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인의 시조 金弘道(김홍도)
1745(영조 21) ∼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 단구(丹邱) · 고면거사(高眠居士) · 취화사(醉 怜 士) · 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怜署怜員)이 되었다. 많은 활동을 하다가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 · 도석 인물(道釋人物) · 풍속 · 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 단원법 ’ 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 〉(개인 소장) ·〈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 (간송미술관 소장) ·〈 선인기려도 仙人騎驢圖 〉 · 〈 단원도 檀園圖 〉(개인 소장)와 섭우도 涉牛圖 · 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肋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등이 있다. 출전<민족문화대백과사전>
먼 듸 우러냐
먼 듸 우러냐 품의든 님 가랴
이제 보내고도 반 밤이나 남아시니
라리 보내지 말고 남은 졍을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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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먼 곳에 있는 닭이 울었느냐, 품속에 든 임이 가려하내.
이제 보내고도 밤이 반이나 남았으니
차라리 보내지 말고 남은 정을 더할 것을.
【주석】
•먼 듸~ 먼 속에
•우러냐~ 울었는가.
•가랴 ~ 가려고 하네.
•반 밤이나~ 밤이 반 만금
•졍을 펴리라~ 정을 펴리라.
춘수(春水)를 여가
춘수(春水) 를 여 가로 노시니
물 알 한늘이오 한늘 우희 물이로다
차중(此中)의 노안(老眼)의 뵈 곳든 하중(霞中)인가 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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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봄 강물에 배를 띠워 가는대로 노아 두니
물 아래 하늘이 비치고 하늘위에 물이 비치네.
이 가운데 늙은이 눈에 보이는 곳은 노을 가운데 인가 하네.
【주석】
•춘수~ 봄의 강물
•를 여~ 배를 띠워
•가로~ 가는 대로
•노시니~ 노아 둔다.
•알~ 아레
•노안~ 노인의 눈
•뵈 곳든~ 보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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