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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북후부근 ] 원주 변씨(邊氏) 간재(簡齋)선생 종택.

청남이메일

 

 

원주 변씨(邊氏) 간재(簡齋)선생 종택.

 


위치: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 (서후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1호(2003.12.15 지정)

안동 시외 버스정류장을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강둑을 따라 포장된 지방도로가 있다.
송하교에서 갈라지는 그 길은 서후면 소재지로 가는 길인데 서후면에는 안동권씨, 안동김씨, 안동장씨 등 고려 삼태사의 묘소를 비롯하여 학봉 김서일선생 종택, 봉정사, 광흥사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송하교에서 약 6km 정도를 가면 길 왼편 아늑한 산 아래에 간재선생 종택이 있는데, 길가에서 불과 20m도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거기에 간재종택과 간재선생이 강학을 하던 간재정, 사당, 정충효문인 홍살문 등, 16~18세기에 걸쳐 창건 및 중수된 건물이 원형이 잘 보전된 채 자리 잡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종택 가까이 가보면 뒤로는 작은 산이 병풍처럼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모진 찬바람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푸른 벼가 자라는 넓은 들이 펼쳐져 시원하게 멀리 시가 뚫려 보기만 해도 답답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만 같다.

종택 앞에 작은 정자와, 그 정자 앞에 마침 만발한 연꽃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데, 오늘은 내가 운이 좋게도, 연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우아한 종부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침 일찍(오전 6시경)에 그곳을 가니 동내 개가 멍멍 짖어 대서 그랬는지 대청마루에 중년의 아름다운 부인이 나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인사를 나주고 몇 마디 말을 거넜는데 역시 불천위를 모신 종부답게 기풍이 있었다.

종부가 원하지 않아 사진에 담는 것은 삼가 했다.

종택 왼편 산기슭에 정려각이 있었는데, 잡초가 무성하고 돌계단이 가파로와 오르기 힘들어도 또 언재 오랴?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서 사진에 담아왔다.





종택 표시석.

 

 

簡齋(간재) 邊中一(변중일)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진, 안동시 서후면 금계동 음지 마을의 서당에 몇 명의 학동들이 모여 천자문을 낭랑하게 읽고 있었다.

그 중 눈빛이 유난히 초롱초롱한 한 학동이 무릎으로 결어 훈장 앞으로 나간다.

 

선생님, 어느 책에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잘 설명해 노았습니까?”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공손히 얹고 스승을 우러르는 그 학동은 예닐곱 살 청도되어 보이나 의젓함과 단정함이 몸에 배어 있다. 훈장은 어련 녀석이 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는지라 저극히 놀랐으나, 효도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득해 하면서 孝經(효경)’이라 답해 준다.

 





멀리서 본 종택 전경

 

 

그 후로부터 소년은 자기에게는 정도가 높은 것이었지만 열심히 孝經(효경)을 읽으면서 몸소 실천해 나갔다.

밖에서 강, 대추등과일이 생기면 가슴에 풍었다가 반드시 집안 부모님께 갖다드리고,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며, 외출 시는 꼭 허락을 받았고 돌아와서는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하여 그 소년은 말 한 마다 랭동 하나하나에 어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어른블로 하여 금 펀안한 마음을 가지지도록 하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라는 것을 갚이 느끼며 자라났다.

 

이 소년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충효의 본보기가 된 간재(簡齋) 변중일 (邊中一)이다.

 




입구에 있는 홍살문.

邊中一(변중일)이 섭 오륙세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이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하고 계셨다. 그는 어머님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잔심부름을 해 드리고, 말벗이 되어 위로해 드리면서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종기는 더욱 크게 번져 갈 뿐이었다. 근심 싸여 있는 그에게 의원이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어 종기에 붙이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는 꿩 사냥에 나섰다.

때는 설을 며칠 앞 둔 한겨울이어서 온 산천이 흰 눈으로 덮여 있었으나, 모친의 종기를 낫게 해 드려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꿩 사냥에 나선 것이다.

 




종택으로 들어가는 길.

 

 




종택 안내판

 

 

몇 날을 꿩을 찾아 헤맸으나 맨손으로 나선 꿩 사냥이었으니 중일에게 접힐 꿩은 없었다. 눈 앞옆에 날아다니는 꿩을 보고도 잡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끝내 구하지 못하고 그는 자기의 효성 부족함을 탓하면서, 신음하고 계실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별 차도가 없는 어머님 옆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상처를 돌보고 있는데, 난데없는 꿩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邊中一(변중일)은 기쁘고 놀라운 마음으로 그 꿩을 잡아 고약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종기에 붙였더니 신통 하게도 씻은 듯이 낫는 게 아닌가!

 

 

 

 




종택 앞에 있는 정자와 연못





종택에서 본 바깥 풍경

 

 

마을 사람들은 중일의 지성어린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입을 모았다. 중일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이 부산, 밀양, 대구, 성주를 거처 올라오면서 닥치는 대로 약탈, 살인, 방화를 하는 판국이었다. 마침내 왜병들이 가까운 곳에까지 다다랐다는 소문이 파다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란을 떠났다.

 

그런데, 변중일은 조모와 모친이 병쇠하여 피난을 하기가 몹시 어려웠으므로 부득이 다른 식구들만 보내고 혼자 남아 두 어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총포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므로 그는 먼저 모천을 업어 뒤곁 삼밭에 모셔 두고, 조모를 업고 피하려 했으나 조모의 기운이 워낙 쇠하여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연못 둑에 선 소나무




종택 대청마루에 걸린 추사체 忠孝古宅(충효고택)  글씨



              
閒處自然隨事簡(한처자연수사간)
終日無語對靑山(종일무어대청산)
寶貨用之有盡(보화용지유진)
忠孝享之無窮(충효향지무궁)
<해>
한가로이 자연 속에 사니 일마다 간결하고
종일토록 말없이 천산만 대하노라.
보화는 쓰면 한도가 있지만
충효는 아무리 즐겨도 끝이 없도다.




종택 서편 야산에 있는 정려각.

 

 

그래서 조모를 그 대로 누워 계시게 하고는 조모가 드실 탕약을 달이고 있는데, 총칼을 든 적병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자비한 적병들은 탕약을 달이고 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발길로 차고, 손으로 이리 치고 저리 쳐서 넘어지게 한 후에, 당장에라도 죽일 양으로 창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나를 죽일지언정 조모는 헤치지 말라. 내가 죽으면 조모는 자연히 돌이 가시게 되나지 탕약만이라도 드시게 한 뒤에 나를 주여라.”

 

고 말했다.

그렇게도 포악스럽던 적병들은 당당하고 위엄 있는 변중일의 효성에 순간 움찔하고서 있을 뿐이었다. 점시 후 그는 차분히 탕약을 짜서 조모에게 드련 후 왜병을 향해 이제는 죽여라고 호령했다. 그러자, 적뱅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죽이지 않겠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리 준 효자다. 우리가 여러 곳을 지 나 왔지만 이런 효자는 처음 본다.”

 

고 하면서 그를 일으켜 얼굴과 옷의 먼지를 털어 주있다. 그리고 이어서

 

조모 곁에서 안심하고 시중을 들어라. 우리가 떠난 뒤에 다른 부대가 오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 신표를 그들에게 보이면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고 하면서, 푸른 기 하나와 비수한 자루를 내어 주었다. (기는 없어졌으나 벼수는 아직 까지 진해 오고 있다.)

 

 

 

 

그리고 맏형 희일(喜一)과 더불어 홍의장군 곽재우의 진중으로 달려가서 곽장군을 도우면서 왜병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다. (용사록에 실려 있음)

 






정려각 내부에 있는 글씨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忠孝邊中一之閭(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충효변중일지려)



    종택 대문



    종택 대청마루

 

 

난리가 끝나자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행과 충성을 조정에 적어 올려 표천이 내리도록 청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완강히 거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또 한 번 탄복하였다.

 

후세 사람들에게 깊은 효성과 높은 충절의 귀감이 된 邊中一(변중일) 1660(현종 1) 1020얼에 86 세를 얼기로 천수를 다하였다.

그 후 1686(숙종 12)에 그의 충효 예절을 거리기 위하여 충효각을 지으라는 어명이 내려, 안동시 서후면 금계동에 정충효각을 세워 그 유적이 오늘까지 천해지고 있다.

 




      종택 대문



     종책 안에 있는 별채

 

 

왜군들의 횡포가 점점 포악해지면서 북상하게 되니 임금이 도성을 떠나 북으로 몽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邊中一(변중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만세에 불변하는 떳떳한 일일진데 사직이 허 물어지는 이 때, 비록 보잘 것 없는 촌로일지나 어찌 충성을 다하지 않으리.”

하면셔 백미 백 섬을 상주 진영의 진장 김각상에게 군랑미로 전했다.

 




      사당 서편에 있는 건물인데 제호를 읽지 못했다.



      종택 뒤에 있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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