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東坡(소동파)
海棠篇(해당편) 1080~1084
元豊(원풍) 2년(1079) 12월 29일, 100일간의 구금 생활이 풀려 蘇軾(소식)은 御史臺(어사대) 감옥에서 나왔다. 곧 설을 식고, 가족은 동생 蘇轍(소철)에 맡기고 아들 邁(매)만을 대리고 黃州(황주) 配所(배소)로 떠났다.
2월 1일, 黃州(황주)에 도착하였다. 황주는 武昌(무창)의 동남동 60키로, 양자강 왼편에 있다. 對岸(대안)운 武昌(무창)의 서편 산이 이어져 있고, 樊溪(번계)가 흘러 들어가는 樊口(번구)도 鯿魚(편어)가 잡히는 곳으로 유명하며, 黃州(황주) 측 강가에 있는 赤壁(적벽)과 함게 배를 타고 뱃놀이하는 행동반경 속에 있다.
樊口(번구)에 술집을 경영하는 潘(반)씨 집에 가서 10여일이나 풍랑으로 돌아올지 못하는 일들은 황주 지사에게는 괴운 일이었다. 蘇軾(소식)은 아직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黃州(황주) 생활은 蘇軾(소식)에게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형의 가족까지 부양하던 蘇轍(소철)은 한 때 형이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형의 가족을 대리고 黃州(황주)에 가서 얼마 뒤 혼자 筠州(균주)로 돌아갔다. 가족이 다 모여 살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나, 무에 가까운 녹봉으로 생계가 되지 않았다. 장남 邁(매)는 22세, 차남 迨(태)는 11세, 남남 過(과)는 9세이다.
黃州(황주)에 와서 2년 째, 생활은 날로 어렵고, 먹는 시량도 없었다. 이것을 본 馬夢得(마몽득)이라는 사람이 공지를 빌려 蘇軾(소식) 일가가 경작해서 양식을 얻도록 배려 해주었다. 繼室(계실)인 王(왕)씨는 양잠을 하였다.
어언 소도 한 마리 생겼다. 그 노동의 괴로움과 즐거움, 수확에 거는 기대 등을 東坡八首(동파팔수)에 적었다. 蘇軾(소식)은 이 경작지를 東坡(동파)라고 이름 하였다. 黃州(황주) 북쪽에 岐亭(기정)이라는 곳에 隱者(은자)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어 가끔 왕래하였으며, 책을 빌려주는 胡定之(호정지)라는 사람도 있었다.
黃州(황주)에 온지 3년 만에 東坡(동파)에 인접한 황무지를 사서 書齋(서재)를 짓고 스스로 붓을들어 東坡雪堂(동파설당)이라는 扁額(편액)을 걸었다. 대설 중에 당이 완성되었으므로 사방 벽에 雪景(설경)을 그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東坡居士(동파거사)라고 호를 정했다.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東坡(동파)는 풍류를 멀리하지 않고 많은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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