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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오천군자리 광산김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

청남

 

 

오천 군자리 광산김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
    
1)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5~1534)


자는 순경(舜卿)이요 호는 농수(聾叟) 또는 춘포(春圃)이며 회(淮)의 아들이다. 단종 2년(1455)에 출생하여 중종 29년(1534)에 졸하였다.
성종 11년(148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단념하고 초야에 숨어 글을 읽으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공이 벼슬을 천거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조실록에 보면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벼슬을 천거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다음과 같이 천거하였다.
중략(中略)
 생원 김효로(金孝盧)는 예안(禮安)에 사는 사람으로, 조행이 있는데다가 기국까지 겸하여 향리가 칭도합니다. 나이 60이 넘었으나 정력이 쇠하지 않아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15권 412면)

그리하여 풍산현 道陽(현 풍천면 도양리)에 살다가 성종 년간에 예안 오천으로 옮겨서 정착하여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퇴계 선쟁께서 그 지조가 높고 온후하고 선한 덕행을 높이 칭송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되고 숙종 임오년에 사림이 현 동쪽에 사당을 세우고 이계양(李繼陽: 퇴계의 조부)과 김효로(金孝盧)를 함께 배향하고 사당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그 상향축문(常享祝文)에 「종덕선현(種德先賢)하야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추원보본(推原報本)하니 미구난망(彌久難忘)이라」하였다. 그 후에 후손들이 공의 사당을 짓고 김효로(金孝盧)와 그의 증손 해(垓:近始齋)를 병향(並享)하여 영세토록 향례(享禮)를 치르고 있다.

친필유언상과 교지, 자녀들에게 준 분재기(分財記)․친서기숙전가시(親書寄宿田家詩)․ 시양문기(侍養文記) 등이 현재 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2)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적(子迪) 또는 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이며, 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曺參判)인 효로(孝盧)이고 어머니는 양성(陽城) 이씨(李氏)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진사시의 양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처 152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이조실록에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항(李沆)이 아뢰기를,
「김안로(金安老)의 일은, 어제 상교(上敎)에 󰡐어찌 귀양 보내기까지 하겠느냐?󰡑 하셨으나, 김안로의 인물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대간의 의논이 다 그의 뜻에서 나올뿐더러, 접때 있었던 몇몇 일을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연성위(延城尉)의 집은 전하의 잠저(潛邸)의 구궁(舊宮)인데 완고하여 무너진 데가 없으니, 김안로에게 교만한 마음이 없다면 그 간살을 줄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옛것을 헐고 새로 짓고,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여소(廬所)에는 가지 않고 늘 일을 감독하러 갔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일을 감독하는 관원을 정하였으면 감안로가 친히 감독할 것이 없는데, 이미 완성된 곳을 뜻대로 헐고 사치를 극진히 하려고 힘썼습니다. 사대부(士大夫)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김안로의 소행이 이러하여도 사람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어 탄핵하지 못하고, 김극성(金克成)이 대사헌(大司憲)이었을 때에 함문(緘問)하였을 뿐입니다. 대저 김안로는 거느린 식구가 매우 많은데, 관부(官府)에 청탁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공사(公事)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연성위의 종[奴]이 남의 첩을 강간한 사상(事狀)이 명백한데도 대관(臺官)에게 청탁하여 마침내 죄를 다스리지 않았고, 또 상언(上言)하게 하여 대간을 동요하여 성운(成雲)․김극성(金克成)이 갈리게 한 것이 다 이 사람이 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붙좇고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좇는 자 중에 위세를 두려워하여 좇는 자도 있고 속아서 좇는 자도 있습니다. 신들이 굳이 귀양보낼 것을 청하는 까닭은 이 사람이 왕실과 혼인을 맺었고, 세력도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그 뜻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해를 당하니, 조정에 있게 하면 나라의 일이 글러질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귀양보내야 간사한 사람에게 징계가 되어 국가가 편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종조(成宗朝)의 임사홍(任士洪)도 왕실과 혼인을 맺었는데, 처음에는 드러나게 큰 잘못이 없었으나 한때 사람들이 다 소인이라고 논하므로, 성종께서 그 간사함을 알고 죄를 다스리셨으나 오히려 뒷날에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구제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이명(쬛明)이 환히 비추니 이러한 일이 없겠으나, 점점 스며드는 참소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또한 성인(聖人)이 경계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인물이 아름답지 않아서 조정에 우환을 끼칠 것인데, 그 수단을 쓰게 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된다면, 뉘우친들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대신․대간이 어찌 익히 헤아려서 아뢰지 않았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사한 사람은 반드시 멀리 귀양보내야 합니다. 이제 대신과 좌우가 다 입시(入侍)하였으니, 하문하시면 누구인들 모르겠습니까? 대신이 아뢴 것을 유난하지 마셔야 하니, 빨리 쾌하게 결단하소서.」  하고,
중략(中略)
정언(正言) 김연(金緣)이 아뢰기를,
「신은 어제 시골에서 들어왔으므로 원중(院中)의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마는, 김안로는 본성이 탐독(貪毒)하고 세력이 치성하며 또 왕실과 혼인을 맺었으니, 대신․대간이 아뢴 것은 생각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빨리 결단하소서. 한 집안의 은정(恩情)도 어찌 헤아리지 않았겠습니까 마는,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위하여 아뢰었으니, 유난하지 마소서.」 하고,.........
이하 생략(省略)  (16권 353면)

그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는데 이때 김안로 일당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 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주살 되고, 그 일당이 축출되면서 사간원사간(司諫院 司諫)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어 1542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특히 농정(農政)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한발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지방에 대한 구황사업(救荒事業)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그때의 일을 이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이조실록 18 집 621면)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김연(金緣)이 아뢰기를, 「신이 외방을 왕래할 적에 보니 일로(一路)의 농사지은 곡식이 모두 여물지를 못했었습니다. 경상 하도(慶尙下道)는 좀 여물었지만 상도(上道)는 더욱 흉년이 들었는데, 한재(旱災) 때문에 곡식의 이삭이 패지 못하였고 묵혀진 곳도 많았었습니다. 민간에게 물어 보니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먹을 식량이 부족하였으므로 죽음에서 헤어나기에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김매기를 할 수가 없었던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각 고을에서 공채(公債)를 받아들일 적에 금년의 종자(種子)를 마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부실한 곡식까지도 받아들여 숫자만을 채운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금년 봄에 이 곡식 씨앗을 파종(播種)했더니 종자만 허비했을 뿐 싹이 반도 나지 않았고 간혹 싹이 난 것이 있었어도 그대로 시들어 결실하지 못하였답니다. 이래서 앉은 채로 추수할 기대를 잃어 기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는 이를 타농(惰農)으로 논할 뿐이고 재상전(災傷田)으로 쳐서 면세(免稅)시켜 주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원통해 하고 있습니다. 금년의 농사가 이미 이러하니, 조금 여문 곳에는 공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가운데 묵혀져서 실농(失農)한 곳의 공채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내년의 백성들이 삶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실농한 곳의 지난해 공채에 관한 일은 이미 호조로 하여금 공사(公事)로 만들게 하였다.」

 1544년 경주 부윤에 임명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아깝게도 58세를 일기로 임지에서 서거하였다.
그때 동궁(東宮: 뒤에 仁宗)이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다음해 3월 예관(禮官) 채무일(蔡無逸)을 보내어 제사를 내려 주셨다.

저서로 「운암집」 한 책이 있다. 또 영주군수로 부임할 때, 동료 및 선후배들과 작별을 노래한 별장(別章)은 모두 17장인데, 1990년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소장전적 13종 61점과 함께 보물 제1019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이 별장은 모두 공의 친필로 적혀있는데, 「운암집」 부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3) 광산김씨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
자는 언우(彦遇)이고 호는 후조당(後彫堂)인데, 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운암(雲巖)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영(昌寧) 조씨(曺氏)로 중종 11년에 오천(烏川)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미 문예에 높은 재주가 보였는데 1537년(중종 2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있으면서도 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27세 되던 9월 친상을 당하고 다음해 7월에 인종(仁宗)이 승하했으며, 아버지의 상을 벗은 다음해엔 승중(承重)으로 조부상을 당하였으니, 연달아 닥치는 슬픔에 삶의 의욕조차 잃을 만큼 심한 마음의 충격으로, 버슬 길에 나가 출세하려는 청운의 뜻마저 버릴 정도로 큰 심경의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초야에 숨어 학문과 인격도야를 위한 공부에만 뜻을 두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면서 32세에 처음 퇴계 선생의 문하에 이르렀는데 헛되이 공명에 마음을 두어 진작 도학의 문에 들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뜰 앞에 송백을 심고, 한역에 숲을 가꾸어 자연을 즐겼으며, 더욱 매화를 사랑하고, 오직 도학에 깊이 둔 마음을 매화에 부쳐 스승 퇴계와의 사이에 많은 시서(詩書)를 주고받았는데, 「퇴계문집」 속에 공의 유고(遺稿)가 수없이 많이 실려있다.

지조 높은 선비로서 고고히 살아가는 공에게 나라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했지만, 오직 학문과 도에 전념하는 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조실록에는 이조(吏曹)에서 공을 천거하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21 집 284면)

이조(吏曹)가 아뢰기를, 「전일의 승전(承傳)에 “산야(山野)의 행실이 있는 사람이나 이미 벼슬을 제수한 자 중에 더욱 특이한 자는 차서에 구애 없이 발탁하여 쓰라.”고 전교 하셨으므로, 서계(書啓)합니다. 6품으로 승서(陞敍)되기에 합당한 자는 강릉 참봉(康陵參奉) 기대정(奇大鼎)․홍가신(洪可臣), 예빈사 참봉(禮賓寺參奉) 유몽학(柳夢鶴), 경릉 참봉(敬陵參奉) 유몽정(柳夢井), 생원(生員) 김부필(金富弼), 유학(幼學) 정구(鄭逑)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 공사(公事)는 대신(大臣)에게 의논한 것인가?」 하였다.

퇴계는 공의 주자학(朱子學) 연구가 자못 깊고 적확(適確)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크게 감탄하여 공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연히 공과 모여 의혹 되었던 바를 연구함으로써 전날에 잘못 이해하였던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되어 기쁘다」라고 했고, 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에게 이르기를 「김언우(金彦遇:後彫堂) 등과 함께 심경을 읽어 계발한 바가 많아 전에 잘못 알았던 것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또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에게 준 글에서 「주역개몽(周易啓蒙) 원괘서지(原卦書誌)에 대한 앞서의 풀이가 크게 잘못 되었음을 오천선비(後彫堂, 把淸亭, 山南, 養正堂, 雪月堂, 日休堂, 勉進齋)들이 발견해 내어 바로잡아 고치게 되었음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공의 학문과 경륜을 헤아릴 만 하거니와 이 밖에도 퇴계는 직접 간접으로 공의 도학이 정밀하고 깊음을 깊이 감탄한 하였다고 한다.

공은 교학(敎學)사업에 있어서도 도타운 뜻을 지녀 도산서원을 창건함에 공이 앞장을 서서 여러 동문들에게 글을 띄워 「선사(先師)의 강도장수(講道藏修)의 터전을 스승께서 생존시나 다름없이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먼저 많은 토지를 기증하는 등 열성적으로 추진하여 서원 건림을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한양에서 퇴계 선생이 공에게 수간(手簡)을 내기를 「본래 공은 벼슬을 즐기지 않은 줄은 아는 바이지만 상경하여 임금님께 사은(謝恩)이나 하고 형편을 보아 거취(벼슬)를 정함이 어떤가?」 라는 권유에 대하여, 공은 「산운(山雲)에다 뜻을 붙여」라는 시로써 답했다.

 

 

爲向山雲寄一語(위향산운기일어)
何心藏壑又昇空(하심장학우승공)
雲言序捲雖惟我(운언서권수유아)
亦在神龍變化中(역재신룡변화중)

 

 산 위에 뜬구름에게 한 마디 물어본다.
 어떤 마음 골자기에 감추었다 다시 하늘로 오르는가
 구름은 오직 나를 위해 다 말하기를
 역시 신령스러운 용의 변화 속에 있다 하더라.
 
라고 하였다. 선조 10연에 몰(沒)하니 향년이 62세였다. 율곡 이이(李珥)는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에게 보내는 글에서 「무오년 가을에 후조당(後彫堂)을 도산에서 만나, 여러 날 함께 토론하니, 공의 의(義)는 정통하고 인(仁)는 완숙하며 학문은 최상에 이르러 있었는데, 오늘 공이 몰(沒)하니, 그의 높은 도는 상실되고 정의는 빛을 잃으니, 율곡은 이를 슬퍼하는 바이다」라 하며 슬퍼 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보낸 글에서 「후조당이 고인이 되니, 도학의 불행이 이보다 더할바 없다」라고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이 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며 영조 38년(1762) 사림에서 낙천사(洛川祠)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후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묘호(廟號)를 경현사(景賢祠)라 했다.
순조 22연(1922) 자현대부(資憲大夫) 이잠판서 겸 성균관 제주(祭酒)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찬선(贊善) 오위도총부(五衛都總府) 도총관(都總官)에 증직 되었으며 순조 25년(1825)에 문순공(文純公)의 시호가 제수되었는데, 그 일이 이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부응교 이언순(李彦淳)이 고(故) 징사(徵士) 김부필(金富弼)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김부필은 학문의 조예로 일찍부터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인정을 받아 우뚝이 영남의 진유(眞儒)와 후학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에 산에 들어가 통곡한 일이라든지 일생 동안 세상을 숨어 산 종적 등에 있어서는 선정신 김인후(金麟厚)와 더불어 의지(意志)가 같고 도학(道學)이 합하여 다 같이 을사의 완인(完人)이고 효릉(孝陵)의 순신(純臣)입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이어서 은전을 베푸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생략(省略) (48 집 203 면)
  【이조 실록의 분류】 *인사-관리(管理)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시장을 지었다.
저서로 『후조당문집後彫堂文集』 5권이 전한다.

그밖에도 귀중한 문서로 공이 혼인을 할 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를 김부필흔서(金富弼婚書)라고 하여 귀중한 사료(史料)로 잘 보존되고 있다.
이 문서는 1536년(중종 31) 7월에 성균관진사 조치당(曺致唐)이 외손 김부필(金富弼)을 장가보내기 위하여 신부집에 납채(納采)할 때 보낸 혼서(婚書)인데, 원래 혼서는 예서(禮書)․예장(禮狀)이라고도 하며, 장지(壯紙)를 간지 모양으로 접어서 썼다. 넓은 의미의 혼서에는 사주단자와 택일에 관한 서장까지도 포함되나, 김부필의 혼서는 납채할 때 사용된 것만 남아 있다.

외조부 조치당이 납채혼서를 보낸 것은 당시 김연이 흥해군수로 외지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혼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서식에 차이가 있고, 또한 흔인 풍속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혼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김부필의 혼서는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민속자료로서 의의가 크다.

군자리의 인물 읍청정(挹淸亭)


4).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
자는 신중(愼仲)이요 호는 읍청정(挹淸亭)이다. 운암공(雲巖公) 연(緣)의 둘째 아들이며 후조당의 아우이다.
중종 20연(1525) 오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서(詩書)를 배웠으며, 일찍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경학(經學)과 도학(道學)을 닦아 동문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으뜸으로 추대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이루었다. 명종 10연(155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자친상(慈親喪)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성균관에 유학했다.

그 후 선조 8연(1575)에 사첨랑(司瞻郎)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역시 사양했다.
안동부 풍산현 양곡(현 도양리)에 토지를 공의 몫으로 받아, 거기에서 따로 살라고 분부했으나 공은 형의 곁을 떠나가기 차마 아쉬워 형의 집(종택) 바로 옆에 집을 짓고 단란하게 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의리를 논하며 날이 저무는 줄을 잊곤 하였다.
사우(師友) 간에서도 추중(推重)이 두터웠으니, 그때 안동에는 덕망과 학행이 빼어난 인물이 맡았지만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고 나서 퇴계 선생은 공으로 하여금 먼저 산장(山長:書院院長)을 삼아 선비를 기르는 책임을 맡게 하였다.

또한 공은 역리(易理)에도 깊은 연구를 쌓았다. 한번은 선생의 명으로 간제(艮齋) 이독홍(李德弘)이 만든 혼천의(渾天儀)의 도수가 맞지 않고 잘 돌아가지 않음에, 퇴계 선생의 명올 받들어 공이 다시 제작 완성하자 비로소 퇴계께서는 공을 극찬하였다고 하는데 관련 서찰이「퇴계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아래 두 편지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답김신중(答金愼仲)」 정묘년(1567)
략(略), 혼천의와 선기옥형을 찾으려고 하던 것은 왔던 하인에게 부쳐보냅니다. 다만 혼천의는 그 제도(制度)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며 선기옥형은 먼저 만든 것이 오래 되면서부터 점점 손상되고 이지러지니 다시 손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지목하여 일을 맡길 만한 공인(工人)이 없어서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지금 보내는 물건은 이굉중(李宏仲: 艮齋 李德弘)이 만든 것인데 더욱 미진하여 또 모든 고리가 변한 것이 많으며, 삐딱하게 기울어져서 회전이 안됩니다. 원래의 제도(制度) 모습과 비교해서 부족함이 있으니 「상서(尙書)」에 나오는 원래의 제도대로 깊이 연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서 맞게 한다면 크게는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잘 양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도산전서」 2권 414면, 김세한 역
 
「답긴신중(答金愼仲)」 무진년(1568)
전약, 선기옥형과 혼천의는 못쓰게 되어 버리려고 했더니 완전하게 수리한 것을 보내주어 받고 보니 깊이 감사 드립니다. 후약.
    도산전서」 2권 415면, 김세한 역.
 
본래 조용하고 과묵한 공은 마음이 외물(外物)에 끌려서 움직이는 법 없이 가난하면서도 살림에 얽매이지 아니했다. 마을 앞 시냇가에 띠집을 짓고 공부에 전심하면서 그 집의 편액을 읍청정이라 하였으니 바로 퇴계 선생께서 이름지어 준 것이었다.

 

 

黃卷中問對聖賢(황권중문대성현)
聖賢心事尙依然(성현심사상의연)
深潛自有無窮味(심잠자유무궁미)
不在尋章摘句邊(불재심장적구변)

 

 책 속에서 성현을 묻고 마주 대하니
 성현의 심사는 전과같이 다름이 없네
 깊고 깊어 스스로 무궁한 맛을 지니니
 문자에만 얽매어 있지 아니하네.

 

이 작품은 공이 공부하는 그의 아들 근시재(近始齋)에게 준 것으로써 궁리실천에 바탕 한 공의 실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책을 몹시 아긴 공은 얼마 안되는 토지를 떼서 팔아 책을 사기도 하였으며 만년에 병이 깊어 다 읽지는 못하면서도 늘 소중히 어루만짐으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 공은 어버이에 대한 효성은 물론, 조상을 받듦에 있어서도 형인 후조당과 동일하였다.

만년에 중풍으로 부축을 받아야 몸을 움직이는 불편한 형편이면서도 제삿날이면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었으며 행사를 다 마쳤음을 알린 뒤에야 자리에 누웠다 한다.
일상 생활은 매우 검소하여 만년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보면 「너희 할아버지께선 재상의 지위에 계셨으면서도 무명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너희들은 한사(寒士)인 주제에 좋은 옷만 입으려하니 도리가 아니다」라고 타이르시곤 하였다 한다.
선조 15연(1582)에 몰하니 향년이 58세였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이 묘갈명을 짓고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저서에 「읍청정문집(挹淸亭文集)」 3책이 있다. 읍청정의 편액은 당시 퇴계 선생께서 오천에 오tu서 써주신 것이며 또 십이영시(十二詠詩)를 지어주시어 지금까지 보존 게판되어 있다.
그 작품은 아래와 같다.

 

김신중의 읍청정 십이영 (金愼仲挹淸亭十二詠)

망산(望山)
何處無雲山(하처무운산) 
淸凉更淸絶(청양갱청절)   
亭中日延望(정중일연망)   
淸氣透人骨(청기투인골)   

어드멘들 구름 산이 없으리마는
청량산이 보다 맑고 절승하다오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다 보니청강(聽江)
맑은 기운 뼈끝에 사무치누나.


前溪寂寥過(전계적요과) 앞 시내는 조용히 흘러가는데
遠江還有聲(원강환유성)   먼 가람은 도리어 소리가 있네
世人箏笛耳(세인쟁적이)    세상 사람 귀들은 쟁적만 알 뿐
誰參靜裏聽(수참정리청)   고요한 속을 찾아 뉘 들어주리.


대월(待月)
昨夜庭中月(작야정중월) 어젯밤 뜰 가운데 비치던 달이
今宵出海遲(금소출해지)   오늘밤은 바다에 늦게 솟구나
停杯待三友(정배대삼우)   잔 멈추고 삼우(三友)를 기다리면서
孤諷諦仙詞(고풍체선사)   외로이 적선사(謫仙詞)를 노래하노라.

 

영풍(迎風)
徐來赤壁秋(서래적벽추) 가을이라 적벽강(赤壁江)에 바람이 솰 솰
起自靑蘋末(기자청빈말)   푸른 마름 끝에서 일어나누나
亭上羲皇人(정상희황인)   정자 안의 희황(羲皇)시대 한가한 사람
技襟何快活(기금하쾌활)   가슴 여니 이다지도 쾌활할 손가.

 

독서(讀書)
書傳千古心(서전천고심) 글은 본래 천고 마음 전하는 거라
讀書知不易(독서지불역)    글읽기란 쉽지가 않은 줄 아네
卷中對聖賢(권중대성현)    책 속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니
所言皆吾事(소언개오사)    말씀하는 것이 모두 내 일이로세.

 

회우(會友)
孔門論會友(공문논회우)  공문(孔門)에서 말하는 벗의 모임은
以文仍輔仁(이문잉보인) 글월로 모이고 또 인(仁)으로 돕네
非如市道交(비여시도교) 장사꾼의 사귐 마냥 이익 다 보면
利盡成路人(이진성노인) 길가 사람되는 것과 같지 않다오.


연좌(宴坐)
我坐禪亦坐(아좌선역좌) 내 앉고 선(禪)도 역시 앉았지마는
禪虛我不同(선허아불동)   선의 허(虛)와 나는 절대 같지를 않아
揮戈讓隱凡(휘과양은범)    휘과(揮戈)가 은범(隱凡)에 뒤지고 마니
奇功收此中(기공수차중)   기공(奇功)을 이 속에서 거둬들이네.

 

만보(晩步)
倦來起徐行(권래기서행) 게으름 오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扶枕散腰膝(부침산요슬)   막대 끌고 허리 무릎 운동을 하네
草堂只看山(초당지간산)   두초당(杜草堂)은 단지 산을 바라만 보고
雲谷無答客(운곡무답객)   운곡(雲谷)에선 답객(答容)하는 일이 없다오.

 

양학(養鶴)
長身古君子(장신고군자) 키가 큰 저 훌륭한 옛 군자님이
在庭多歲月(재정다세월)   뜨락에 있는지도 세월이 많네
何須騎上天(하수기상천)   잡아타고 하늘에 올라야 되나
正好參讀易(정호참독역)   주역(周易)을 함께 읽기 정히 좋은데

 

조어(釣魚)
多事動容星(다사동용성) 용성(容星)을 움직여라 다사도 하오
無心遇獵熊(무심우엽웅)   곰 사냥 만나는 건 마음에 없어
竹絲風裊裊(죽사풍뇨뇨)   낚싯줄은 바람에 하늘거리고
蓑笠雨濛濛(사립우몽몽)   도롱 삿갓 보슬비 아득하여라.


시화(蒔花)
開落百花事(개낙백화사) 피었다 졌다하는 온갖 꽃 잎은
乾坤造化心(건곤조화심)   천지라 조물주의 마음이로세
栽培遍庭院(재배편정원)   심고 가꿔 정원에 꽉 들이차니
佳玩久逾深(가완구유심)   좋은 구경 오랠수록 더욱 더 깊게.

 

종소(種蔬)
聖門學誠癡(성문학성치) 성문(聖門)에서 학포(學圃)란 어리석지만
貧居種何妨(빈거종하방)   가난한 자 심는 건 왜 해로우리
日涉陶園趣(일섭도원취)   날 마다 도원(陶園)을 거니는 취미
寧須食鯉魴(영수식리방) 어찌 꼭 방리(魴鯉)만 먹어야 하나.

 

종택에는 지금도 교지(敎旨), 분재기(分財記), 노비문서, 친필시책, 문집판각, 낙관(落款) 등이 보존되어 있다.


5) 군자리의 인물 탁청정(濯淸亭) 김수(金綏: 1491~1552)

자는 수지(綏之)이고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며 증 이조참판의 둘째 아들이며 운암(雲巖) 연(緣)의 아우이다. 성종 22년에 출생해서 명종 7년에 졸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활쏘기에도 능해서 무과에도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공은, 백형(伯兄)이 벼슬길에 있음에, 향리에서 조석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항상 뜻을 즐겁게 만들었다.
넉넉한 살림에 성품이 호협(豪俠)하여 항상 빈객을 좋아했다. 퇴락한 침류정(枕流亭)을 수리하고, 집 가까이 탁청정을 지어 많은 내빈을 맞이 했는데, 아무리 미천하고 행색이 초라한 선비라도 한결같이 반갑게 맞이하여 따뜻이 대접하였기에 예안 고을을 지나는 호객(豪客)들은 거의가 공의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엄하게 물리쳐 용납하지 않았다.

사후에 퇴계 선생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재수하였다.


6)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공의 자는 백영(伯榮)이고 호는 산남(山南)이다. 탁청정 수(綏)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천(順天) 김씨(金氏)로 수홍(粹洪: 증 판서)의 딸이며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사위이다. 중종 7년 7월에 오천 본가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여, 26세 되던 중종 31년 향해(鄕解)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동 35년 향해(鄕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명종 4년(1549) 38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통사랑(通仕郎)으로 권지훈련원(權知訓鍊院) 봉사에 취임하였다. 이때 빈청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강하는데 문의(文義)와 음독(音讀)에 모두 통달하여 「누가 저 사람을 무인이라고만 하겠는가」하고 대신들이 찬탄을 마지않았다고 한다.
특천으로 선전관 겸 비변랑(備邊郎)이 되어 43세 되던 명종 9년 두만강 하류 초관(草串)에 야인(女眞)이 침공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큰 소란이 있었는데, 공이 밀명을 받들어 종성(鍾城)의 북병사에게 달려가 흉적 오랑캐를 모두 소탕했다.

동 12년 10월에 강릉 판관에 부임했다. 산기슭이며 바다에 면한 강릉은 토질이 척박한데다가 국세(國稅)가 무거워 주민의 생활이 몹시 피폐(疲弊)해 있는 형편이어서 공은 부사 이준민(李俊民)과 함께 성과 힘을 다하여 온갖 방도로 백성의 모든 부담을 가볍게 줄여 민생의 안정을 돕게 했다.
동 18년 6월에는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부임하였는데 그때 그 고을에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세력을 믿고 포탈한 곡식을 산처럼 쌓아 놓은 못된 사호(土豪)가 있었는데 전임군수들이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어 모두 그대로 덮어두었으나 공이 그 사실을 엄하게 조사하여 밝히고 모두 몰수하니 온 고을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뒤이어 경원부사(慶源府使)․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에 임명되어 가는 곳마다 선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71세 되던 이듬해 겨울 두만강 기슭에 북쪽 오랑캐들이 다시 침공하여 경원진(慶源鎭)이 함락되자 조야가 온통 놀라고 민심이 어지러움에 공이 「국가가 변란을 당했는데 비록 늙었으나, 신하의 도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하며 관하에 달려가자 조정에서 그 의로움을 장하게 여겨,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사변의 적을 평정하고 돌아와, 곧 사임하였으나 70이 넘은 고령이라도 아직 기력이 건장하다고 본 대신들이 사임을 만류하였으나 그것을 뿌리치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5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오래 벼슬에 있으면서 권문(權門)에 발을 들여놓아 본 적이 없었으며, 재물에 초연하여, 고장에 갑부라고 일컬을 만큼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두 아우(富信․富倫)와 누이 및 가난한 친지들에게 다 나누어주었고 30년 벼슬길에 여러 고을을 역임하고 남북을 드나들며 나라에 이바지하고도 은퇴하여서는 끼니가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동 17년 11월에 몰하니 향년이 73세였다. 이듬해 3월 선조 임금은 예조좌랑(禮曹佐郎) 홍의필(洪義弼)을 보내어 사제(賜祭)했으며 정조 10년(1786) 사림에서 낙천서원(洛川書院)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7)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1523 ~ 1566)

자는 가행(可行)이요 양정당(養正堂)이다. 탁청정(濯淸亭) 김수(金綏)의 둘째 아들로 중종 18년(1522)에 태어났다. 퇴계의 문인으로 명종 13년(1558)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 독실하여 선생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장차 크게 성취할 인재라고 촉망되었으나 아깝게도 수명이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8) 설월당(雪月堂) 금부륜(金富倫: 1531~1598)

자는 돈서(惇叙)이고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탁청정(濯淸亭) 금수(金綏)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천 김씨 (順天金氏)로 수홍(粹洪)의 딸이
다.
산남(山南) 부인(富仁)의 아우로 중종 26년(1531) 오천 본가에서 태어났다. 공이 16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송나라 정명도(程明道)가 나이 열 여섯에 여남(汝南)의 주렴계(周濂溪)에게 도학을 배웠음을 알고는 한갓 시서(詩書)만 힘을 기울여 온 스스로의 공부의 길을 뉘우쳐 분연히 책을 지고 도산을 찾았다.

스승 퇴계 앞에서 심학연구(心學硏究)에 정진하면서 의심되는 바를 끝까지 추구하곤 했다. 선생은 공의 독실한 학구 자세에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여 「큰 의혹이 있고서야 크게 뚫림이 있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군은 연부력강(年富力强)하고 뜻을 세움이 그처럼 독실하니 반드시 크게 이룰 것이다」라고 하여 공에 깊은 촉망을 지녀 왔다고 한다.
명종 10년(155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해 5월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겨울까지 죽을 마셔 몸이 몹시 여위어짐에 스승 퇴계는 그의 건강을 염려해서 「슬픔이 지나치면 도리어 효(孝)를 상하게 된다」고 하여 「소식(蔬食)이면 옳으니라」고 권하였다한다.

이듬해 스승을 위하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등을 필사하면서 의심되는 곳을 발견하여 물었던 바 퇴계도 공의 의견을 좇아 고치곤 했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전하기 위해 「퇴서백선(退書百選)」에까지 뽑힌 편지를 소개한다.

 한훤당(寒暄堂)의 뜻 깊은 시
                         -(김돈서)金惇叙에 답함, 권 28-
지난 날 이틀간 상종하여 다행스러웠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회포를 풀기에 매우 미족하였는데, 마침내 남쪽 고을로 내려갔습니다. 한 여름을 떨어져 지내서 쓸쓸하고 또 가끔 그리운 생각이 들더니만, 뜻하지 않게도 길을 떠나려던 차에 편지를 주시고 겸하여 김선생의 두 절귀를 베껴 주었습니다.
글월을 펼치고 또 김선생의 시를 읊으니, 마치 책상을 마주하면서 대화하는 것 같고, 또 몽체(蒙滯)함을 말끔히 씻어내는 듯 하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도설(圖說)은 어리석고 못난 이 사람이 읽어오기 이 삼십 년이나 되었으나 한가지 소득도 없습니다. 비록 고명(高明) 인들 어찌 한 달음에 그 오묘한 데까지 나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물을 처리할 때, 옳고 그름의 판단이 헷갈리고, 일을 처리하다 보면 뒤따르는 후회가 많은 것은 바로 나의 평생의 괴로움이자 병통인데도 아무런 방술이 없이 이것을 고치려고 하는 터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견문을 가진 나에게 질문하신다면, 눈 먼 장님에게 길을 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실로 도(道)에 부족하지만 비록 옛 사람이라고 하여도 이러한 병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학문에 급급하여, 때로는 방책(方冊)에서 구해보려고도 하고, 때로는 사우(師友)에게 자익(資益)하기도 합니다. 의리(義理)가 마음속에서 소명(素明)하게 되면 그의 처사(處事)는 무슨 의혹이 있겠습니까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리석게도 오로지 서책에서만 구할 수도 없거니와 사우(師友)의 도움을 바랄 것 같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괴이하다고 웃어대니 마침내 스스로 곤하고 서로의 병통으로 자족할 수 밖에 없을 뿐입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괴이할 것도 없고 웃을 것도 없으니 그대로 족할 뿐인데, 어찌하여 다시 물어서 안될 것을 물어서 함께 남들이 괴이하다는 괴소(怪笑)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심경(心經)」은 그대가 이미 그것이 어떠한 책인가를 읽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만일 이 책에 전념하여 남에게 묻고자 힘쓰지만 않는다면 그 구하려는 것은 이 책에 있습니다. 묵묵히 노력을 더하여 앞을 향하여 오랫동안 열심히 학습한다면, 반드시 기뻐하여 마지않는 경지가 있을 것인데 이러한 경지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입니다.
김선생의 시의(詩意)는 「지나는 수많은 사람가운데 세한(歲寒)심사를 한가지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데 이 말이 참으로 맛이 있는(뜻이 깊은) 말로서 실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과 좋은 사람의 말은 사람을 속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많지 않은 말속에서도 사람을 감개(感槪)시켜 마지않습니다.
이 편지 역시 남에게는 보이지 마십시오. 이즈음 어쩌다가 매화를 얻어 심었더니 그 품(品)이 모두 좋지 못합니다. 남쪽 고을에서 가품(佳品)을 얻을 수 있으시다면 그 어린것을 골라 뿌리에 토봉(土封)을 하여 보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다만 남쪽은 일찍 가물이 들것이니 올해는 어렵겠지요? 매실이 익을 때 그 열매를 따서 부쳐주신다면 심어놓고 시월 말을 고대하는 것 또한 좋겠습니다.
    「퇴계 선생의 편지」 정순목 역


선조 5년(1573) 유일(遺逸)로 집현전참봉(集賢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동 8년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그 해 가을에 돈영부봉사(敦寧府奉事)로 왕명을 받고 정능(靖陵)의 석역(石役)을 주관함에 근실하여 포상(褒賞)으로 마필(馬匹)을 하사 받았다.
동 16년(1583)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디음 해엔 내섬사(內贍寺) 주부(主簿), 동 18년엔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임명되었다.

전임현감이었던 한강(寒岡) 선생이 이임하면서 그 고장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이제 아주 훌륭한 사도를 맞이하게 되었다」하고 기리고 떠났다고 한다. 공은 부임하여 먼저 교학(敎學)을 일으키고자 퇴락한 옛 향교의 터를 마련하여 새로 이룩하고 봉록을 던져 800여권의 서책을 사들여 열장(權)을 마련, 간직하고 양사(養士)에 힘썼으며 수십 조의 학칙을 마련하여 의리(義理)를 밝히고 실행(實行)에 힘쓰게 하는 한편, 매달 삭망(朔望)때 문묘(文廟)에 참배, 선비들의 공부하는 성적을 친히 살펴 상벌을 베풀고 효도, 우애, 화목 등 십 조목의 강영을 정하여 풍화를 두터이 하였으며, 농사철에는 몸소 들판을 돌면서 농잠을 독려했고 성황(城隍)이나 사직(社稷) 제사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하고 친히 제주(祭主)로 임했다. 해변 고을인 동복(同福)은 적벽(赤壁)의 경승(景勝)이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공은 여가를 이용해서, 지팡이를 끌고 감상하고 즐겼으며, 그때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있었고 이동암(李東巖) 형제가 가까이 있어 서로 불러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며 즐기기도 했다.
협선정(挾仙亭)이며, 포월정(抱月亭)은 공이 세워 거처하던 곳이다. 동 23년 과만(瓜滿)으로 떠나게 됨에 고을 사람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그의 밝은 치적을 기렸다.

동 25년(1592)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산을 기울여 향병(鄕兵:당시 鄕兵大將은 近始齋 金垓)을 돕고 감사 김수(金睟)로부터 방어의 계책에 대한 물음에 「먼저 사람을 얻어야 할 것이며 군량을 비축하고 사졸(士卒)을 아끼며, 장비의 수선 그리고 형세를 잘 살피고 척후(斥候)를 조심해야 한다」 등 수천언(數千言)으로 답했다 한다. 동 17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집 가까운 냇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장수(藏修)의 터를 마련하니 퇴계 선생이 설월당(雪月堂)이라 편액(扁額)을 써 주어 공은 스스로의 아호(雅號)로 삼았으며 은퇴한 뒤엔 여기서 독서와 소요로 여생을 누렸다.
임진왜란 7년 풍진이 바로 가실 무렵인 동 31년(1598) 12월에 몰하니 향년이 68세였다.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지은 행상(行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은 그 의표(儀表)와 언사(言辭)만으로도 일견 도산의 고제(高弟)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그 학문의 독실함과 심오함은 「퇴계문집」에 보이는 공의 문목(問目)으로도 족히 엿볼 만 하거니와 본래 뛰어난 자질에 학덕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대현(大賢)의 문에서 학행의 그릇을 이룩한 공은 크게 행운을 타고난 분이라 하겠다. 스승을 쫓고 벗을 구하여 천리 먼길의 고생을 달게 여겨야 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대개의 선비들이 겪어야 하는 과정인데 공은 대현(大賢)과 때를 같이 하여 났으며 사는 곳이 도산과 이웃하여 산남(山南: 富仁)․ 양정(養正:富信)을 형으로, 후조(後彫:富弼)․ 파청(把淸:富儀)을 종씨로 하여 함께 대현의 문에서 훈도를 받고 물러 와서는 밤낮으로 여러 향제 종반이 같은 서재에서 갈고 닦아 일체의 생활환경이 그대로 학문을 닦고 성령을 기르는 터전이 되어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라고 했다. 구도(求道)의 간절함과 행실에 도타움이 퇴계의 문(門)에서도 공 만한 이가 많지 않았다는 대산(大山) 선생의 일컬음으로 공의 학문과 덕행의 경지를 알만하다 하겠다. 소산(小山) 선생이 행상(行狀)을, 번암(樊巖) 선생이 묘지명을 지었다.
저서로는 『雪月堂文集』 육권이 있다. 기타 다수의 유물과 문헌이 설월당 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9)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

자는 달원 (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이다. 읍청정(挹淸亭) 부의(富儀)의 아들이며 관찰사 연(緣)의 손자로 명종 10년에 오천에서 태어났다.
생후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이고 백부인 후조당에서 양육되고 그의 후사(後嗣) 이었다.
자라면서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가훈을 지키며, 퇴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밤낮으로 독서와 궁리 공부에 열중했다. 생부(生父)인 읍청정이 중풍으로 7․8년을 누워지냈는데 공은 남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약을 다려드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조 20년(1587)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듬해 사직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는 마침 과거를 보러 상경해 있을 무렵이어서 사은(謝恩) 취임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되고서는 사직하고 돌아와 서원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두 선생과 함께 퇴계 선생의 문집을 편수했다.
동 22년 여름 연은전(筵恩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그 달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취임, 예문관검각에 옮겼는데, 마침 한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파i직되었다. 공은 실상 그 사건에 애매했지만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묵묵히 향에 돌아왔던 바 미처 향리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잇달아 닥쳐온 변고며, 또 그 무렵 정여립(鄭汝立)의 역옥사건(逆獄事件)으로 애매한 곤욕을 치른 선비들이 많았거니와 공 또한 당황하였으나 옥에 갇힌 공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고 한다.
그때의 사건을 이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헌부가 이축의 일을 아뢰기를,
「역적과 마음을 함께 하여 역적이 이끌어 주고 승진시켜준 사람을 급하게 수서(收敍)해서는 안 됩니다. 김순명(金順命)과 김해(金垓)는 역적 이진길(李震吉)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공론이 격발하여 한원(翰苑)에서 삭직되기까지 한 자인데 지금 별다른 은명(恩命)도 없이 갑자기 수서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괴원(槐院)에서 이미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는 다시 예속시킨 전례가 없는데 계품(啓稟)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본원에 환사(還仕)하게 한 것은 사체가 전도되는 처사이므로 물의가 비등하고 있으니, 김순명과 김해를 속히 파면하고 아울러 본원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도 파직시키소서.
관서(關西) 일로(一路)는 평시에도 관계가 중한데 더구나 이런 때이겠습니까. 의주는 중국과 연접한 지역이고 또 사신의 행차가 잇따르는 곳으로 그들의 접대와 장속(裝束)이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지는데 현재 피폐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새 판관(判官)은 십분 가려 뽑아야 하는데 성각(成恪)은 감당할 수 없으니 체차시키소서. 철산 군수 신호인(愼好仁)은 가는 곳마다 잘못하고 있으니 회복시키는 중대한 직임엔 적합하지 못합니다. 안악 현감(安岳縣監) 이응허(李應虛)는 문벌이 한미하고 인망이 가벼워 큰 지방을 진압할 만한 능력이 없으니 체차시키소서. 우봉 현령(牛峯縣令) 유세신(柳世新)은 너무 노쇠하여 노방(路傍)의 지역에는 맞지 않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축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새로 올린 계(啓)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21 집 472 면>

하마트면 큰 화를 입을 뻔하다가 그 뒤 무죄함이 밝혀져 벼슬만 삭탈(削奪)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선조 25년 4월 섬 오랑캐의 침략으로(임진왜란) 국토가 거의 왜적에 짓밟히고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는 난리를 당하여 6월에 공은 분연히 책을 던지고 떨쳐 일어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동지를 모으니 원근에서 모두 기꺼이 응하여 공을 안동열읍(安東列邑)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정백(李庭栢:樂琴軒)․ 배룡길(裵龍吉:琴易堂)을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고 대오(隊伍)를 정비하여 군졸을 조련하면서, 군량을 모으고 병기를 갖추어 그해 가을 예천 송구촌(松丘村)으로 진을 옮겨 용궁․함창 등지에서 여러 차례 분전(奮戰)했으며 특히 왜적의 대부대가 집결, 분탕중(焚湯中)인 당교(唐橋)(상주군 함창군 윤직리 속칭 되다리) 부근에서 진두지휘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 해 섣달에는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적장의 목을 베어 순영(巡營)에 바쳤다. 그리고 그 해 제야(除夜)에 진중에서 읊은 시에,

 

 孤燈旅舍鐵衣寒(고등여사철의한)
 人道今宵歲已闌(인도금소세이란)
 一日能添雙鬢白(일일능첨쌍빈백)
 百年惟有寸心丹(백년유유촌심란)

 

라는 비장한 진중시가 있다.
이듬해 정월 평양이 수복되면서 남으로 쫓겨서 밀리는 적을 수없이 많이 무찔렀으며, 그해 오월엔 적을 추격하여 진을 밀양으로 옮겨 적을 막다가 부인 이씨의 부음을 받아 어머니는 늙고 아들은 아직 어린 형편이므로 잠시 귀향하여 초상을 겨우 치르고 다시 진으로 달려갔다.
순찰사 금수(金睟)는 공이 왜장의 목을 베어 바친 공을 기려 「일도의병(一道義兵)의 우두머리」라고 하였으며, 의병장(義兵將) 금목(金沔)은 공의 의로운 마음으로 분전하는 것과, 성심을 다해서 적을 무찌르는 것을 찬양하여 「옛사람에게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충의(忠義)」라 했고, 그 뛰어난 기개와 전략으로 용전분투(勇戰奮鬪)하여 국가중흥에 굳게 이바지하고도 공훈(功勳)을 받지 못한 채 中途에 죽었으니 못내 애석하다고 탄식하였다.
그 해 6월 진을 경주 계림으로 옮기고 병을 얻어 아직 나라의 먹구름이 다 가심을 보지 못한 채 장한 뜻을 다 펴 볼 겨를도 없이 진중에서 운명하니 향년 39세였다.

 

백년존사계(百年存社計) 나라의 백년대계 좇아
육월착융의(六月着戎衣)  유월에 군복을 입었다
위국신선사(爲國身先死)   몸은 나라 위해 먼저 죽고
사친괴독귀(思親塊獨歸)   흔은 부모 찾아 외로이 돌아간다.

 

이는 공이 적과 대치중인 진중에서 숨을 거두며 읊은 처절한 절명시(絶命詩)로, 대산(大山) 이선생(李先生)이 지은 공의 행상에 의하면 공은 청수(淸秀)한 인품에 뛰어난 총명으로 태극음양(太極陰陽)이며 심성리기(心性理氣)에 깊은 연구를 이루어 지식을 쌓았고, 천문(天文)․병법(兵法)․ 의약(醫藥)․ 음률(音律)에 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참배했으며, 집 남쪽에 작은 서당을 마련하여 근시재(近始齋)라 편액(扁額)하고 책 속에 묻혀 독서와 사색으로 침식을 잊다시피 하구에 열중했고 동기(同氣) 친척에도 극진한 우애와 화목으로,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아무리 미천한 사람에게도 공손히 대했다.

항상 마음이 화평하여, 다금하고 창황한 경우에도 급한 거동이 없었으며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 혼자 있어도 손님을 대하듯이 자세를 흐트지지 아니했다. 시로 군자다운 행동이 었다.
공의 문장은 평담전아(平淡典雅)했으며, 시 또한 담백하고 우아해서 속진(俗塵)을 벗어난 높은 풍격을 보였다. 공이 남긴 많은 유고는 전란 중에 거의 없어지고 그 중에 「행군수지(行軍須知)」 한 책과 「서행일기(西行日記)」.「향병일기(鄕兵日記)」 등이 전하는데, 상하권으로 된 행군수지(行軍須知)는 상권에서 먼저 장수의 도리를 논하고 다음으로, 금영(禁令)․ 선졸(選卒)․ 선마(選馬)․ 조량(粗粮)․ 연무(練武), 하권에서 도험(渡險)․ 안영(安營)․ 요적(料敵)․ 포진(布陣)․ 수성(守城)․ 공성(攻城)․ 간첩(間諜)․ 수강(受降) 등 모두 15권으로 짜여졌으며, 먼저 성신(誠信)과 인애(仁愛)로서 인심(人心)을 화합하여 단결을 튼튼히 할 것을 근본으로 했다.

「향병일기(鄕兵日記)」는 임진년 4월 15일부터 경주 진중에서 운명하기 직전까지의 기록인데 이들 일기는 병난 중에 반이나 유실되었다 하니 못내 아쉬운 일이나 다행히 「 향병일기(鄕兵日記)」와 「행군수지(行軍須知)」 2권이 보존되어 있고, 이미 간행된 저서로는 도산서원 사림에서 발간한 「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 2권이 전한다.(板刻은 現 宗宅에 保存됨).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행상(行狀)을 짓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선생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대종택에는 교지(敎旨),  분재문기(分財文記),  호구단자(戶口單子), 명지(明紙), 명문(明文), 친필서간(親筆書簡) 등과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던 철궁(鐵弓) 화살 8개 등이 현재 대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 안동열읍(安東列邑) 의병조직(義兵組織) 진용(陳容)>

대장(大將)  김해(金垓)
부장(副將)  이정백(李庭栢), 배용길(裵龍吉)
정재장(整齋將)  류복기(柳復起), 김륜(金淪)
영병장(領兵將)  심지(沈智)
 예안정제장(禮安整制將)  김택용(金澤龍)
의성정제장(義城整制將) 김사원(金士元), 신홍도(申弘道)
군위정제장(軍威整制將)   이영용(李榮勇)
군위별장(軍威別將)       장사진(張士珍)
의흥정제장(義興整制將)   강충립(康忠立), 박윤문(朴潤文),
   이호인(李好仁), 홍경승(洪慶承)
내성영병장(奈城領兵將)   남정순(南庭荀)
비안정제장(比安整制將)   조단(趙端)
연병장(練兵將)         우인경(禹仁慶), 권복원(權復元)
조전장(助戰將)         박호인(朴好仁)
척후장(斥候將)         권극인(權克仁)
복병장(伏兵將)         이선충(李選忠), 김사권(金嗣權),
   조성중(趙誠中)
좌위장(左衛將)         김익(金翌)
중위장(中衛將)         김윤사(金允思)
우위장(右衛將)         신심(申沁)
군량도총(軍糧都摠)      이영도(李詠道)<동암(東巖), 퇴계 선생의 종손(從孫)>
전향유사(典餉有司)       홍위(洪瑋), 권행가(權行可)
모의사(謀議士)    김윤명(金允明)(安東), 금응훈(琴應壎)(禮安), 이보(李輔)(軍威), 노경심(盧景伈)(善山)
장서(掌書)  김강(金堈:雪厓), 금일(琴馹), 김윤안(金允安), 김경(琴憬), 정조(鄭澡), 신경립(辛敬立),
   권가득(權可得), 배득인(裵得仁), 권강(權杠)
군관(軍官)  금평(金坪:克齋), 이적(李適), 오전(吳氵全),    최평(崔坪)
병색군관(兵色軍官) 김태(金兌)


10). 매원(梅園) 금광계(金光繼: 1580 ~ 1646)

자는 이지(以志)요 호는 매원(梅園)이다. 아버지는 근시재(近始齋) 해(垓)이고, 어허니는 진성(眞城)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의 조카인 재(宰)의 따님이다.
선조 13년(1580) 8월 예안 오천에서 태어나 인조 24년(1646)에 향년 64세로 몰하였다.
8세에「소학(小學)」을 배됐으며 14세에 양친을 여의고 슬퍼하며 예로써 상을 치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처음 대암(大菴)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한강(鄭寒岡)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이 크게 성취했다. 광해군 때에는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전념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출세 영달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낙동강 언덕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한 절벽인 낙천(洛川) 위에 침낙정(枕洛亭)을 지어 글을 읽고 거닐며 후진을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나라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재낭(齋郎)․ 별검(別檢)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감사(監司)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도 좀처럼 남을 칭허(稱許)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공을 한번 대하고는 절로 경복(敬服)하여, 일찍 여러 고을 선비들에게 심경(心經), 사서(四書)를 강의하도록 도내(道內) 도훈장(都訓長)을 삼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든 공무를 띤 사절(使節)로 공의 마을 부근을 지나는 인사들은 다들 공을 방문하여 예경(禮敬)을 표했다고 한다.

공의 학문은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전심(專心)하여 외물(外物)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혼자 있을 때에 더욱 두터운 공경으로 처했고 아무리 번잡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종용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한다.
일찍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학문을 논하면서 「지(知)와 행(行)은 새의 양쪽 날개며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양편 모두 겸비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마땅히 행(行)을 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학문에 있어서 공의 독특하고 오묘한 경지를 다른 사람들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지만, 우복(愚伏) 선생(鄭經世)․ 여헌(旅軒) 선생(張顯光) 등 당대의 석학들도 모두 공의 해박(該博)하고 깊은 경지를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하며 공의 서재밖에는 원근에서 책을 끼고 몰려드는 학자들로 항상 문전에 신발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월 정묘호난에 여헌(旅軒) 선생이 징문(徵文)을 보내어 공으로 의병장(義兵將)을 삼아 막 군사를 일으켜 출진하였으나 난리가 평정되어 곧 파했으며 동 14년,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공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행군하여 막 기천(基川: 지금 풍기)을 지나 죽령을 넘어서다가 나라에서 강복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북향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했음이 공의 일기인「 매원일기(梅園日記)」 속에 적혀 있어 후학들의 사료(史料)로 참고가 되고 있다.
그가 졸하자 대사간(大司諫)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墓誌)를 짓고 공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매원유고(梅園遺稿)』 4책과 「매원일기(梅園日記)』가 전한다. 구 밖에 분재문기(分財文記)․ 호구단자(戶口單子)․입양문기(入養文記)․소지(訴志)․교지(敎旨) 등이 현재 대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11) 김광실(金光實)

자는 이건(以健)이오, 호는 계애(溪厓)이다. 을유년에 태어났다. 형 매원공(梅園公)과 함께 한여문(寒旅門)에 나아갔다.


12).  김광보(金光輔)

사복사정(司僕寺정) , 생원(生員)에 등제(登第)됨.


13).  김광악(金光岳)

한강(寒岡)․여헌(旅軒) 문하에 나아갔다. 무오 년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신유 년에 많은 선비들이 어지러움을 격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인 매원(梅園)공이 의병을 일으켜 죽령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나라에서 항복했다는 전갈을 듣고,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그로 인해 과거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청양산(淸凉山)에 들어가 스스로 대명일민(大明逸民)이라 칭하며 서책과 자연을 벗하며 고고히 살았다.
친필서간(親筆書簡)과 분재문기(分財文記)가 숭원각(崇遠閣)에 보존되어 있다.


14). 김겸(金謙)

호는 묵재(黙齋) 학문에 뜻이 있어 독실하였고, 가훈(家訓)과 선현의 가르침을 잘 지고 따랐다.


15).  김순의(金純義)

호는 과헌(果軒)이오 증 대사성(大司成)임.


16) 김대(金岱)

호는 낙은(洛隱)이오 생원(生員) 동추(同樞)이다.

17). 김석상(金奭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임.

18).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

자는 자준(子峻)이요 호는 계암(溪巖)이다. 설월당(雪月堂) 부륜(富倫)의 아들로 어머니는 평산(平山) 신씨(申氏)이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밝고 현명한 타고난 천품(天稟)으로, 어려서부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어른들께 물어서 행했으며 열여섯 살에 시문(詩文)으로 알려질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고 일찍 도산서원에서 여러 선비들과 경서(經書)를 강(講)함에 뜻과 음에 밝게 통하여 장노(長老)들이 칭찬을 마지않았다고 한다.

광해군 4년(1612)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동 7년 승정원주서(承正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보직되었으나 이른바 대북(大北), 소북파간(小北派間)의 갈등으로 국정이 매우 어지러운 판이라 공은 향리에 숨어 학문에만 정진할 뜻으로 무릇 다섯 차례나 연달아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윤허 받지 못하고 마침 성묘(省墓)를 핑계로 말미를 얻어 돌아오고 말았다.
이어 다시 주서(注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갈수록 해괴해져 가는 파당간의 기승은 드디어 역모라는 모함을 씌워 어린 영창대군을 강화도 교동섬에 가두어 죽이고 그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패 시키는 등 간악한 변을 저지름에 공은 곧 문을 닫고 어두워져만 가는 국사를 근심하며 전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앞서 말미를 얻어 귀향한 공이 상경하지 않음에 동 12년(1620) 7월, 조연에서는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정리해야 한다하여 상경을 재촉했으나 병을 빙자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앞서 두 차례나 상경을 재촉한 바 있는 조정에서는 동 14년 6월 경상감사를 통하여 재촉하는 엄지(嚴旨)를 내리니 공은 할 수 없이 상경하여 숭예문(崇禮門) 밖에 묵으면서 일기(日記: 政院日記)를 닦아서 나라에 바치고 성중(城中)에는 들어서 보지도 않은 채 돌아왔다.
동 15년(1652) 3월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옹립하고(仁祖反正) 나서 앞서 탁난(濁亂)할 무렵에 조행(操行)이 깨끗했던 이들을 중용(重用)하는데 먼저 공을 육품(六品)에 특진시키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니, 상경하는 도중에 충주 달천(달내강)에서 서울에서 오는 김곡(金穀)이란 선비를 만나, 이번 반정(反正)을 거사하는 데에 새 임금을 사제(私第)에서 맞이했는가? 혹시 새 임금이 의군(義軍)에 함께 가담하였는가를 물어 의군(義軍)에 가담했었다는 말을 듣고는 공이 혀를 깨물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병을 빙자하여 되돌아 왔다.
이듬해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임금이 공주로 파천(播遷)했음을 들고, 공은 서울을 향해 달려가 서울 근교에 이르러서, 이괄이 잡히고 난이 평정되었음을 알고는 곧 돌아와 아들 요형(耀亨)을 시켜 병으로 취임할 수 없음을 알렸더니 임금은 「병으로 하여 사직을 하지 말고 잘 조섭(調攝)하여 속히 상경하도록 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헌납(獻納) 김시양(金時讓)이 「김령(金坽)은 산림(山林)의 선비도 아닌 과거 출신으로 임금이 곤욕에 처하여 있는데, 신하된 자로는 마땅히 신명을 바쳐야 할 긴박한 상황에서 비록 병이 있다한들 부축을 받아서라도 황급히 달려와야 할 처지에 그 아들을 시켜 소(疏)를 올림은 극히 외람 된 거동으로 파직을 함이 마땅하니 비답(批答)을 도로 거두어야 한다」고 논계(論啓)했으나 끝내 일관된 태도를 보이자 공의 뜻가 짐을 뒤늦게 야 짐작하게 된 김시양(金時讓)은 「계암(溪巖) 김령(金坽)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러했던 것을 나는 몰랐구나. 앞서 내가 탄핵 한 것을 그는 못내 비웃었으리라. 나는 사람을 너무나 몰랐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일이 이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지평 김령(金坽)은 과목(科目)에 든 사람이나 본디 산림(山林)에서 써주기를 기다리던 선비가 아닙니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할 때에, 병이 있더라도 부축을 받아 달려와서 문안했어야 하는데 자기 아들을 보내어 태연히 상소하였으니 매우 외람 됩니다. 그런데 성비(聖批)에 지나치게 칭찬하여 마치 산림의 고상한 현자를 대우하듯이 하셨으니, 왕언(王言)이 한 번 전파되자 물의가 시끄럽습니다. 김령을 파직하고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하니,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33 집 595 면>
그 해 6월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정낭(刑曹正郎)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해 8월에 의주판관(義州判官)에 임명됨에 조정에서 물의가 있으니 한번 상경함이 옳겠다는 김응조(金應祖: 鶴沙)와 유진(柳袗: 修巖) 등 친우들의 권유에 9월에 상경하여 숭예문(崇禮門) 밖에서 약을 쓰며 겨울을 나게 되었는데 그해 10월엔 예조정낭(禮曹正郎)에 임명되어 병으로 사양했으나 윤허 도지 않어 거듭 세 번을 사양했다.
공이 부름을 받고도 조정에 나가지 않는데 대한 불만을 이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령(金坽)을 보덕(輔德)으로, 송영망(宋英望)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김령은 영남에 있으면서 전후의 제배(除拜)에 끝내 나오지 않았고, 송영망은 다른 재능이 없는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한 때문에 전라 수사(全羅水使)를 거쳐 감사에 제배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겼다.    <원전 34 집 475 면>

 

 平生隨遇信蒼天(평생수우신창천)
 狼狽吾行亦加憐(낭패오행역가연)
 人事無端還一笑(인사무단환일소)
 從南嶒峯聳雲邊(종남증봉용운변)
 
 功名與病不相謀(공명여병불상모)
 疏懶無成已白頭(소나무성이백두)
 從此明時爲夜逸(종차명시위야일)
 不妨液上弄沙鷗(불방액상롱사구)


이 작품은 공이 그때의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이다. 이듬해 정월에 귀향하여서 이윽고 「팔다리가 마비되었다」하며 자리에 눕자 가족들 조차거짓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고을에 수영(守令)을 비롯하여 원근의 인사들로 문병객(問病客)이 잇달았으나 아무리 높은 신분이 내방하더라도 앉은 채로 맞이했으며 조정에서는 거짓 병이 아닌가를 의심하여 본도의 감사(監司)를 보내왔던 바 공이 술잔을 받다가 떨어뜨림을 본 감사(監司)는 수족이 마비되었음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동 4년(1626) 봄에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에, 그해 가을에는 사연원사간(司練院司諫), 동 10년 까지 사간(司諫)에 세 차례, 대강원보덕(待講院輔德)에 두차례나 임명되었다.
그때 일이 이조 시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간(司諫) 김령(金坽)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김령은 예안(禮安) 사람인데 그의 성품이 차분하고 지조가 있었으며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종신 토록 영(嶺)을 넘지 않았다. 세칭 영남의 제일인이라 한다. 혹은 금상(今上)이 반정한 후로 벼슬한 적이 없다고도 한다.
   <원전 34 집 511 면>
이렇듯 병석에 있음을 알면서도 연달아 임명을 내린 것은 인조(仁祖) 임금이나 조정의 중신들이 공에 대한 지우(知遇)가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이 감탄하기를 「우리 왕에게 공이 있다는 것은, 마치 무왕에게 백이(伯夷)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 해 겨울 청나라의 침략으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고, 여러 도의 군사가 잇달아 패하고 국정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이르자 예안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니<당시 의병장은 근시재(近始齋) 김령(金坽)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인데 계암(溪巖)의 종질(從姪)이기도 하다> 公은 가산(家産)을 기울여 도왔으며, 이듬해 봄 왕께서 항복했음을 듣고 공은 북향 통곡하고 전혀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또 다시 사간(司諫)에 임명되고, 인조 19년(1641)에 몰하니 향년이 65세였다. 「남편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그 아내가 절개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공이 그처럼 괴로움을 참아가며 청절(淸節)을 지켜온 까닭인데 그것도, 신절(臣節)을 온전히 하기 위한 강작(强作)에서라기보다 섬기던 임금을 위한 충절에서이니 그 타당성이야 어떻든 그 지조만은 만고의 높은 절의(節義)라고 할 것이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지춘추관(知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에 증직(贈職)되고 문정공(文貞公)의 시호가 제수 되었다.
시호를 내릴 때일이 이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목창명(睦昌明)이 김성일(金誠一)의 학문․도덕이 제유(諸儒)들의 미칠 바가 아님을 크게 말하니, 제주(祭酒) 이현일(李玄逸)도 극구 찬성하므로, 임금이 드디어 그 도덕 박문(道德博文)의 시호(諡號)를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목창명이 또 말하기를, 「고(故) 사간(司諫) 김령(金坽)은 영남의 어진 선비이니, 포증(褒贈)을 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현일도 또한 극구 이에 찬성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여 드디어 도승지(都承旨)를 증직하였다.  김영(金坽)은 계해년 반정(反正)을 잘못이라 하고 조정에 서지 않으려고 하여, 종신토록 스스로 벼슬을 폐하였는데, 이현일 등이 바야흐로 그 논의를 부식(扶植)하였기 때문에 힘써서 숭장(崇獎)한 것이 이와 같았다.
 이하생략(以下省略)    <원전 39 집 197 면>

그리하여 숙종 15(1689)에 도승지에 추증 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 6권이 있고, 계암일녹(溪巖日錄(40년간의 일기)이 전한다. 기타 유물로 설월당(雪月堂) 종택에 분재문기(分財文記)․호구단자(戶口單子)․교지(敎旨)․명지(明旨)․유품(遺品) 등이 다수 보존되고 있다.

 <김령의 글씨.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19).  구봉(九峯)  김전(金㙉: 1538~1575)

자는 자후(子厚)요 호는 구봉(九峯)이니 산남(山南) 부인(富仁)의 아들이다. 중종 33년(1538)에 출생하여 선조 8년(1575)에 몰 하였다. 퇴계 문인으로 학문이 널리 알려졌다. 퇴계가 그에게 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세밑에 금문원․금훈지․김자후)가 돌아가려 하므로 시를 지어 보여 서로 권면하고 또한 스스로 깨우치며 아울러 안도를 깨우친 세 수 (歲終 琴聞遠․琴壎之․金子厚 將歸 示詩 相勉 亦以自警 警安道 三首)

 

 輪墨爭名已喪眞(윤묵쟁명이상진)
 那堪擧業又低人(나감거업우저인)
 可憐往日如奔駟(가련왕일여분사)


 來歲工夫盍日新(내세공부합일신)
   한묵(翰墨)의 명예 다툼 하마 참을 잃었는데
   과업(科業)마저 남에게 떨어지니
   가엾다 지난날은 닫는 말이 빨랐으니
   오는 해 공부만은 일신(日新)으로 나아가세

 

 科目焉能累得人(과목언능루득인)
 學通諸理可兼伸(학통제리가겸신)
 如何滿世英才美(여하만세영재미)
 一落終身未轉身(일낙종신미전신)


   과거라서 어찌 꼭 사람을 그르치고
   학(學) 통하면 모든 이치 한꺼번에 펴인다네
   어쩌길레 온 세상 아름다운 영재들
   한 번 빠져 종신토록 돌이킬 줄 모르는지

 

 生爲男子不訾身(생위남자불자신)
 此事何須讓別人(차사하수양별인)
 齷齒尼無成應坐儒(악니무성응좌유)
 從今努力競時辰(종금노력경시진)


   어느 것에 비중 못할 남자로 태어나서
   이 사업을 어찌 딴 사람에게 양보하리
   이룸 없이 잘아진 것 모두가 나약한 탓
   이제 부턴 힘을 써 시각을 다투둬야지.

 

육고(遺槁) 3책이 전한다.

 

20) 북애(北厓) 김기(金圻: 1547~1603)

공은 1547(명종 2)~1603(선조 36)에 재세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지숙(止叔), 호는 북애(北厓)이며, 예안(禮安)의 오천촌(烏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사 부인(富仁)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로 현보(賢輔)의 딸이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난 기상이 드높았다. 학문을 할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가 독실히 배우고 실천에 힘썼으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정진하여 깊히 체득하였다. 
1602년 유일(遣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상에 모두 3년간씩 여묘(廬墓)를 살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그의 종제(從弟) 해(垓)와 함께 고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정제장 겸 소모사(整齋將兼召募使)가 되어 많은 군량을 모았다.  또, 경주의 집경전(集慶殷)에 있던 태조의 어진(御眞)이 예안의 백동서당(柏洞書堂)에 이안(移安)되었을 때, 임시로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동의 27의사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목숨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웠다.

1598년 도산서원의 산장(山長)이 되어 월천(月川)과 함께 퇴계전서(退溪全書)의 간행에 힘을 쏟아 그 일을 끝냈다.
1602년 순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황이 남긴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고을의 풍속교화에도 힘써 「여씨향약」을 본떠 향규를 만들어 향인들을 교도하였다. 중용(中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기(理氣)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이 있었다.
사후에 임진왜란 때의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사현부감찰에 추종되었다. 저서에 「북애문집」 4권이 있다.

 

21). 김강(金堈)

진사과에 합격하고, 학문에 정진했음. 참봉.

22). 극재(克齋) 김평(金坪: 1563~1617)

자(字)는 계평(季平)이요 호(號)는 극재(克齋)이니, 양정당(養正堂) 부신(富信)의 셋째 아들이며 명종 8년(156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학행(學行)으로 사림에 명성이 높았다. 삼도사림(三道士林)들이 이조오현(李朝五賢)의 문묘(文廟)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에 소수(疏首)가 되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공의 죽음을 당해 통곡하며, 「사군여사부(事君如事父)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라 했다.

 

23). 김요형(金耀亨)

 두문(杜門)의 처사(處士)로서 평생 도의(道義)를 닦으며 살았다.


24). 김휘두(金輝斗)

 생원(生員).

 

25). 김휘세(金輝世)

 통정대부(通政大夫), 용궁현감(龍宮縣監)를 역임했다.

 

26). 정지재(定止齋) 김확(金確)

자는 이실(而實)이요 호는 정지재(定止齋)로 구봉(九峯) 전(㙉)의 손자이다. 일찍 생원시에 합격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난때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義兵大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부장(副將)으로 출진하여 행군하다가 도중에 국조(國祖)가 청(淸)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마을에서 5리 떨어진 어름산(禦凜山:雲巖山) 밑 강 언덕에 집을 얽어 정지재(定止齋)라 이름하고 자취를 숨겨 생애를 마쳤다.
문집이 전하고 정자(亭子:定止齋) 편액(扁額)과 시판(詩板)이 숭원각(崇遠閣)에 보존되어 있다.

 

27). 우헌(迂軒) 김총(金璁: 1633 ~ 1678)

조선 후기의 문신이고 학자인 공의 자는 명보(明寶) 또는 중휘(仲
輝)이며, 호는 우헌(迂軒)이다. 아버지는 광술(光述)이며, 어머니는 풍천 천임씨(豊川任氏)로 경진(慶進)의 딸이다. 1652년 (효종 3)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1660년(현종 1) 승문원정자에 제수 된 후 저작․박사를 거처 1666년 의금부도사․예조좌랑을 역임하고, 1667년 우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
1673년에 중앙관에 복귀하여 성균관직강․병조좌랑․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집의(執義)․지제교(知製敎)․지공거 (知貢擧)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차왜접위사(差倭接慰使)로 동래에서 왜사(倭使)의 예경(禮敬)을 받았다. 그는 시문에 능하여 창랑대기(滄浪臺記)등 다수의 시문을 남겼으며, 옥구현감 시절에 지은 여러 편의 기우문(祈雨文)은 우국애민의 충심이 엿보인다. 저서로는 「우헌문집」 4권이 있다.

 

28). 적암(適菴) 김동준(金東俊)

 문과(文科)에 급재하여 병조정낭(兵曹正郎), 주서(注書)를 역임했다.

 

29). 김갑교(金甲敎)

 문과(文科) 급재,  정자(正字).

 

30). 일일재(一一齋) 김시찬(金是瓚)

교관(敎官),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세상에 떨치다.


31) 김화(金璍)

 진사(進士), 학행과 덕망으로 이름을 떨쳤다.

 

32) 김용(金鏞)
 숲 속에 草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평생 독서와 학문에 정진한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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