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幹馬十四匹(한간마십사필) 蘇東坡(소동파)
二馬竝驅攢八蹄(이마병구찬팔제) 二馬宛頸騣尾齊(이마완경종미제)
一馬任前雙擧後(일마임전쌍거후) 一馬却避長鳴嘶(일마각피장명시)
老髥奚官騎且顧(노염해관기차고) 前身作馬通馬語(전신작마통마어)
後有八匹飮且行(후유팔필음차항) 微流赴吻若有聲(미류부문야유성)
前者旣濟出林鶴(전자기제출림학) 後者欲涉鶴俛啄(후자욕섭학면탁)
最後一匹馬中龍(최후일필마중룡) 不嘶不動尾搖風(부시부동미요풍)
韓生畫馬眞是馬(한생화마진시마) 蘇子作詩如見畫(소자작시여견화)
世無伯樂亦無韓(세무백낙역무한) 此詩此畫誰當看(차시차화수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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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幹(한간)의 말 열네 필.
나란히 달리는 두 필 여덟 개의 발은 모이고
머리 숙인 두 필은 갈개와 꼬리 가지런하며
한 필은 앞발에 몸을 싫고 뒷발을 들고
옆에 한 필은 몸을 움츠리고 길게 울고 있네.
나이 많은 말 탄 胡人(호인)이 뒤돌아보고 있는데
전생에 말인가 말의 말을 알아듣는 듯
뒤에 있는 여덟 필은 걷다가 물먹다가 하는데
얕은 물가에선 물먹는 소리 철벅 들리는 듯하네.
앞에 말은 이미 숲을 나와 학같이 섰는데
뒤에 것은 물을 건너며 먹이 쪼는 학같이 긴 목 느리고
제일 뒤에 한 필은 말 중에 용마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서서 바람에 꼬리만 나부끼네.
韓生(한생)이 그린 말은 진실로 산 말이며
蘇氏(소씨)가 지은 시는 마치 그름을 보는 것 같은데
세상에 伯樂(백낙)이 없었다면 韓幹(한간)도 없었으리.
이 시와 이 그림 볼 줄 아는 이 관연 있을까.
【註】
韓幹(한간) 唐代(당대)의 화가. 陜西省(협서성) 藍田縣(남전현) 사람. 王維(왕유)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추천으로 太府寺丞(태부시승)이 되었다, 말 그림을 잘 그리고 매년 서역에서 바치는 준마를 玄宗(현종)의 뜻을 받아 그 그림을 그렸다. 曹覇(조패)의 제자이다. 두보는 가끔 曹覇(조패)의 말을 칭찬하고 韓幹(한간)의 그림을 부족하다 했다. 조패는 기골이 높은 말을 그리고, 한간은 둥글고 약간 살이 찐 말을 그렸다. 당시 玄宗(현종)은 筋骨(근골) 行步(행보) 안정된 말을 좋아하여, 그때 까지 다리고 약동하는 것, 털색도 일정한 것이 점차 바뀌어 졌다. 韓幹(한간)은 유행 따라 그렸으며 寫實(사실) 적인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대 사람인 李公麟(이공린)과 趙孟頫(조맹부)의 교본이 되었다.
攢(찬) 모으다.
任前,擧後(임전,거후) 사람을 차는 버릇이 있는 말을 식별하는 말. 「뒤를 들고, 앞으로 체중이 쏠린듯하다.」라고 韓非子(한비자)에 있다.
奚官(해관) 晋(진) 나라 때 말을 기르는 곳을 관장하는 관리.
通馬語(통마어) 論衡(논형) 實知篇(실지편)에 廣漢(광한)의 楊翁仲(양옹중)은 鳥獸(조수)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의 마차를 끄는 말 가운데 절름발이가 있었다. 들에 방목하고 있는 말과 서로 울부짖고 있을 때, 楊(양)은 목장의 말을 눈이 안보이고 서로 욕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마부가 조사를 해보니 과연 거기 말은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吻(문) 잎 술.
俛(면) 엎드리다.
【解說】
熙寧(희녕) 10년(1077) 徐州(서주)에 있을 때 지음. 그해 3월 3일 청명절에 蘇軾(소식)은 城外(성외)에 있었으나, 王詵(왕선)이 「韓幹馬十二匹, 共六軸」을 보내와 題跋(제발)을 해 달라고 해서 「韓幹馬圖書」라는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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