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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權幸(권행) 高麗建國功臣 安東權氏始祖

청남

 

 

權幸(권행) 高麗建國功臣 安東權氏始祖
權幸(권행) 고려건국공신 안동권씨시조

 

徐四佳(서사가) 居正(거정)이 성종 7년 병신(1476)에 成化譜(성화보)를 편찬하였는데 그 서문에 「權太師(권태사)공은 원래 신라 宗姓(종성) 金氏(김씨) 었는데 古昌(고창)군수로 있을 때 견훤이 「 왕도 경주에 침입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니 고려여 태조가 이를 무찌르기 위하여 견훤과 대전하게 되었는데, 태사공이 古昌(고창)의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견훤은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우리도 고려에 歸附(귀부)하여 이 痛墳을 설치하지 않으리오.」하여 태조에게 歸附(귀부)하니 태조가 「幸(행)은 능히 機(기)에 밝고 權道(권도)에 통달하다.」 하여 權氏(권씨)를 사성하고 본군을 식읍으로 하며. 고창군을 승격하여 安東府(안동부)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공의 묘소는 500여년 동안 실전되었는데 성화 년간에 平昌(평창)郡守 雍(옹)(태사공 17대손)이 「동국여지승람」을 보고 尋得(심득)하여 加封(가봉)하고 다시는 失傳되지 않기 위하여 遺命(유명)으로 자신을 階下(계하)에 附葬(부장)하게 하였다.
雍(옹)의 사후 아들 裕(유)와 綽(작)이 선친의 묘를 계하에 부장하고 그 전말을 綽(작)이, 사위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 찬의 묘비를 세우고, 태사공  묘 앞에도 短碣(단갈)를 세워 두었다. 이 묘비는 뒤에 부러졌음으로 선조 21년 무자(1588)에 경상도 관찰사 權克智(권극지)가 다시 세웠는데 외손이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이 찬하고 21대손 鳶魚亭(연어정) 權晤(권오)가 글씨를 썼다 한다.
그 후 신축(1661)에는 영주군수 權聖源(권성원)이 신도비를 건립하였고 숙종 26년 경진(1700)에 비문이 파손되었음으로 磨石(마석)하여 다시 刻字(각자)하였으나 마모가 너무 심하여 영조 22년 병인(1746)에 관찰사 權赫(권혁)이 改堅(개견)하였다.
공의 묘소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국 십대명당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天燈山(천등산)으로부터 主龍(주룡)이 癸方(계방)에서 入首(입수)하여 子坐(자좌) 午向(오향)에 자리하며 乾巽得午破(건손득오파)의 玉女端坐形局(옥녀단좌형국)아라 한다. 

【高麗太師權幸墓】
 
在府西本破谷里自太師葬後號其洞曰陵洞嘉靖丁巳
府使權紹令陵下居姓孫權審行夢斗外孫柳公季易土改莎每寒食上塚行事 祝文天燈南麓壽封斯崇功巍德洽裕裔隆宗每歲寒食精禋是恭陟降如在於昭盛容萬曆戊子監司權克智改立石西厓柳成龍撰墓表曰安東府西十里而遠有山曰天燈其中坎坐离向之原實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權公冠履所藏也公諱幸本新羅宗姓羅末守古昌郡以地迎麗祖有功得賜姓權金之爲權自公始其後子孫益大以蕃歷麗以及 李朝冠冕不絶世之數名宗巨閥必以權氏爲首其亦盛矣始公旣葬墓道闕顯刻世代愈遠兆域堙廢莫有知其處者成化間公十八代孫平昌郡守雍乃極意尋求於墓傍獲誌石就加封樹臨歿遺命自 祔葬其原爲守護計卽墓南第二塚是也而雍之子裕綽等承雍之志立石以標之慵齋李公宗準識其陰萬曆戊子公遠孫今觀察使君克智以旌節鎭南服巡到于此展省松檟合宗人之在一境者以祭之旣卒事役隸誤觸石仆地而壞觀察使卽與宗人謀買石䥴治將涓吉改樹以成龍亦係公外派屬記其事余竊惟公之勳業載史策嗣息具譜牒惠澤在一邦無容更贅謹略具立石顚末俾來者有考焉按譜稱公爲太師而舊刻不載故疑不敢加云勝覽

(1)
<해>
   (1) 고려태사 權幸(권행) 묘
  안동 부 서쪽에 있는 破谷里(파곡리)를 太師(태사)를 장사 지낸 후 그 동래를 陵洞(능동)이라고 한다.
 嘉靖(가정) 丁巳(정사), 부사 權紹(권소)가 능 아래 사는 姓孫(성손) 審行(심행) 權夢斗(권몽두)와 외손 柳季易(류계이) 공은 매년 한식에 묘에 가토하는 행사를 하게 하였다.
 祝文(축문)
 天燈山(천등산) 남쪽에 봉안하니 그 공덕을 숭상하고, 높은 덕은 흡족하여 후손이 융성해서 매년 寒食(한식)마다 정성 드려 제사 지내오니 강림하사 흠양 하시옵소서.
  萬曆(만력) 戊子(무자) 監司(감사) 權克智(권극지)가 立石(입석)을 다시하고 西厓(서애) 柳成龍(유성룡)이 撰(찬) 하였는데, 墓表(묘표)에 이르기를 안동부 서쪽 멀리 10리에 한 산이 있는데, 天燈山(천등산)이라 하고 그 산속 坎坐 (감좌) 离向(이향) 언덕에 고려삼한벽사삼중대광아부공신 權公(권공)의 시신을 소장한 곳이 있다.

  公(공)의 諱(휘)는 幸(행)이며, 본래 신라 宗姓(종성)이고, 신라 말 고창군을 수호하다가, 고려 시조에게 功(공)을 세워, 김씨(김씨)에서 권(권)을 사성 받았다.
 공(공)은 權氏(권씨)의 始祖(시조)가 되어 그 후, 그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고려를 거처 李朝(이조)에 이르는 사이에 官爵(관작)에 오른 자가 끊임없이 생겨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며, 거대한 종중으로는 權氏(권씨)가 당연 으뜸으로 번성하였다.

 처음 公(공)을 장사 지내고 묘를 만든 지 세월이 아득히 멀리 흘러, 묘역이 황폐해져서 그 장소를 알지 못하고 지내왔는데, 成化(성화) 연간에 公(공)의 16代孫(대손) 平昌(평창)군수 雍(옹)이 이에 적극적으로 찾은 결과 장하여 시조 묘를 수호하도록 유언을 하니, 墓(묘) 남쪽에 있는 제2의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雍(옹)의 자녀 裕(유)와 綽(작) 등이 雍(옹)의 뜻을 따라 立石(입석)하여 표를 하니,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공이 그 은덕을 기록하였다.

  萬曆(만력) 戊子(무자) 公(공)의 원손인 지금의 관찰사 克智(극지)가 공무 차 鎭南(진남)을 순방하고 이곳에 도착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宗人(종인)들과 만나 묘역 役事(역사)에 대해 의논을 하고, 땅에 훼손된 묘역의 돌들을 보고 관찰사는 즉시 宗人(종인)에게 석재를 사서 잘 개수하라고 하였다.
  이에 柳成龍(유성룡) 역시 公(공)의 外孫(외손)이라 그 사실을 내게 쓰라고 하니 나는 公(공)의 勳業(훈업)을 譜牒(보첩)에 있는 것을 참착하여 기재하였다.

 그리하여 삼가 立石(입석)의 전말을 적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공을 태사라고 稱(칭)하던 舊刻(구각)을 싫지 아니한 고로 의심 없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바이다.


(2) 高麗太師權公幸神道碑(고려태사권공행신도비)

【頭篆】 高麗太師權公幸神道碑銘

【碑 文】高麗三韓壁上三重太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公諱幸本金氏與新羅同姓羅季與金宣平張貞弼守古昌郡甄萱入羅君弑國覆高麗太祖徃救之屯郡北甁山柵與萱相持公與金張二人謀曰吾輩義不與萱共戴天顧力不能報盍投王公共滅此賊遂以郡佐麗祖有甁山之捷義聲大振麗祖喜曰金幸炳幾達權可謂能權矣乃賜姓權拜大相陞郡爲安東府封食邑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坎坐之原子仁幸官卽中生子冊冊求爲本府吏數世爲戶長將校初豪傑割據郡縣麗祖旣統合使仍守其地長民者稱戶長統兵者稱將校遣王官監之此外吏之始也其後子孫益大以蕃珪組蟬聯奕世相望廟于府以祀公金公張公亦與焉權氏世主祀事廟有玉笙玉貫子朝衣服金帶象笏銀鉢匙箸漆杯盂皆我太師公所服用之物今七百餘年世傳之手澤猶宛然成化間十八世孫平昌郡事雍盡誠求之得誌石於墓傍爲加封樹有遺命祔葬同原雍之子裕綽等立碣以表之萬曆戊子二十二世判書克智觀察嶺南合宗人祭之墓碣之仆者買石新之嘉靖壬寅外裔金光轍爲府使卽其廟闢而新之二十一世領議政轍爲觀察使置祭田守戶辰府使紹增其田給穀百碩俾首吏姓權者掌之以供栥盛又治乖域而歲一祭之癸亥府使應挺碑于廟萬曆癸丑二十四世吉川君盼觀察重修廟宇祭春秋以中丁今癸巳觀察使堣創齋舍墓下僦人戶守之己亥榮川郡守聖源禮祠展墓慨然曰子孫雖多向拜平昌公孰知太師墓之在斯神道早有銘者何挈蕝之艱以吾太師公而尙闕顯刻玆非吾宗人之責乎盍圖之僉曰諾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卽斵石府李侯卽外裔幹其事聖源及宗人屬諰記其事噫我始祖當羅麗之際大義較著功烈卓然赫赫在人耳目名與天壤相敝而前後爲方伯太守非姓孫則外裔也皆盡力于廟祀若丘墓創之修之苗裔之在玆土者典錢穀奉俎豆不絶今又立石墓隧使千萬世後皆知爲太師公之墓亦可見積德之盛也原上之墓第太師第二平昌第三則或稱平昌夫人之葬云其下西厓柳相公成龍先墓在焉亦外裔也遂爲之銘曰
量力達節讎報耻雪仁拯斯民慶衍後人麗祖賜姓陞封錫號丕視功載靡德不報有翼其廟祀事孔明手澤傳寶金帶玉笙誰其尸之府中後裔謹守迭掌罔墜厥緖有田有穀有齋有碣諸公相繼創修罔缺載樹顯刻亦與有光其永有考余言匪哤
二十四世孫 漢城府右尹 權諰 撰
外裔 吏曹參議 李慶徽 書
外裔 司憲府掌令 許穆 篆
崇禎 辛丑 九月  日 立
<해>
고려태사권공행신도비명
공의 휘는 행(幸)인데 본래는 김씨이니 신라왕과 동성이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장정필과 함께 고창군을 지켰는데 견훤이 신라에 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 북쪽 병산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때 공께서 김․장 양공(兩公)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王公:建)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군사람들과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을 얻게 되어 의성(義聲)을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여 ‘김행(金幸)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 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사성(賜姓)하고 대상을 제수하며 군(郡)을 안동부로 승격시켜 식읍으로 봉하고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천등산 조화곡 남향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이니 낭중이고 아들 책을 낳았으니 책이 본부의 호장을 자원하여 7․8대 동안 호장이나 장교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들이 각 고을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들을 모두 통합하고 그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 장관을 호장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이를 장교라 하였으며 중앙의 권원을 보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관직의 효시였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번창 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대대로 이어졌으며 부에 사당을 지어 공을 향사할 때 김공과 장공도 함께 뫼시되 권씨 후손들이 제사 일을 주관했다.
묘에는 옥퉁소․옥관자․조복․금대․상아홀․은 밥그릇․시저․칠한 잔․받침대 등이 있으니 모두 우리 태사공이 사용하시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700여년을 대대로 전해온 손때가 아직도 완연하다. 성종 때에 18세손 평창군사 옹이 정성을 다해 찾다가 묘 곁에서 지석을 발견하고 봉문을 가토(加土)하고 도리송을 심었다. 유언에 따라 개하(堦下)에 부장하였고 옹의 아들 유(裕)․작(綽) 등이 비를 세웠다. 선조 무자년에 22세로 판서 극지가 경상감사로 와서 종인(宗人)들과 모여 제사를 올리고 묘비가 망가진 것을 새 돌로 다시 세웠다.
중종 임인년에 외손 김광철이 부사가 되어 사당 터를 넓혀 새로 지었고, 21세 영의정 철이 관찰사가 되어 제전(祭典)과 묘직(墓直)을 두었다. 병진년에 부사 소(紹)가 제전을 더 사고 곡식 백석을 공급하여 권씨 성을 가진 이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장하게 하여 제수에 보태도록 하며 또 묘역을 수축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게 했다. 계해년 부사 응정(應挺)이 묘정에 비를 세웠으며, 광해군 계축년에 24세 갈천군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사당을 중수하고 춘․추 중정일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지금(효종) 계사년에 관찰사 우(堣)가 묘소 아래다 재사(齋舍)를 처음으로 건립하고 묘직을 두어 수호케 했다. 기해년에 영천군수 성원(聖源)이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한 뒤 개연히 ‘자손이 비록 많지만 전에 평창공이 아니었으면 뉘라서 태사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겠는가. 당연히 신도비를 세워야 할 텐데 비명을 짓고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태사공으로서 비석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성취하자’고 하니 모두가 쾌히 동조했다.
무릇 후손이 원근 귀천의 구분이 없이 모두 와서 돌을 다듬을 때에 부사 이연은 곧 나의 외손이라 그 일을 주간하였는데 성원(聖源) 및 종인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하라 위촉했다.
아! 우리 시조가 신라 말 고려 초를 당하여 대의가 드러나고 공열이 탁월함은 사람들이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빛나서 전후로 방백 수령이 성손(姓孫)이 아니면 외손들이 모두 사당과 묘소 일에 진력해서 창설하고 보수하며 여기에 사는 후손들이 전곡을 맡아서 제사를 끊임없이 받들며 이제 또 산소 앞에 비석을 세워서 천만년 뒤라도 모두가 태사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적덕의 갸륵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의 무덤을 제일 위가 태사공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이며 세 번째는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하며 그 아래에 서애 류정승 성룡의 부친이 있으니 또한 외손이 된다. 드디어 명(銘)을 쓰노니,

힘을 자량(自量)하고
절의에 통달하고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건졌으니
경사로움이 후인에게 미쳤도다
고려 태조가 성(姓)을 하사하고
군을 승격하고 봉하여 내려주셨다네
공덕이 매우 높으시니 어찌 덕을 갚지 않으리까
날아 갈듯한 사당이 있어서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나이다
손때가 묻은 유물로 금대와 옥피리가 있도다
누구가 제사를 주장하는가
부중에 사는 후손들이라네
교체하여 관장을 삼가
대마다 전해감을 게을리 말지어다
토지가 있고 곡물이 있으며
재실이 있고 비석이 있으며
여러분들이 계승하여 창설하고
중수함에 결함이 없어 공덕 새긴 비석을 세우니 또한 더불어 영광되도다
영세토록 상고됨이 있을테니
내가 잡된 말을 한 것이 아니로세

24세손 한성부우윤 권시(權諰) 찬(撰)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서(書)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전(篆)
숭정 신추 9월 세우다.
편집: 靑南(청남) 權寧漢(권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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