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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장승

청남

 

 

장승

 

장생고(長生庫)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옛날 사찰의 땅에 대해 왕은 세금을 면세하고, 여기에서 수확한 곡식과 재물들 을 장생고라는 기구에 저장했었다.

그리하여 사찰 땅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곳곳에 장승을 세워서 사찰땅을 표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고유의 민속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고대부터 선돌이라든지 비석처럼 만든 장생(長生)과 그리고 민중들이 나무를 세우거나 작은 돌을 세우는 풍습이 민간신앙 속으로 전승되어 오다 불교의 전래로 이런 풍습이 그에 영합되면서 이런 것들이 사찰의 경계로 세워지게 되었다.

후에 불교의 약화로 다시 장승들이 민중들 속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설()

이다.

 

북방의 유사 민족과 비교한 설()

 

몽고의 오보(obo)라는 돌무더기 도로표지, 부락의 존재를 알리고 경계를 표시하는 것

이 있다.

형태가 돌무더기 중앙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지나가는 행인이 돌을 바치고 지나는 것이,

우리의 장승과 흡사하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는 남하설이 있지만,

승에 관한 확실한 문헌이나 유물이 없어 전파라는 말로 단정하기는 무모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류가 있었다면 만주나 몽고 등 북방지역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후풍토가

문화발달 적지로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고, 그들보다도 높은 수준의 유물을 지닌 것으

로 보아, 오히려 장승이 북으로 전파되지 않았는가 싶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장승류의 분포를 보더라도 영호남지방에 밀도가 북쪽지역에 비해 현

저하게 많은 것으로 보아도 북상설이 타당할 수 있다고 비교 해 놓은 설()이다.

 

남부의 농경문화의 북상설()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장승과 솟대에 금줄을 함께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형태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분포된 선사시대의 한문화의 형태로 이곳으로부터

농경문화와 함께 한반도로 전파되어 그 일부가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한반도를 경유하여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남근(男根)숭배설()

 

동대문 밖 개운사 어귀의 목장승의 형상이 남근형으로, 인도의 시바신(인도교의 파괴

신으로 미래, 현재, 과거를 투시하는 세 개의 눈을 지닌 신) 이 있는데, 생식 창조를

상징으로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를 한 것이, 우리나라에 유래되었

다는 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래로부터 남근 숭배 풍습이 있었다는 것에 타당성

이 의문시되는 설()이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가설이 있지만은 우리민족 문화에 대한 장승을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다소 도움이 되는 몇 가지만 다루었습니다.

 

장승의 역사

 

장승의 기원은 원시 공동체사회인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는 도구나 어떤 신앙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철기시대에 와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듯 고대의 장승들은 샤머니즘적인 성격으로 민중 속에 뿌리내려 있었는데, 삼국시대

로 접어들면서 불교. 유교, 도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장승의 의미가 그

들과 혼합되면서 불교에 흡수되어 사찰을 보호하는 상징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도 장승의 뿌리는 굳건히 민중들 속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통일

신라,고려시대에 와서 장승은 더욱더 사찰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면서, 사찰 권위에 대한

경계표시와 사찰의 호법신으로 의미를 더 하게된다.

이러한 기록에는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나(장승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경덕왕이 원표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움), 고려시대 영암 도갑사에 세

워진 황장생, 국장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전래되어 민중 속에 자리잡으려고 했을 때, 민중들과 함께 있었던 장승이

그들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면, 당시 외래종교로서 불교는 장승신앙을 흡수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유교적 통치이념은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키게 되었고, 이에 장승

의 의미도 민간신앙으로서 민중과 함께 그 뿌리를 면면히 유지해 내려오게 된다. 그러다

1617세기에 커다란 임진, 병자양란을 거치면서 장승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는 사찰의 수호신적인 역할과, 각 마을에서 질병, 액운, 고통 등을 막아주는 장승의 역할

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민중들의 의식의 향상과 함께 조선 후기의 민중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장승의 형태들은 대부분이 17세기 이후의 것인데,

나마 각 마을의 나무장승들은 자주 교체되면서 원래 모습의 많은 부분을 잃어 버려 그 형

태를 찾기 위해 부분적이나마 보존성이 좋은 돌장승에서 일부의 형태를 찾아 변화 속에서

민족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장승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있고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기록되어져 명칭이 수십가지에 이른다. 이러한 수 많은 명칭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

기로 한다.

 

법슈계();현대에는 교통과 문물의 발달로 장승과 법수,벅수와의 구분이 애매해

져 혼용되었고 법수,벅수가 장승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을 볼 수 있으며 고유용어인

"법슈"(法首)는 점차적으로 "법수" "벅수" 로 변하고 있으며 또 법수,벅수에서 벅시

로 변하는 현상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법시랭이" (함양) "벅시골"

(충무,남해,진주,여수),"벅시골팅이"(하동)등의 지명이 몇 군데 생겨났다.

 

장생계(長生系);장생(長生)의 기원에서 장생표(長生標)가 신라,고려를 거치면서 비

록 그 기능과 모양이 다름에도 장승의 명칭과 뿌리라는 추정에 의하여 범주에 포함

시켰다. 그러한 "장생표주"(長生標柱),"선원장생"(禪院長生),"장생표탑"(長生標塔),

"일도장생십일"(一道長生十一),"장생표"(長生標),"흑목방장생표"(黑木榜長生標),"석적

장생표"(石象長生標),"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國長生),"황장생"(皇長生),

의 용어를 얻게 된다. 여기서 전,후 수식적 부분을 제거하면 "장생"(長生)이라는 명

칭을 얻게 된다.

 

장생계(長 系);고려말 국력쇠퇴와 조선억불책 등에 의하여 장생(長生)이 사라지

면서 명칭은 장생()으로 형태도 주(),(),석적형(石蹟型)에서 우상형으로

변하였다. 이는 "불교적"에서 "민간신앙"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장생()은 고려이전부터 이어온 법구의 신선적인 힘과,장생(長生)의 풍수지리

적인 비보능력이 결합된 형태로서 초기에 도읍의 보호나 사찰의 법역을 수호하는데

그 기능을 다하였다.

 

한편 도로에 이정표를 세운 국가가 정한 도로와 법수를 결합시켜 신장(神將)의 무

서운 얼굴을 새겨 역신의 횡행을 막는 노신(路神)등으로 분화 발전됨에 따라 당초

사찰장생과는 그 기능을 달리하였다.

 

이외에도'수살"(중부지방:"수살",수살이",또는 "수살목", "수살깍이"로 사용), 수구

막이, 외골막이(水口라는 말은 小川으로 유입되는곳), "미륵과 돌부처"(충청도 벅수

를 지칭),"할아버지, 할머니" (영광군 묘량면) "돌하르방" (제주) 등 지역적인 특색

에 따라 수많은 명칭이 존재하고 있다.

 

 

장생류(長生類)와 장승,법수 등은 그 기능이나 목적에 따라 동체의 앞쪽에 칭호나

역할에 적합한 문구가 새겨지거나 씌어지는데 이것에 의해 가장 주된 근본이 되는

것이 기능이다. 이런 기능과 목적에 따라 간절한 기원을 비롯 민중들의 깊은 소망

이 경건하게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승은 널리 유포되면서 한 마을에서마저 시대와 흐름 조건에 따라 변하는 등 여러

변천이 작용한 탓으로 상호관계에 있어서 매우 복잡,다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장승이 세워진 목적, 기능이 무엇이냐 ?"라고 단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지 않을

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 책임을 이어가며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굳이 기능을 말하자면..

 

부락을 보호하는 역할; 흉년 질병 재앙등을 가져오는 역신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

을 막는 기능을 한다.

 

풍수지리학상 읍락보호; 읍이나 부락단위의 주민들이 그 마을의 허한 지맥을 보

충하기 위해 세운 장승의 기능

 

풍수 지리상 산천보호; 국가의 허한 지맥을 보충하기 위한 장승으로, 장생표(長生

)를 사원으로 하여금 세우게 한때부터..

 

사찰의 호법신; 경내의 청정과 신성성을 보존유지하기 위해 절어귀에 세웠던 것

마을과 마을의 경계표시

 

이정표의 역할; 읍치(邑治) 의관문과 역(),()을 기점으로 510리 마다 서

있는 것으로 제도적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신앙적대상의 법수나 장생과 차이가 있다.

(명문 또한 법수 장승과 달랐다)

 

이상의 것은 모두가 마을과 고을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평안과 기틀을 굳히고 더불

어 이정표로서 임무가 법수, 장승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며 그 임무들이 세분화되면

서 오늘날의 다양한 장승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시절 따라 명절을 정해놓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민속적인 행사를 하며 생을 행복하게 향유해 나왔다. 그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의 전통이 되고 또한 아름다운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이 되어갔다.

아동지방에도 시절 따라 아름다운 풍속이 있으니 그것을 월별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해마다 관례(慣例)로서 행하여지는 전승적 행사. 집단적 또는 공통적으로 집집마다 촌락마다 또는 민족적으로 관행(慣行)되는 것이 상례이다.

 

한국의 세시풍속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세시풍속은 예로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며, 또 옛 문헌에 보이는 것 중에는 이름만 남아 있고, 현재 일반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 ()민족에 의하여 발생되고 전승되어 오는 고유(固有)의 것도 많이 있지만 외국과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전래된 것도 있고, 또 이 외래의 것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민족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는 것도 많다. 정월 행사:정월 초하룻날은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로서, 이 날을 󰡐설날󰡑이라 하여 연시제(年始祭)를 지내며, 웃어른께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세배하러 온 손님에게는 술고기떡국을 대접한다. 초하루~초사흗날까지 관공서는 공사(公事)를 보지 않고, 각 상점도 문을 닫는다. 설날에는 일가 친척 및 친지를 만나면 󰡐덕담(德談)󰡑이라 하여 서로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를 하며, 설날의 놀이로서 남녀가 모이면 다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한다. 또 각 가정에서는 설날 이른 아침에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데 이를 󰡐복조리󰡑라 하며, 그 해의 신수를 보기 위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기도 한다. 또 농가에서는 󰡐과일나무 시집보낸다󰡑 하여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우는데 이렇게 하면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첫쥐날[上子日]󰡐쥐불󰡑이라 하여 농촌의 밭이나 논두렁에 짚을 흩어 놓고 불을 놓아 잡초를 태워서 들판의 쥐와 논밭의 잡충을 제거하고, 입춘(立春)날에는 󰡐입춘 써붙이기󰡑라 하여 대문난간기둥에 봄을 축하하는 글귀를 써붙인다. 또 보름 전날 농가에서는 그 해의 오곡(五穀)이 풍성하여 거두어들인 노적(露積)이 높이 쌓이라는 뜻에서 󰡐볏가릿대[禾竿]󰡑를 세우며, 이 날 밤에는 성명설상(星命說上) 액년(厄年)에 당하는 이는 양법(穰法)으로 제웅을 만들어 그 속에 약간의 돈과 함께 액년에 당하는 이의 성명, 생년월일시를 적어 넣어 길가나 다리 밑에 버린다. 자정(子正)이 지나 15일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마을 제단에서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보름날 새벽에는 귀밝이술[耳明酒]이라 하여 술 한 잔씩을 마시며, 󰡐부럼[腫果] 깬다󰡑 하여 날밤호두은행잣 등 굳은 껍질의 과일을 깨물고 󰡐약밥󰡑을 해먹는다. 동네 안의 악기(惡氣)를 진압하여 연중 무사하기를 비는 뜻으로 󰡐사자놀음󰡑 󰡐지신(地神)밟기󰡑 󰡐들놀음[野遊]󰡑 󰡐매귀(埋鬼)놀음󰡑 등을 하며, 풍년을 기원하는(祈豊) 놀이로서 󰡐줄다리기󰡑 󰡐횃불싸움󰡑 등을 하며, 어촌에서는 그 해의 풍어(豊漁)를 비는 뜻에서 󰡐풍어놀이󰡑를 한다. 또 보름날 밤에는 동산에 올라가 달 떠오르는 것을 맞이하여 달빛을 보고 그 해의 풍흉(豊凶)을 점치며, 다리가 튼튼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다리밟기󰡑를 한다. 2월 행사:2월 초하룻날은 정월 보름 전날 세운 볏가릿대의 곡식을 풀어 솔떡을 해먹는다. 또 이 날은 1년 중 대청소하는 날로서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해안 지방에서는 초하루부터 20일까지 사이에 풍신제(風神祭)를 지내며 초엿샛날에는 좀생이와 달의 거리를 보아서 연중의 길흉(吉凶)을 점쳐보고, 상정일(上丁日)에는 유생들이 문묘(文廟)에서 석전제(釋奠祭)를 행한다. 3월 행사:33일은 󰡐삼짇날󰡑이라고 하여 󰡐화전(花煎)놀이󰡑를 많이 하며, 한식에는 선조의 무덤에 가서 성묘를 한다. 또 한량(閑良)들은 활터에 가서 활쏘기를 하고, 그믐께는 󰡐전춘(餞春)󰡑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해 산골짜기나 강가에 가서 하루를 즐긴다. 4월 행사:4월 초파일은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로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하여 불교신자들은 절에 가는데, 이 날 절에서는 큰 재()를 올리고 각 전각에 등불을 켠다. 이 달에는 시식(時食)으로서 찐떡어채(魚菜)고기만두 등을 해먹는다. 5월 행사:55일은 단오(端午)라 한다. 옛날에는 󰡐단오차례󰡑라고 하여 차례를 지냈고, 또 부녀자들은 창포(菖蒲) 삶은 물에 머리와 얼굴을 씻고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고 그네뛰기를 하며, 남자들은 씨름을 즐겼다. 13일은 󰡐대 심는 날󰡑이라 하여, 이 날 대를 심으며, 이 달에는 소녀들이 봉숭아꽃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인다. 6월 행사:615일을 󰡐유두(流頭)󰡑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해 산간 폭포에서 몸을 씻고 서늘하게 하루를 보낸다. 각 가정에서는 이 날 유두면(流頭麵)수단(水團)건단(乾團)상화(霜花)떡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해먹는다. 복중에는 󰡐팥죽󰡑을 쑤어 먹고, 고사리와 묵은 나물을 넣어 󰡐개장󰡑을 끓여 먹고, 󰡐계삼탕(鷄蔘湯)󰡑도 먹는다. 허리 아픈 노인들은 해안지대 백사장에 가서 󰡐모래뜸질󰡑을 하고, 빈혈증이나 위장병이 있는 이들은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마신다. 7월 행사:77일은 햇볕에 옷을 내어 말리고, 저녁에는 󰡐칠석(七夕)󰡑이라 하여 처녀들은 견우(牽牛)직녀(織女) 두 별을 보고 절하며 바느질이 늘기를 빈다. 15일은 󰡐백중(百中)󰡑이라 하여 절에서는 중들이 100가지 과일과 나물을 갖추어 부처에게 공양을 한다. 또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성대히 베푼다. 농민들은 이 날을 󰡐호미씻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해서 산기슭 들판에 나가 농악을 울리며 하루를 즐긴다. 8월 행사:8월 상정일(上丁日)은 각 지방에서 유생들이 문묘에서 추기(秋期) 석전제를 지낸다. 15일은 󰡐한가위󰡑 또는 󰡐추석(秋夕)󰡑이라 하여 절사(節祀)를 지내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한다. 이 날은 송편시루떡토란단자밤단자를 만들어 먹는다. 9월 행사:9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라 하여 각 가정에서는 철음식으로 󰡐화채(花菜)󰡑를 만들어 먹으며, 󰡐국화전(菊花煎)󰡑도 부쳐 먹는다. 󰡐풍국(楓菊)놀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해 교외 산야(山野)에 가서 하루를 즐긴다. 10월 행사:10월은 󰡐상달󰡑이라 한다. 초사흗날은 개천절로 예로부터 모두 이 날을 기념하여 왔다. 정부에서는 공휴일로 정하는 동시에 국경일로서 엄숙히 의식(儀式)을 거행한다. 이 달에는 󰡐시제(時祭)󰡑라 하여 먼 선조의 무덤에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겨울철의 부식물인 󰡐김장󰡑을 한다. 11월의 행사: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한다. 동짓날은 팥죽을 쑤어 먹는데, 시식(時食)을 삼아 고사(告祀)도 하고, 또 악기를 제거한다 하여 죽물을 대문간, 대문 판자에 뿌린다. 12월 행사:12월을 섣달이라고 한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세찬(歲饌)이라 하여, 마른 생선, 육포(肉脯)곶감사과배 등을 친척 또는 친지들 사이에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믐에는 연중 거래 관계를 청산하며, 각 가정에서는 새해 준비로 분주하다. 또 이 날 밤에는 󰡐해지킴[守歲]󰡑이라 하여 집 안팎에 불을 밝히고, 남녀가 다 새벽이 될 때까지 자지 않고 밤을 새운다.

 

일반행사와 특수행사세시풍속에는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고, 지방 또는 직업에 한정되어 행하는 특수한 것도 있다. 번화한 도시 생활자와 소박한 지방민 간에는 세시풍속이 다르게 행해지는데 이것은 도시 사람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2()3대가 같이 사는 일이 적고 직업 또한 각각 다르며 일상생활도 바쁘므로 세시풍속도 형식에 그치기 쉬우나 지방 사람은 그 지방에서 출생한 사람이 많고, 선조 때부터 같은 지방에 살고, 같은 직업에 종사하므로 선조가 남긴 습관을 지키는 데 충실하고, 이른바 보수적인 심리가 강하므로 세시풍속도 잘 고수되어 오고 있다. 정월대보름에 지방 사람들은 저녁 일찍이 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지만 도회지에서는 그와 같은 장소도,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실정이다. 이 외에도 지방 특유의 각종 놀이의 일례를 들면, 정월대보름의 󰡐풍어(豊漁)놀이󰡑는 어민들에게는 중요하지만, 농가에서는 별 관계가 없고, 615일의 전답제(田畓祭)715일의 󰡐호미씻이󰡑는 농민들에게는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 반대로 어민들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다. 4월 초파일의 󰡐관등(觀燈)놀이󰡑는 불교신자들에게는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 반대로 유교도(儒敎徒)들에게는 이들의 행사에 관계가 없고, 문묘석전제는 유교도들에게는 중요하지만, 그 반대로 불교도들에게는 관계가 없다. 이와 같이 한국의 세시풍속 중에는 국민 대다수가 행하는 일반적 행사가 있는 반면에 직업별로 행해지는 특수한 행사도 있다.

 

고유행사와 외래행사한국의 세시풍속 중 에는 농사에 관계되는 것이 상당히 많다. 정월의 풍흉점쥐불용알뜨기보리뿌리점사발재점닭울음점달불음점집불음점나무그림자점달맞이농기(農旗)맞이볏가릿대횃불싸움모심기놀음줄다리기윷점, 2월의 풍년빌기누에치기, 6월의 전답제, 7월의 호미씻이와 무배추심기, 8월의 소먹이놀이, 11월의 용의 밭갈기 등이다. 이것은 모두 고유의 세시풍속이지만 외래의 것도 많이 있다. 예컨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정월의 설그림[歲畵]문배(門俳)나무시집보내기칠성제(七星祭), 2월의 중화절(中和節)과 중화척(中和尺)춘기(春期) 문묘석전, 3월의 한식(寒食), 4월의 욕불일(浴佛日), 5월의 단오부적우란분회, 8월의 문묘석전, 9월의 중양절, 11월의 동지(冬至) 팥죽, 12월의 나례(儺禮)해지킴 등으로 이것은 예로부터 한국이 중국과 교통하여 중국에서 발생되고 발달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중에 불교 관계의 것으로서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들어온 욕불일우란분회 등은 한국의 연중행사가 되어왔는데, 이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불교가 신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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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 길9.JPG 南隱公遺稿(남은공유고) 律詩(율시) 龍潭赴人新婚時夜話(용담부인신혼시야화) 청남 24-01-13 132
484 길8.JPG 南隱公遺稿(남은공유고) 律詩(율시) 三月初旬客中吟(삼월초순객중음) 청남 24-01-13 60
483 길7.JPG 南隱公遺稿(남은공유고) 律詩(율시) 律詩(율시) 청남 24-01-13 57
482 길6.JPG 南隱公遺稿(남은공유고) 律詩(율시) 春夜吟(춘야음) 청남 24-01-13 79
481 비석 (3).JPG 敬齋箴(경재잠) 청남 23-11-10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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