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經(시경) 秦風(진풍)
진(秦)은 원래 농서(隴西)의 계곡 이름이며, 우공(禹貢) 때 옹주(雍州) 성(城)에 해당하고, 조서산(鳥鼠山) 부근이며 지금의 협서성(陜西省) 서안(西安) 흥평현(興平縣)에 해당되는 지방이다.
진풍(秦風)이란 진국(秦國)의 가요이다.
요(堯) 나라 때, 백예(伯翳)라는 사람이 있었다. 현신(賢臣) 고도(皐陶)의 아들이며, 우(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린 공이 있어, 영(嬴)이라는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그 뒤 백예(伯翳)의 후손은 서적(西狄)에서 서쪽 변두리 땅을 차지하며 살았다. 육세(六世)의 손 대락(大駱)은 성(成)과 비자(非子)를 낳았다. 비자(非子)는 주(周)의 효왕(孝王)에 사사하여 말을 잘 길었으므로, 효왕(孝王)은 그를 봉하여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부용(附庸)이란 제후의 나라에 부속되는 고을이다.
효왕(孝王)에서 삼대 후에 선왕(宣王)때에 이르러, 견적(犬狄)이 성(成)의 일족을 몰살했다. 선왕(宣王)은 비자(非子)의 손 진중(秦仲)에게 대부(大夫)를 명해서, 비로소 차마(車馬)와 예악(禮樂) 시어(侍御)와 같은 제도를 받아드리게 되고, 이로서 서융(西戎)을 치게 했으나, 싸움에서 저서 죽었고, 유왕(幽王)도 견적(犬狄)에게 살해되어 서주(西周)는 망하고 말았다.
평왕(平王)동천(東遷)이후, 진중(秦仲)의 손 양공(襄公)은 군사를 보내어 주(周)를 구했다. 왕은 양공(襄公)이 견적(犬狄)을 쫓은 공을 표상하여, 그를 봉(封)하여 제후(諸侯)로 하고, 기풍(岐豊)의 땅을 차지하게 해서, 비로소 제후(諸侯)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공(襄公)은 우(禹)의 서도(西都) 기내(畿內) 800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진풍(秦風)은 모두 10편 있는데 처음의 다섯 편은 진(秦)중(仲)이래 진(秦)의 창업시대의 일을 읊었고, 뒤에 다섯 편은 그보다 약 100년 뒤 목공(穆公)과 강공(康公)시대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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