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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도산부근 ] 오천 군자리

청남이메일
오천 군자리.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부터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약 21대에 걸쳐 600년간 세거(世居)해 오던 외내[烏川] 마을이 안동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자 문중의 건물(建物)들을 한곳으로 이건한<군자리>로 오천 문화재단지(文化財團地)라 부르고 있다.

신라 왕실의 후예(後裔)인 광산 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光山)의 토성(土姓)으로 고려왕조 후기에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서 명문(名門)으로 발전한 왕경(王京)에 기반을 둔 가문이었는데 그 한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오천의 입향조(入鄕祖)는 농수(聾 ) 김효로(金孝盧)이며 그의 아들 연(緣)과 유(綏)는 모두 조선왕조 중종(中宗)때의 명신(名臣)으로 명망이 드높았다.

안동에 광산 김씨는 풍천 구담, 와룡 가구, 예안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려 왔는데 그중 한 갈래가 예안의 오천에 세거하여 <예안파>가 되었다.

예안읍지는 기록하여 오천(烏川)은 현의 남쪽 오리에 있다. 마을사람 김부인[호:山南], 김부필[後彫堂], 김부신[養正堂], 김부의[ 淸亭], 김부륜[雪月堂] 등이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도의(道義)와 덕행(德行)이 일시에 알려저 한강(寒岡)정구(鄭逑)선생은 이르기를 "외내 한마을은 모두가 군자(君子)다"라고 했는데 그로 인하여 뒷사람들이 '군자마을'이라 불렀다. 또 '七君子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김부인등 '富'자 항렬 5인은 모두가 종형제 사이다. 거기에 내외종간(內外從間)인 금씨(琴氏)[일휴당(日休堂)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두 분을 포함해서 일컫는 말이다.
  


▣ 입향조(入鄕祖) 김효로(金孝盧, 1455∼1534)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또는 춘포(春圃)이며 회(淮)의 아들이다. 풍산현 도양에 살다가 성종년간에 예안으로 옮겨 정착하므로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조가 되었다. 퇴계는 그의 <操行卓異>하고 <善慶裕後>한 덕행(德行)을 높이 칭송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참판에 증직되었고 숙종 임오년에 사림에서 현의 동쪽에 사당을 세워 이계양(李繼陽)[퇴계의 조부]과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모시고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常享祝文] 從德先賢 鄒魯玆鄕 追遠報本  久難忘

뒤에 후손이 다시 사당을 짓고 孝盧의 曾孫 垓[近始齋]를 병향(竝享)하여 영세토록 향례(享禮)를 치르고 있다.
  


▣ 김연(金緣, 1487∼1544)

자는 자유(子由), 호는 운암(雲巖) 효로(孝盧)의 아들. 어머니는 양성(陽城) 이씨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춘추관을 거쳐 50세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강원도관찰사,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58세에 경주관아에서 서거하니 문종과 동궁[인조]이 각각 부의(賻儀)를 내렸고 이듬해 3월에 예관(禮官) 채무일(蔡無逸)을 보내어 사제(賜祭)케 했다.

박성(朴惺)[대암(大庵)]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정범조(丁範祖)[大司諫]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는데 글씨는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썼다.
  


1. 오천(烏川) 단지(團地)의 문화재(文化財)

가. 숭원각(崇遠閣)

광산 김씨의 선대(先代) 유물(遺物)과 고문서(古文書) 및 전적(典籍)을 보관하는 전시관(展示館)이다.
이곳에 보관된 문헌과 유물은 김씨문중 21대 600년간 대대로 내려오며 빠짐없이 이어지는 귀중한 가보로서 사학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0년 3월 2일부터 보존 전시된 이들 문헌은 490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판 액자는 후손 김택진(金澤鎭) 공의 글씨다.

나. 별묘(別廟)와 주사(廚舍)[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

별묘(別廟)는 오천 입향조 [김효로(金孝盧)]와 그의 증손[김해(金垓)]을 부조위(不 位)로 모신 사당이다. 주사(廚舍)는 후조당(後彫堂)에 딸린 재사(齋舍)로 원체는 아래윗체로 된 고방이 달려있는 임란 이전의 건물이다.

다. 후조당(後彫堂)[중요민속자료 제227호]

종택에 딸린 별도건물로 임난이전의 건물인데 가구(架構)는 오량(五梁)을 꾸몄고 대량(大樑)위에 종량(宗樑)이 소슬 대공(大工)으로 받혀진 특이한 공법으로 부연(附椽)이 달려있는 12칸 곡자(曲子)형 집이다. 방 2칸이 있고 바깥 사랑방으로 툇마루가 돌아가며 깔려있다. 후조당(後彫堂)의 현판은 퇴계(退溪)의 친필이다.

라. 탁청정(濯淸亭)[중요민속자료 제226호]

탁청정(濯淸亭) 김유의 종택에 딸린 정자로 중종 36년에 세웠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와가(瓦家) 팔작(八作)지붕이다.
대청은 높은  막돌 주초(柱礎)위에 허주(虛柱)를 세워 루(樓)를 만들었으며 누마루의 둘레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欄干)대를 붙이고 온돌방의 전면과 측면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기둥은 원주(圓柱)이고 가구(架構)는 주심포(柱心包) 계통인데 이익공(二翼工) 받침에 외목도리에 모서리를 정자(井字) 모양으로 짜올린 특수한 공법이 돋보인다.
현판은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다. 마루에는 퇴계(退溪), 농암(聾巖), 금계(錦溪) 등 당시 명현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마. 침락정(枕洛亭)[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0호]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가 지은 안동 사족의 전형적인 정자다. 아담한 건축양식에 들보가 괴목(槐木)으로 된 점이 이채(異彩)롭다. 매원은 자(字)를 이지(以之)라 하며 근시재(近始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퇴계의 조카인 재(宰)의 딸이다. 1580년에 나서1646년에 졸했다. 처음 대암(大庵)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온 한강 정구(鄭逑)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광해군때 세상이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만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분려(奮勵)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에도 영달(榮達)을 탐탁이 여기지 않아 낙동강 언덕 수려한 곳에 정자(亭子)를 얽어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군자리 역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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