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經(시경) 豳風(빈풍)
빈(豳)은 지명이며, 주(周)의 옛 지역이지만, 주(周) 시대의 나라는 아니다. 순(舜), 우(禹) 시대에 기(棄)라는 사람이 후직(后稷)이 되었다. 그리고 기(棄)는 태(邰) 땅을 다스리도록 책봉되어, 후세에 주(周)의 시조로서의 후직(后稷)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은 희(姬)씨다. 그 자손들이 역대 조업을 이어 농잠(農蠶) 의식(衣食)을 위해 힘썼으나, 하(夏)가 망함에 따라, 농직(農稷)을 그만두고, 그 관직을 잃어서, 융적(戎狄) 땅으로 갔다.
기(棄)로부터 10여세 뒤, 공유(公劉)에 이르러 또 후직(后稷) 벼슬이 되어, 빈곡(豳谷) 사이에 나라를 세워, 농경을 하고 은덕을 베푸니, 백성이 이를 듣고 사방에서 모여들어, 나라가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주(周)가 일어난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10세후 고공단부(古公亶父)에 이르러 또 융적(戎狄)의 난이 일어나자, 날을 피해 기산(岐山) 기슭에 옮겨 앉게 되었다.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적인(狄人)의 침략을 받고 무저항주의를 취해, 살던 땅을 버리고 양산을 넘어 기산(岐山) 밑에 읍을 정하니, 사방 사람들이 그를 인인(仁人)이라 하여 그를 따를는 사람이 구름과 같이 많았다.
고공(古公) 은 융적(戎狄)을 가르쳐, 융적(戎狄)의 풍속을 고쳐, 중화(中華)의 풍물을 배우게 해서, 융화 정책을 쓰니, 융적(戎狄)도 성곽 궁실을 경영하고, 관직제를 만들어, 융적(戎狄)의 백성들은 이를 가악(歌樂)으로 부르며 즐거워했다.
고공(古公) 뒤, 그의 동생 계력(季歷)이 대를 이었다.
계력의 아들이 서백창(西伯昌)이며, 창(昌)의 아들이 무왕(武王)이고 주왕조(周王朝)를 열었다. 무왕(武王)은 천하를 통일하여, 조상을 추존(追尊)해서 고공단부(古公亶父)를 태왕(太王), 계력(季歷)을 공계(公季), 창(昌)을 문왕(文王)이라 부르게 했다. 주(周)가 천하를 통일하는 천명을 받은 것은 문왕(文王) 때부터라 한다.
이와 같은 주나라 발상지인 이 땅의 노래가 豳風(빈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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