 寺在崎山下□□道誌所占□立不知□石守而舊鵝岐山寺名曰鳳鳳刱今樂西菴其舊址也甲子山之僧懷應智□今處尙□□恭之法堂禪信堂乙丑□□□行造成伏像三遵(以下判讀不可)
崇禎一百十八年□□□□盖誠也寺在山畢之水重□□□之□□□曲簡之□□定人□□而□奇觀也遂景遊人稱(以下判讀不可)
學子論於此則未於敢表焉浮屠三遵舊基法堂樂西菴淨水菴大雄殿極樂殿者度僧堂禪堂淸風堂滿月臺泛鐘閣萬世(以下判讀不可)
歲次癸酉五月四日 立石 奉硯寺弘
   <판독 가능한 글만으로는 참 뜻을 알 수 없으므로 번역을 생략함.>

봉황사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도 번성기 때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10개의 전각과 2개의 부속암자가 있어 안동지방에서 광흥사와 더불어 대단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에 전소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 대웅전과 요사 1채만 중창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禪堂(선당)인 說禪堂(설선당)이 1997년에 완공되었고, 1999년에는 극락전을 복원하기 위한 준비을 하여 지금은 장엄한 극락전이 잘 복원이 되었다.

봉황사 대웅전의 단청은 몇 차례 보수를 하면서 다시 칠하여 졌으나 내부의 단청은 예부터 전해오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종량과 중량, 고주, 우물천장, 빗천장 등에 화려하게 단청이 되어 있다.
우물천장에는 연화문이 채색되어 있고, 빗천장에는 봉황·학·신선 등이 구름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 또 종량과 중량, 도리에는 뛰어난 선과 색상을 보여주는 단청이 아름다움을 자아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낸다.

이렇게 빼어난 단청은 사람이 아닌 봉황이 그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을 중창한 후 봉황이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정면과 좌·우 측면을 끝내고 건물 뒤에 단청을 할 때 그만 사람들이 쳐다보자 끝내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오늘까지 뒷면에는 단청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사적비에도 나오는 봉황사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가 된 듯하다.
또한 봉황사가 있는 아기산에는 예부터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아들을 잉태하기 위한 기자속(祈子俗)이 은밀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아들을 잉태하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던 기자바위가 사찰로 올라가는 길가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아빠바위와 엄마바위가 바로 그대상이다. 아빠바위는 길쭉한 자연석으로 머리 부분에 둥근 테가 둘러져 있고, 엄마바위는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다. 엄마바위는 아빠바위에서 동쪽으로 10m 가량 떨어져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 정성껏 치성을 드리고 아빠바위에 아무도 몰래 올라타고 몸을 밀착시키면 아들을 잉태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아빠바위에 올라서서 엄마바위를 향하여 돈을 던져 움푹 팬 구멍에 동전이 들어가면 아들을 잉태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다른 기자바위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봉황사 간이주차장 옆에 있는 과수원에서 관정을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생긴 남근석이다. 이 남근석은 과수원 옆에 사는 김중기씨가 발견하여 보관하던 것을 1991년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여 기자속 연출장에 전시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봉황사의 전경. 주차공간은 매우 넓어 50대 이상의 승용차가 쉽게 주차할 수 있을 정도이다.>


3. 건축물의 구성과 배치

아기산(鵝岐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봉황사는 안동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 사찰로서 넓은 터를 소유하고 있다. 아기산은 산세가 거위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거위 '(鵝)'자에 산 이름 '기(岐)'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백산의 한 갈래인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해발 591m인 아기산을 이루었고 그 주봉이 우뚝 솟아 무실마을의 진산(鎭山)이 되고, 봉황사를 끌어안고 있는 황산곡(黃山谷)을 만들었다.

황산골은 북쪽을 향하여 널찍한 터를 갖고 있으며, 아기산의 기(氣)가 모여 뻗어 내려온 곳에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북향을 향하고 있다. 대웅전의 건물이 북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예로 아기산의 지형으로 인하여 산의 정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대웅전 앞에는 조금 낮은 위치에 요사채가 대웅전을 향하고 서 있었는데 지금 가 보니 동쪽으로 원형 그대로 잘 옮겨 지어놓았다.

가람의 매치에 있어 본전인 대웅전 앞에는 대개 중문격인 누각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나 봉황사의 경우에는 대웅전과 마주하여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부처님의 불법과 자비로움이 요사에 머무는 스님과 신도들에게 곧바로 전해지라는 의미에서 건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봉황사는 대웅전, 요사. 극락전, 설선당, 산신각으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예전에 번성하였을 때에는 10여 개 전각이 자리 잡은 대찰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적비를 통하여 알려졌지만 넓은 터에 놓여있는 주초석으로도 과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찰로 들어오는 입구에 부도군이 있고 천왕문을 지나면 중문인 만세루가 자리 잡았고 있덨다 한다.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배치되고 대웅전의 우측에 극락전이, 좌측에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승당, 선당, 청풍당, 법종각 등의 건축물들이 배치되었으며, 부속암자로도 낙서암과 정수암이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대웅전의 전경>




        <대웅전의 현판 글씨>



가. 대웅전
조선중기 인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공포형식은 다포형식으로 내외이출목을 사용하였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하였으며 지붕추녀의 끝은 활주로 받쳤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의 가장자리에 백자로 된 연꽃봉우리를 꽂아 건축물의 장엄을 더 하였다.

대웅전은 지금은 이건한  'ㄱ' 자형으로 된 요사와 마주보는 곳에 막돌 허튼층쌓기로 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단 중앙에는 8단의 자연으로 놓은 계단이 있어 법당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우측에도 10단으로 된 자연석 계단이 하나 더 있어서 법당과 산신각으로 오를 수 있는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머리 부분에 둥근 돌을 얹은 석불이 옛날에는 대웅전 앞에 있었는데, 오늘 가보니 보이지를 않았다.>



오른쪽 퇴칸의 기단 앞에는 마모가 되어 윤곽이 잘 나타나지 않는 오래된 석불이 놓여 있는데 머리가 잘려나간 후 그 자리에 둥근 돌을 얹어 놓았다.

대웅전의 정면 5칸은 어칸이 좌·우 협칸과 퇴칸 보다 조금 더 넓은 크기고, 좌·우 협칸과 퇴칸은 같은 크기이다.
각 칸에는 정자형 살문을 달았는데 어칸에는 3분합문이고 나머지 칸은 분합문으로 모두 여닫이문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고 각 기둥 마다 7자로 된 주련이 걸려 었다. 주련의 내용은 좌측에 걸려 있는 2개와 우측 4개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좌측에 있는 두개의 주련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분이 바로부처님이란 뜻의 주련이다.
우측에 걸려 있는 4개의 주련 내용은 석가모니가 도를 깨치려고 눈 쌓인 산속에 들어가서 6년간이나 한자리에 앉아 수행했는데 어느 날 새벽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쳤는데 그 기쁜 소식 온 세상에 가득하고 모든 중생들이 함께 기뻐 한디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世尊當入雪山中(세존당입설산중)
一坐不知經六年(일좌부지경륙년)
因見明星云悟道(인견명성운오도)
言詮消息遍三千(언전소식변삼천)
<해>
        부처님께서 설산에 계실 때
        한번 앉아 육년이 흘러감을 알지 못했네.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시니
        그 말씀 그 소식 삼천세계에 가득하여라.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해>
        천상과 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이 존귀한 분은 안 계시고
        시방세계를 다 둘러봐도 역시 비교될 만한 분 없도다.

대웅전의 좌·우측 벽면에는 별다른 불화나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고 붉은 색의 흙벽으로만 처리되어 단순해 보인다.
좌·우 측면의 전면에는 중방을 두고 정자형 외문을 내어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단청이 되어 있지 않는 대웅전 후면 벽>



후면에도 벽면은 흙벽으로 처리되어 있고 어칸에는 미닫이문을 낸 것이 독특한 구조이다.
정면은 단청이 되어 있으나 후면은 전설과 같이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대웅전 내부 바닥은 기둥과 기둥에 장귀틀을 건너지르고 장귀틀과 장귀틀에 홈을 판 다음 동귀틀을 걸은 다음 그 사이에 짧고 넓은 마루널(청판)을 끼워 넣은 형식으로 고건축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우물마루로 짜여 있다.




        <대웅전에 주불인 석가모니불.>




        <대웅전에 안치된 아미타불.>



불단의 장엄은 후벽에 붙여서 꾸민 것이 아니라 후벽에서 한 칸 앞에 내 진주로 고주를 제우고 불벽을 꾸민 다음 어칸의 절반 정도까지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의 높이는 약 120cm 정도이고 청판에는 연꽃문양을 그려 넣었다. 불단의 상부에는 난간을 두른 다음 대좌를 설치하였다.

대좌는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대개 연꽃 위에 앉는데 이를 연화좌라 한다.
봉황사 대웅전의 대좌는 연화좌가 아닌 방형의 須彌壇(수미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거처인 수미산을 뜻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일반적으로 사용한 양식이다.




        <특이한 봉황사 불단. 불단 뒷면에 공간으로 부처님을 탑돌이 하듯 돌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불단은 고주를 4개 세워 3칸의 불벽을 만들고 장엄하였으므로 3칸의 크기다.

각 칸에 부처를 모시고 불벽에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님의 봉안은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이란 현재·과거·미래 세계의 부처님을 말한다.
이때에는 현세를 대표하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모시고, 왼쪽에 과거를 대표하는 연등불을 오른쪽에 미래세계를 대표하는 미륵불을 모신다.




        <대웅전의 지장탱화>




        <대웅전의 칠성탱화>




        <대웅전의 신중탱화>


좌협시불인 연등불은 정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아득한 과거 세상에서 석존에게 성불할 것을 예언하신 부처님이다. 일명 제화가라불이라고도 부른다.

우협시불인 미륵불은 석가모니불보다 56억 7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실 미래불이며 그 때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도록 되어 있는 부처이다.

삼세불의 크기는 모두 높이 160cm, 너비 110cm이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세불은 후벽에서 한 칸 앞으로 내어 고주를 세우고 불벽을 꾸며 봉안하였으므로 신도들이 법당 내부에서 불공을 드린 후 불단을 가운데 두고 탑돌이 하듯이 불단 주위를 합장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건축에 배려하였다.




        <울물정자 천정에 아름답게 채색된 단청. 이 단청이 실로 보물급이다.>




        <천정에 많은 등이 달려 있어 단청을 잘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한 편 많은 연등은 봉황사의 사세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봉황사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상징하고 있다.>



천장은 중앙부에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주위로 돌아가면서 빗천장으로 꾸였다.
내부에는 단청이 매우 섬세한 기법으로 채색되어 장엄을 한층 북돋워주고 있다. 우물천장에는 연화문을, 빗천장에는 봉황 학·신선 등이 구름무늬를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을 그려 단청하였다.




        <새로 이건한 요사.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나. 寮舍(요사)
요사는 대웅전과 마주보는 위치에 건축되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동쪽으로 옛 원형 그대로 잘 이건 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ㄱ' 자형의 건물이다.
우측 3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측면 3칸 중 전면 1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2칸은 방이다. 왼쪽 2칸은 부엌이며 부엌 앞에는 방으로 꾸며져 있다.




        <스님의 처소와 서방으로 쓰이는 건물로서 아직 현판이 달려 있지 않다.>

다. 禪禪堂(선선당)
대웅전의 서쪽에 대웅전보다 한층 낮은 자리에 있으며, 다듬돌의 삼층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처마는 겁처마로 짜여 있으며 1997년에 새롭게 신축한 건물이다.
전면 3칸에는 각 칸마다 띠살문을 달았다. 우측면 1칸은 주지스님이 사용하는 방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름답게 단청된 새로 지은 극락전.>




        <극락전 현판 글씨>



라. 극락전
새로 신축한 극락전은 전통양식에 따라 잘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단단한 건물이다.

극락전에 기둥에는 지장보살을 찬탄하는 주련이 걸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극락전 주련.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恒河沙劫說難盡(황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해>
        지장 대성인의 위신력(자성)은
        항하사 모래알만큼 많은 법문으로도 전할 수 없으니,
        다만 보고 듣고 한 생각만 하는 공덕으로도
        인간 과 천상에 무량한 이로움이 있다.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과 그 오른 쪽에 지장보살.>




        <극락전에 안치된 천불상. >




        <극락전의 영단. 중앙에 글씨는 南無大聖引路王菩薩(남무대성인로왕보살)이라 적혀 있다.>




        <봉황사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산신각>




        <산신각 현판 글씨>


라. 山神閣(산신각)
대웅전 뒤편 높은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923년 등촉계 에서 세웠다.



        <산신각 내부에 안치된 산신탱화>


4. 소장문화재

가. 大雄嚴
문화재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1호.
지정일 : 1980년 6월 17일




        <옛 입구에 서 있는 봉황사중건불사비. 이 비석에 이름이 오른 많은 사람들의 신심으로 봉황사의 불사가 잘 이룩되었다.>


나. 浮屠(부도)
부도는 승려의 사리(舍利)나 遺骨(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을 말한다. 浮屠(부도)·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하기도 한다.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다비의식)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법제문도(法弟門徒)들이 선사(先師)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선사가 入寂(입적)한 뒤 정성을 다하여 세우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들어온 이후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부도를 세우는 장소는 가람배치와는 무관하게 사찰의 입구나 뒷쪽의  일정한 구역에 부도전(浮屠殿)을 두고 여러 부도를 이곳에 설치한다. 부도전의 신앙의례는 일 년에 한 번씩 시제(時祭)로 행한다.
승려의 기일제(忌日祭)와는 관계없이 매년 2월 또는 10월에 행한다.

봉황사 부도전은 사찰 입구 주차장의 동쪽 산비탈에 안치되어 있다.

모두 3기의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石鐘形(석종형)으로 크기는 높이가 145cm이다. 화강암의 기단 위에 범종형태의 탑신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탑면에 부도 주인공의 堂號(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지금의 중창불사를 하기 이전에는 이 길로 다녔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올 봄에도 꽃을 필 것이니 많이
                   참배하며 꽃구경도 하시기 바란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부도에 따르는 탑비(塔碑)가 있어야 그 부도에 안치된 분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데 봉황사의 부도에는 부도탑이 실전되어 부도의 모신 분이 누구인지 자세한 내력을 알 수가 없다.

동쪽에 자리 잡은 부도는 포월당섬대사(抱月堂暹大師), 증앙에 청파당김대사(淸波堂金大師), 서쪽에 송계당대선사(松桂堂大禪師)라는 당호가 탑면에 음각되어 있다.
그렇지만 탑비가 현전하지 않아서 부도의 주인공이 봉황사에 주석하던 대덕(大德)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산이 가파라 접근하기 힘이 들어 부도 사진을 찍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봉황사에는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 있다.
20여년이나 봉황사를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불공을 드려온 공양주 보살은 말 그대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다. 내가 잠시 들려 점심 공양을 청하였고 그 짧은 시간에 몇 마디 되지 않는 대화를 나누어 봤는데 불심이 가득한 살아 있는 보살의 화신임을 실감하였다.
누구라도 봉황사를 가면 꼭 공양주 보살을 만나보고 돌아오기 권하는 바이다.



        <수곡교를 건너 봉황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화류씨 집성촌의 고택.>




        <수곡교를 건너 뒤 돌아보면 아르마둔 팔각정과 시원한 임하호가 아름답게 펼쳐져 보인다. 여른에는 여기서 쉬어가면 운치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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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안동의 사찰 동비사(動飛寺) 청남 14-07-22 4714
114 안동의 사찰 용천사(龍泉寺) 청남 14-07-21 8567
113 a31127bu1.jpg 영주의 사찰 浮石寺(부석사). 청남 13-11-27 4746
112 안동의 사찰 高景寺(고경사) 청남 13-10-14 3432
111 상주의 사찰 南長寺(남장사) 청남 13-07-15 4700
110 김제의 사찰 金山寺(금산사) 청남 13-06-30 3369
109 의성의 사찰 孤雲寺(고운사) 청남 13-06-26 5171
108 안동의 사찰 海東寺(해동사) 청남 13-06-25 5152
107 안동의 사찰 靑龍寺(청룡사) 청남 13-06-22 4523
106 안동의 사찰 淸淨庵(청정암) 청남 13-06-13 4928
105 안동의 사찰 雪綠寺(설록사) 청남 13-06-12 4769
104 안동의 사찰 善臥寺(선와사) 청남 13-06-12 4161
103 안동의 사찰 佛光寺(불광사) 청남 13-06-08 4751
102 안동의 사찰 法齊寺(법제사) 청남 13-06-07 3879
101 안동의 사찰 白靈寺(백령사) 청남 13-06-06 4573
100 안동의 사찰 石佛寺(석불사) 청남 13-06-05 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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