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復(하복) 蘇東坡(소동파)
君不見(군부견) 西漢元光元封間(서한원광원봉간)
河決瓠子二十年(하결호자이십년) 鉅野東傾淮泗滿(거야동경회사만)
楚人恣食黃河鱣(초인자식황하전) 萬里沙回封禪罷(만리사회봉선파)
初遣越巫沈白馬(초견월무심백마) 河公未許人力窮(하공미허인력궁)
薪芻萬計隨流下(신추만계수류하) 吾君盛德如帝堯(오군성덕여제요)
百神受職河神驕(백신수직하신교) 帝遣風師下約束(제견풍사하약속)
北流夜起澶洲橋(배류야기단주교) 東風吹凍收微淥(동풍취동수미록)
神功不用淇園竹(신공부용기원죽) 楚人種麥滿河淤(초인종맥만하어)
仰看浮槎棲古木(앙간부사서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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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復(하복)
그대는 보지 않는가!
西漢(서한) 元光(원광) 元封(원봉) 연간
강둑이 瓠子(호자)에서 문어진 이십년
鉅野(거야)의 물 회수 사수에 가득 찬 것을.
초나라 사람들 황하의 잉어 포식을 하네.
만리사에서 봉선 마치고 돌아온 무제
비로소 무당에게 명해 백마를 강에 바치나
강의 신은 사람의 정성 다해도 용서하지 않네.
섶을 던져 온갖 계책 다해도 흘러가버리고
우리 군주 성덕 堯(요) 임군과 같고
모든 천신 직분 지키는데 강의 신만 무례하여
천제는 바람의 신 보내어 잡아두기로 하니.
밤중에 澶洲橋(단주교) 부근에서 북류가 일어나네.
동풍이 불어 범람한 물을 다 빨아드리니
신의 공덕으로 淇園(기원)의 대 베지 않아도 되고
초나라 사람들 보리를 심어 강가 개흙에 가득
쳐다보니 고목에 뗏목 하나 걸린 것 보이네.
【註】
光元(광원) 漢武帝(한무제)의 年號(연호)
瓠子(호자) 河北省(하북성) 濮陽縣(복양현)의 남쪽. 漢武帝(한무제) 元光(원광) 연간에 황하 는 여기서 범람하고, 그로부터 20여 년간 농작물은 결실을 못하니 武帝(무제)는 친히 그곳으로 가서 공사를 살펴보고 친히 瓠子歌(호자가)를 지어 공사를 독려했 다.
鉅野東傾淮泗滿(거야동경회사만) 漢武帝(한무제)가 지은 瓠子歌(호자가)에 「吾山平兮鉅野溢(산은 다 파묻히고 鉅野(거야)의 물은 넘치고) 齧桑浮兮淮泗滿(齧桑(설상) 땅은 침수되고 회수 사수의 강물은 넘치고 있다)」의 구절을 함축하고 있다.
鱣(전) 잉어의 일종.
萬里沙(만리사) 山東省(산동성) 掖縣(액현) 북쪽. 漢武帝(한무제)는 元封(원봉) 원년, 태산에서 封禪(봉선)하고 다음 해 만리사에서 비를 빌고, 태산에 글리도 돌아가는 도중 瓠 子(호자)에 들렸다.
封禪(봉선) 天子(천자)가 泰山(태산)에 올라가 흙으로 단을 모으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封(봉), 태산 기슭에서 땅을 쓸고 山川(산천)을 제사하는 것을 禪(선)이라 한다.
白馬(백마) 漢武帝(한무제)가 黃河(황하) 득 허물어진 곳에 가서 河神(하신)에게 빌고, 제물 로 백마와 玉璧(옥벽)을 강에 넣었다.
河公(하공) 黃河(황하)의 신.
薪芻(신추) 짚으로 된 도롱이. 瓠子(호자)에 간 武帝(무제)는 2일간 머물려 제사를 올리고, 군신과 시종들에게 명하여 장군 인하 일동 무두 섶을 지고 그것을 하천이 무너진 곳에 넣도록 했다.
百神受職(백신수직) 郊禮(교례)를 잘 행하면 星宿(성숙)의 운행도 바르게 된다고 함.
風師(풍사) 바람의 신. 箕宿(기숙)의 신. 箕宿(기숙)의 4성은 서쪽에 있는 키와 같은 형상인 데, 간극이 넓은 두 별을 혀라고 생각하고, 혀가 움직이면 큰 바람이 분다고 한 다.
約束(약속) 묶어 매는 것.
微淥(미록) 물이 맑은 모양.
淇園竹(기원죽) 武帝(무제)가 장군이하 모두 섶을 등에 지고 가서 황하 문어진 곳을 맊으려 햇는 데 동부 지방은 불이나 풀이 다 타고 없어서, 벌채 금지가 된 淇園(기원)의 대나 무를 베어 제방공사에 썼다.
淤(어) 진흙탕
浮槎(부사) 땟 목.
【解說】
熙寧十年秋 河決澶淵注鉅野 入淮泗 自澶魏以北皆絶流而濟 楚大被其害 彭門城下 水二丈八尺 七十餘日不退 吏民疲於守禦 十月十三日 澶州大風終日 旣止 而河流一枝已復故道 聞之喜甚 庶幾可塞乎 乃作河復詩 歌之道路 以致民願 而迎神休 蓋守土者之志也
희녕 10년 가을, 黃河(황하)가 澶淵(단연)에서 둑을 무너뜨리고 鉅野(거야)로 흘러들어 淮水(회수)와 泗水(사수)로 들어갔다. 그래서 澶州(단주) 魏州(위주) 이북은 강물이 그쳐 濟水(제수) 유역과 徐州(서주) 일대는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彭城(팽성) 성문 아래로 밀려든 물은 28척에 달하고, 70여일 물이 빠지지 않았다. 관리와 백성들은 방어에 피곤하고 지쳤다.
10월 13일, 澶州(단주)에 큰 바람이 종일 불었는데, 바람이 그치자 黃河(황하)는 함 줄기로 흘러 원래대로 복귀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우선 허물어진 곳을 보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르므로 이 河復(하부) 시를 지었다.
이를 노변에서 불러 백성의 원을 덜고, 神明(신명)의 가호를 받는 것이 지방 관원인 내가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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