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季常所蓄朱陳村嫁娶圖(진계상소축주진촌가취도)
二首(이수) -2- 蘇東坡(소동파)
我是朱陳舊使君(아시주진구사군) 勸農曾入杏花村(권농증입행화촌)
而今風物那堪畫(이금풍물나감화) 縣吏催錢夜打門(현리최전야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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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진계상가 소장한 주진촌 嫁娶圖(가취도) 이수
나는 주진촌의 옛 지사였고
권농하러 행화촌에 간일도 있었네.
허나 이제 그 동내 풍물 그릴 될 수 없는데
현리가 세금 독촉 밤에도 문 두드리고 다니니.
【註】
陳季常(진계상) 蘇軾(소식)이 鳳翊府(봉익부) 簽判(첨판)일 때 지사였던 陳希亮(진희량)의 아들.
朱陳村(주진촌) 江蘇省(강소성) 豊縣(풍현) 동남에 있다. 白居易(백거이) 주진촌시에 「풍현을이지 나 산중으로 약 천리 가면 산속 깊이 세상과 격리해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풍속은 순박하고 마을엔 朱(주)씨와 陳(진)씨 두 성만 대대로 서로 혼인을 하며 안주하고 있는데 다 장수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라 함.
杏花村(행화촌) 朱陳村(주진촌) 이웃에 있는 마을.
【解說】
위의 시는 洛陽(낙양)의 친구 집에 들렀을 때 ‘朱陳村嫁娶圖(주진촌가취도)’를 보고 지은 것이다. 위에서는 백성들이 重稅(중세)에 시달려 생활이 궁핍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였다.
소동파는 전날 徐州知事(서주지사)였을 때 권농하기 위해서 관내의 朱陳村(주진촌)에 인접한 杏花村(杏花村)에 가본 적이 있었다. 朱氏(주씨)와 陳氏(진씨)의 집성촌으로 대대로 혼인을 맺어왔던 당시의 주진촌은 깊은 산골에 있어서, 관청의 간섭이나 外地(외지)로의 行役(행역)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縣(현)의 관리가 세금을 독촉하기 위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니, 어려워진 살림에 그림에서와 같이 시집장가 가는 혼례의식을 치르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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