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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임동부근 ] 흥해 배씨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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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 배씨 종가

 


이 건물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초는 예안면 도목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3년 12월에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안동에서 영덕방면으로 가다보면 안동대학 조금 못 가서 송천동 마을 중심을 가르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왼쪽편 산기슭에 자리한다. 주소는 안동시 송천동 1017번지다. 이 집의 명칭을 문화재 지정에서는 <금역당 사당 및 종가>라 하였고 또 <임연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배용길[琴易堂]과 배삼익[臨淵齋]은 모두가 안동 입향조 배상지[栢竹堂]의 직계후손이므로 <흥해 배씨 백죽당 종택>으로 부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배씨는 본래 신라 6부의 하나인 한지부의 부장(部長) 지타(  )를 원 시조로 하는 경주 배씨기도 하지만 고려 개국 1등 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여 대대로 고려[충렬왕-충선왕]의 벼슬을 지내다가 익대좌명공신(翼戴佐命功臣)이 된 전(詮)이  흥해군(興海君)에 봉해 짐으로 경주에서 흥해로 분적하게 된 흥해 배씨가 안동에 입향하기는 흥해군의 아들 상지(尙志), 상공(尙恭) 형제부터이다.

고려 조정에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낸 배상지(裵尙志)는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동지 71인과 함께 두문동에 숨어 항거하다가 이씨 조정의 모진 박해 때문에 형제가 영남으로 낙향하여 안동 금계에 처음 살았다. 절조의 상징으로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둘러 심고 그 속에 집을 지어 백죽당(栢竹堂)이라 편액하고 아호로 삼았다. 함께 전서(典書)를 지낸 그의 아우 배상공(裵尙恭)은 옛 동료 류종혜(柳從惠)와 같이 하회(河回)에 자리잡고 살았다.  

백죽당은 아들이 4형제인데 맏아들 권(權)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고 둘째 환(桓)은 관찰사(觀察使), 셋째 남(楠)은 문과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 넷째 강( )도 문과를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는데 모두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 사람들은 이분들을 지칭하여 배문(裵文)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 후손들은 문행이 있고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으며 6대손 천석(天錫)이 금계를 떠나 낙동강이 구비치는 산수 좋은 도목촌(桃木村)[옛 월곡면 도목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의 아들 삼익(三翼)이 퇴계 문인으로 문장 글씨에 뛰어나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는데 그의 친구 구봉령(具鳳齡)이 마을 이름을 도맥(道 )으로 부르라고 권했으나 그는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산천이 그윽하고 아름다워 마치 무릉도원같다는 뜻]으로 정했다는 사연이 영가지에 나와 있다.

임연재의 아들 용길(龍吉)이 김학봉, 류서애의 문인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장(義兵將)으로 공헌 원종훈(原從勳)에 책록 되었고 학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아래에서도 문행이 있는 선비가 수두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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