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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

청남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

 

 

 

안동이 낳은 위대한 어머니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분이 남긴 명언을 해설해보도록 한다.

 

1.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家系(가계)

 

張夫人(장부인)金鶴峯(김학봉)선생의 수제자인 敬堂(경당) 張興孝(장흥효)선생의 딸이며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의 아내이다.

存齊(존제) 李徽逸(이휘일)葛庵(갈암) 李玄逸(이현일) 형제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이다.

정부인의 출생을 살펴보면은 안동군 서후면 금계동 춘파, 옛날에 봄파리라 불리던 작은 마을에서 조선조 선조 31년 서기 15981124일에 앞에서 말한 경당 장흥효 선생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나라안에서는 임진왜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일본침략군의 마지막 군대가 부산 부근의 바닷가에 남아서 발악적인 저항을 일삼고 있었든 시대였다.

따라서 1119일은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쫓겨가는 왜의 수군을 무찌른 날이고, 이날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시었다.

부인이 탄생한지 하루 지난 25일은 小西行長(소서행장)毛利吉成(모리길성)의 최종 부대가 일본으로 도망친 날이니 다시말하여 임진왜란 종전의 전일에 장씨가 출생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인 장씨의 출생지인 金溪里(금계리)는 오래된 마을로 한국의 地方誌(지방지)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은 永嘉誌(영가지)의 기록을 살펴보며은 安東府(안동부)에서 서쪽으로 약 20리에 있으며 옛날부터 <干年不敗의땅> 이라고 불리었고 고려말의 명신인 栢竹堂(백죽당), 裵尙志(배상지), 무오 사화에서 억울하게 죽은 節臣(절신) 慵齋(용재) 李宗準(이종준), 또 조선 중기에 벼슬을 이조판서까지 지낸 명신 磨厓(마애) 權輗(권예) 같은분의 출생지이고 鶴峯金誠一先生(학봉김성일선생)이 이 동리에 옮겨 살면서 마을이름이 금제로 고쳐지고 한자로는 金溪(금계)로 부르게 되었다. 이금계동의 4킬로미터 안쪽에 우리나라 큰 성씨인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 묘소가 있어서 그곳을 陵谷(능곡)이라 부르며 소백산에서 뻗어나온 천등산이 보이며 학가산의 영봉이 우뚝 솟았다.

동리가운데에 시내가 흘러서 시내를 두고 남북에 흩어져 산재 부락을 이루고있다.

동리의 모양이 거문고 같다해서 거문고금()과 제방제()를 썼어금제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물이 맑고 산천이 예쁘고 아담하여 언제나 평화롭고 조용하니 오래사는 분이 많아서 옛날부터 노인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2. 정부인장씨의 아버님 敬堂(경당) 張興孝(장흥효)先生

자료제공: 일강 김진규

 

敬堂(경당) 張興孝(장흥효)선생은 行原이라하고 敬堂(경당)으로 를 삼았다.

明宗(명종) 191564년 안동의 서후면 금계리 춘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고 마침 학봉 김성일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과거나 일신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공부는 버리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몸을 닦아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학문으로 연구의 지표로 삼게되었다.

 

性理學(성리학)의 핵심을 풀어놓은 近思錄(근사록)을 주로삼아 모든 경전에 널리 통했으며 정밀하게 탐구하고 신중히 생각하며 배운것을 힘써 실천하고 자신의 품성과 인격을 높이는 것으로 맡겨진 임무로 생각하며 꾿꾿하게 학자의 길로 나아갔다.

 

이에 스승 학봉선생은 이사람은 장차 크게 성취할것이니 내가 제자가운데 이런 사람을 얻게 되었음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하고 경당 장흥효를 문인 가운데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란의 때라 스승인 학봉선생이 난중 진주에서 돌아가신 슬픔을 가져야했고 나라의 조정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때마침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전원생활과 학문,교화,저술등에 몰두하고 있는 서애 유성룡선생께서 금계로 오시게 되니 그의 문하에 나아가게 되었다.

몇해를 선생에게 배웠고 다시 그때 안동부사로 부임한 寒岡(한강) 鄭逑(정구)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경당은 한결같이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임천에 숨어 책을 읽고 궁리하여 책장 머리에는 커다랗게 자를 써 붙이고 그것으로 생활의 근본을 삼았다.

張興孝(장흥효)의 호가 敬堂(경당)임은 이런 까닭에서 온것이다.

경당이 거처하는 집의 남쪽에는 아름다운 척석이 있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霽月臺(제월대)라 이름짓고는 문하생과 더불어 거기를 거닐면서 를 익히고 노래를 읊으며 티끌 세상을 벗어나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그러니 한때의 명사들이 모두가 敬堂(경당)을 존경하여 그들의 자제를 경당의 문하로 보내어 가르침을 받게되어 문도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게 되었다.

(儒學淵源錄上敬堂門人219이다.)

敬堂(경당)은 평생을 실천적 학문연구에 몸을 바쳐 퇴계선생의 을 이어 그의 외손자인 葛庵(갈암) 李玄逸(이현일)에게 전하여 영남학파의 맥을 잇도록한 대학자이다.

 

그러면 장씨부인의 성장과 아버지의 훈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높은 도학과 인격을 겸한 아버지 슬하에서 아무 부러움 없이 커 갔던 것이다.

어렸을때 아버지로부터 소학과 사략을 배우는데 가르치는 수고로움이 없이도 몇번 듣고는 글의 내용을 모두 소상하게 아는 천재소녀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장부인의 나이 겨우 열살 남짓한 애띤 소녀 일 때다.

한번은 敬堂(경당)이 문하에 놓인 선비에게 天地數理(천지수리)(),(),() ()의 수를 가르치는데 이것을 시원하게 알아듣는 이가 한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듣고만 있던 따님이 생각이 나서 내실로 들어와 딸에게 물었더니 장소녀는 말없이 조용히 차분하게 말문을 열고는 數卦(수괘)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근차근 대답하였다.

그 대답은 어려운 우주의 運行理致(운행이치)數理(수리)로 모두 헤아려 답하니 너무도 신통하며 기특하고도 놀라왔다고 하였다.

이로써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은 물론이고 딸에게 학문과 예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한 장부인의 학업은 하루의 생활가운데서 아버지가 가르친대로 반드시 경험하고 실행해 나갔던 것이다.

시를 짓는 데에서도 아버지의 큰 지도 없이 넉넉히 대가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 이미 소녀시절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3. 張氏의 어릴 때 지은 시

 

어느날 밖에서 소록소록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깥의 빗소리가 張少女에게 훌륭히 시상을 일으켰고 자연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색으로 몰입하게 된것이다.

 

蕭蕭吟(소소음)이라 지어진 시는 다음과 같다.

窓外雨蕭蕭하니

蕭蕭自然聲이러라.

我聞自然聲하니

我心亦自然이로다.

 

 

창밖에는 소록소록 비 내리는 소리 들리니

소록소록 그 소리는 自然의 소리러라.

내 지금 自然의 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도 또한 自然으로 가는 듯 하구나.

 

고요한 가운데 혼자 사색에 잠긴 문학소녀에게 문학적인 감흥을 일으킬 조건이 주어졌던 어느 비오는 날에 정취를 담은 시이기 도하다.

淸潭法師(청담법사)가 일찍이 이 시를 접하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을 무아의 경지에 이끌어 가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고 감탄하였다 한다.

 

1. 貞夫人(정부인)聖人吟(성인음)

 

聖人吟(성인음)이라는 시는 옛 성현의 높은 모습을 칭송 한 시로서 장少女(장소녀)가 생각했던 성현의 흠모와 거기에 이르고자 했던 마음을 알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不生聖人時(불생성인시)

不見聖人面(불견성인면)하고

聖人言可聞(성인언가문)하야

聖人心可見(성인심가견)이라.

 

성인의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서

성인의 모습을 뵙지 못했으나

성인이 남긴 말씀을 들을 수가 있어

聖人의 마음을 가히 알 수가 있다

 

이를 이역하면 聖人이라는 분도 보통 사람과 다를바가 조금도 없고, 聖人만이 가져야하는 특유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배울 수도 없겠으며 그 모양, 그 언어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행신 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일용으로 모두 도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니 배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고 애써 배우면은 무엇이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내가 성인의 시절에 나지도 듣지도 만나지도 못했지만 공부와 수양으로 성인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애써 배우면은 누구도 훌륭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 貞夫人(정부인)出嫁(출가)媤宅(시댁)

 

장씨 소녀는 열아홉 나이에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었다.

때는 광해군 8년 서기 1616년이었다.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 선생은 안동에서 200여리 떨어진 동해안에 가까운 영해부의 나릿골 仁良里(인량리)載寧李氏(재녕이씨) 가문의 사람이였다.

이시명은 나이가 27세의 청년으로 장부인 보다는 8세나 위인 사람이다.

그는 이미 9년전인 선조 40년 안동 예안현 오천리의 명문인 光山金氏(광산김씨) 近始齋(근시재) 金垓(김해)의 사위가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아내를 잃었다.

장부인은 자신보다 8살이 위이고 아내와 사별한 뒤를잇는 재취부인이 된 것이고 거기에다 남편에게는 여섯 살 되는 아들과 두 살 나는 딸 하나가 있었으니 11녀의 계모가 된 셈이다.

경당 장흥효선생이 귀여운 외동딸을 이시명의 후처부인으로 또 전처의 소생이 있는 계모로 시집보내게 되었던 데는 여러 가지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敬堂(경당)은 나이가 53세로 그의 학문과 덕행은 영남에 널리 알려져 많은 문도가 모여 큰 학당을 이루고 있었다.

사위가 된 이시명은 이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는 의욕 있는 젊은이로 패기가 넘치고 있었으며 그때에 이미 소장학자로 그틀이 잡히어 가고 있으니 경당 장흥효가 크게 기대를 한 젊은이었던 것이다.

敬堂(경당)은 장차 자신의 학문을 계승하여 줄만한 능력이 충분하게 감추어져 있는 청년으로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을 믿었던 것이고 내심으로는 경당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여 후세에 빛낼수 있는 사람으로 알고 특별히 아끼며 힘주어 가르치고 있던 문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치가 자신의 무남독녀로 하여금 나이가 여덟이나 위이고 11녀의 아버지인 이시명선생에게 19살의 딸을 출가시키는 용단이 내려졌으리라고 본다.

또 옛날 법도로 보아 양반집 규수가 시집을 가는데는 전취냐, 후취냐? 하는 것이 가문과는 큰 상관이 없었고 그 맞이하는 사위의 인간성과 품격이 높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집 규수를 맞이할 수 있는 시대이었던 것이다.

또 장부인 같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총명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맞이하는 청년 이시명도 그만한 人 物이었던것이니 천정의 배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소녀 장부인을 재취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석계 이시명 선생에 대하여 알아본다.

李時明(이시명)은 선조 23년 서기 159011월에 영해의 仁良里(인량리) 나릿골에 살며 宜寧縣監(의령현감)을 지내고 대대로 벼슬하고 학문하는 집안인 載寧李氏(재녕이씨)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는 모습이나 공부하는 모습에서 才氣(재기)가 넘쳤으며 동리의 어른들이 時明(시명)소년의 행동거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총명하고 진취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晦叔(회숙)이라했고 호를 石溪(석계)라하였다.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18세가 되던해 宜寧縣監(의령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님을 따라 아버지의 임지로 갔다.

마침 忘憂堂(망우당) 郭再祐(곽재우)선생이 오셔서 석계의 독서하는 모습을 보고는 탄식을 하며 하시는 말씀이

벼슬하는 부형을 따라와서 지내는 자제들은 대개가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봤는데 지금 자네의 지조가 이러듯 높으니 가히 그 무리와는 몇 갑절 높은 품위를 느끼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렇듯 훌륭하신 아버님의 지도와 자신의 총명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석계 선생의 소년시절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3. 張夫人(장부인) 子女(자녀) - 七賢子(칠현자)

 

그는 앞에서 말하였지만 초취부인이 낳은 11여와 장부인께서 낳은 62여를 합쳐서 칠남3여를 양육시켜낸 이른바 현모양처의 주인공이었다.

이 칠남삼녀를 간략하게 소개드리면은 초취의 아들은 이름이 尙逸(상일)이고 翼世(익세)라했으며 靜黙齋(정묵재)라하였다. 장부인이 시집오기 5년전 광해 31611년에 출생했으며 장성하여서는 학문과 덕행이 크게 이루어 참봉으로 천거된 학자이기도 하였다.

張夫人이 처음낳은 아들은 이름이 徽逸(휘일)이고 翼文(익문)이라 했으며 存齋(존재)라고 스스로 하였다.

장부인이 시집와서 3년되는 해인 광해 111619년에 출생했다. 장성하였서는 학문과 덕행이 크게 이루어 洪範衍義(홍범연의)라는 정치학의 큰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기도 하였다.

張夫人 30세 되던 해에 셋째 아들을 낳으니 그 해가 인조 51627년이다.

이분이 葛庵(갈암) 李玄逸(이현일) 선생으로 翼升(익승)이라했다.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에게는 셋째아들이고 장부인에게는 둘째로 출생한 아들이다.

갈암선생은 숙종조에 학행이 널리 알려져 벼슬이 이조판서까지 이른 어른으로 영남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한국성리학상 가장 뚜렷한 학자의 한분이시다.

장부인이 낳은 셋째 아들은 이름이 崇逸(숭일) 인데 부인이 시집오고 15년이 되던 해인 인조91631년에 출생했다.

應中(응중)이라 했으며 恒齋(항재)라 불렀고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벼슬은 세마현감을 지냈으며 학문과 덕행이 높았다고 한다.

또 넷째 아들은 이름이 靖逸(정일)이고 인조 131635년 출생했다.

景羲(경희)이며 定于齋(정우재)이다.

학문이 높았으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다섯째는 이름이 隆逸(융일)이며 子躍(자약)이고 平齋(평재)라했다.

經世家(경세가)이며 예학에 밝았다.

여섯째는 이름이 雲逸(운일)이며 子眞(자진)이고 廣鹿(광록)이라했으며 문장을 잘했다고 한다.

전처소생의 딸은 余國獻(여국헌)에 시집보내 훌륭한 부녀로 고을에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뒷날에 학문하던 분들이 장부인이 낳고 키운 칠형제를 七賢子(칠현자)라 불러서 모두를 칭송이 자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女中君子(여중군자)가운데 현모이고 양처이며 문장가는 있어도 張夫人(장부인)처럼 많은 아들을 낳아서 하나같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또 자신은 언제나 숨어서 남을 돕고, 자신이 익힌 학덕을 늘 겸손하게 감추고저 했던 어른은 좀처럼 없었다.

여기에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의 놀라운 면모가 있다고 하겠다.

 

 

 

1. 張夫人(장부인)學問(학문)境地(경지)

 

貞夫人張氏(정부인장씨)는 글씨 가운데 초서를 잘썼고, 烙畵(낙화)와 수()도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烙畵(낙화)라는 것은 인두로 나무에 찌져서 그리는 그림이다.

그가 남긴 作品이 많지는 않지만은 그것이 모두 소녀시절에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부인의 글씨가 너무나 뛰어났다함을 증명하는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 즉 조선 중기의 서예대가로 특히 초서에 조예가 깊었다는 淸風子(청풍자) 鄭允穆(정윤목)선생의 찬사라 하겠다.

 

淸風子鄭允穆先生(청풍자정윤목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간단히 알아본다.

그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고 서예대가이며 또 문장을 잘하였다고 한다.

선조 41571년에 나셔서 1629연에 세상을 떠났으니 59세를 享首(향수)한 경상도 禮泉(예천) 출신의 어른이시다.

임진왜란 때 좌의정으로 국가의 큰 임무를 맡아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伸救(신구)樂圃 (정탁) 선생의 셋째 아들이시다.

張敬堂(장경당) 선생보다도 나이가 일곱이 아래나 유서애선생과 鄭寒岡(정한강)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문의 벗으로 퍽이나 친숙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이로 淸風子(청풍자)는 학문과 기개가 서로 맞는 학자이고보니 예천서 안동 금계로 벗을 찾아오게 되니 두 분의 만남은 밤이 새는 것도 잊고 朋友講論(붕우강논) 을하고 시간을 보냈다.

이에 두 선비는 글씨에도 말이 미쳤고 淸風子(청풍자)자신이 갖는 대단한 필치로 몇폭의 휘호를 경당에 주었던 것이다.

그때 敬堂(경당)張少女(장소녀)가 쓴 적벽부체의 초서를 청범자에게 보이고는 강평과 지도를 부탁했으니 당대의 초서대가인 淸風子(청풍자)는 그 글씨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敬堂(경당)에게 말하기를 저 애띤 소녀의 글씨냐고 확인을 하고는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정말 놀라우네! 이글씨에 나타난 기풍과 굳센 필세가 호기롭고 굵직함이 우리 東國(朝鮮)사람의 글씨와는 그 를 달리하고 있네! 나는 처음 이글씨를 보고는 중국 어느 대가의 글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았네. 정말 대단한 솜씨야!

하면서 경탄해마지 아니하셨다고 한다.

지금 장부인의 필적으로 전하는 초서는 몇 점이 없으며 그때 淸風子(청풍자)가 보았다는 적벽부의 병서는 전하지 아니하나 장부인의 자작시인 鶴髮三章(학발삼장)의 초서가 판각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張夫人後孫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張夫人의 글씨는 八龍(팔용)을 수놓은 비단 한 폭과 鶴髮詩帖(학발시첩)을 함에 넣어서 보배로 간수 되고있다.

그 글씨는 敬堂先生(경당선생)이 늙게된 어느날 외손자인 存齋(존재) 갈암형제를 불러 앞에 앉히고는 이것은 너희 어미가 어릴적에 장난삼아 쓴것이니 너희들이 받아 두어서 소중하게 간수하라고 일르며 물려주신것이라한다.

그때까지 아들 형제나 남편인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선생 까지도 장부인의 글씨와 문장과 시가 그렇게 뛰어남을 알지못하였다고한다.

 

장부인이 처녀시절에 지었다는 鶴髮詩에 대하여 그 원문을 소개한다.

우선 장부인이 어린 시절에 지었다는 학발시의 시상에 대하여 말하면 열다섯쯤 되었을 나이에 어머니와 손을 잡고 이웃 동리에 사는 불쌍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시름을 위로하고자 그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젊은 남편을 멀리 변방의 ()자리에 보낸 아낙의 딱한 사정과 아들의 기다림에 지쳐 몸져누워 앓고있는 80이 넘은 늙은 할머니의 기다림에 지친 모습을 보고 그 가족과 함께 울었다고한다.

이와같이 가엾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보고온 張少女는 남몰래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시상에 잠겨드니 한참 있다 붓을 잡고 종이에다 시를 썼다.

이것이 유명한 학발시 삼장이다.

鶴髮詩三章은 천년을 산다고하는 학의 털과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두고 읊은 詩 三首라는 뜻이다.

그 첫째장

鶴髮臥病行子萬里(학발와병행자만리)

行子萬里曷月歸矣(행자만리갈월귀의)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子息은 멀리 萬里되는 수자리(군역)에 갔구나

만리 밖 자리의 내아들은 어느 달에 오려는가!

 

병석에 누워있는 늙은 어머니가 군역에 간 아들이 그리워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잘 그렸다고한다.

그 둘째장은

 

鶴髮抱病西山日迫(학발포병서산일박)

祝手于天天何漠漠(축수우천천하막막)

 

새하얀 머리되어 을 안고 누웠으나

西山에 지는 해는 붉게타며 저물어만 간다.

하늘에 손을모아 빌고 또빌어봐도

어쩧다 無心한 하늘은 막막하여 대답조차없구나.

 

이 둘째장은 그리움과 가난의 안타까움에 지친 고부는 손을 모아하늘에다 빌면서 막막한 천지신명의 처분만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대답없는 하늘을보며 병도 잊은채 밖으로 뛰어나간다고하는 것이 그려저 있다.

 

그 셋째 장은

 

鶴髮扶病或起或(학발부병혹기혹부)

今尙如斯絶倨何若(금상여사절거하약)

 

새하얀 머리는 을 무릎쓰고 혹은 일어서고 혹 은 넘어졌다.

지금이 오히려 이와같은데 찢어진 속옷자락이 어 찌 이모양인고!

 

이얼마나 처절한 기다림인가? 안타깝게 기다림에 지친 고달픔에 우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불쌍하고 가난한 시어머니는 병도 잊은채 아들의 환상을 찾아 뛰어나갔다.

눈물과 한숨과 가난속에 우는 늙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우리의 옛날 여류시인 가운데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어느 계층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보고 자신도 그들의 마음과 애절함을 함께한 시인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한창 자신만의 즐거움과 자랑속에서 자라나갈 어린 少女가 이웃의 가난하고 딱한 계층의 처지에 마음을 함께한 그 인간주의적인 마음가짐을 했던 소녀시인이 있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못할것이며 이분의 정신을 높이 받들고 이어 나가야 할것이다.

 

이와같은 張夫人의 고결한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안동지방에서는 안동청년유도회주최로 정부인안동장씨추모휘호대회를 개최하여 그높은 婦德(부덕)을 되새겨 나가고 있으며 금년까지 5회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앞에서 정부인안동장씨의 글씨와 학문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계속하여 두편의 시를 감상하고 또 장부인의 저술인 料理書(요리서)와 장부인의 만년을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1. 張夫人晩年(만년) 감상

 

만년이되어 孫子에게 주는 두편의 詩 中에 그 한 을 소개

하면

 

新歲作戒文(신세작계문)하니

汝志非今人(여지비금인)이라

童子已向學(동자기향학)하여

可成儒者眞(가성유자진)이러라.

 

새해에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고하니

너의 뜻은 지금의 사람과는 다르구나.

어린아이 같았던 네가 학문을 지양하고 있다니 벌써 옳고 바른 선비가 되려고 하는구나.

 

에서 孫子에게 건전하게 살아가라는 격려와 바르게 커야한다는 훈계등 높은 인간정신이 풍겨나온 이기도하다.

張夫人73세가 되던 해에 자손과 더불어 기쁨을 노래했으니 이를 소개하면은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七十加三稀又稀(칠십가삼희우희)

稀又稀中多男子(희우희중다남자)

稀又稀中稀又稀(희우희중희우희)로다.

 

인생에 70을 사는것은 옛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

70나이에 세살을 더했으니 드문가운데 더 드문일이라 드문가운데 아들이 많으니 더욱 드문일

드문가운데 드문일이 또 겹쳐 드문 경사가 나에게 있 구나.

 

의 이역을 한다면은 張夫人이 향년 83세로 타개하셨다고하니 10년전인 73세때 지은것으로 오래 살게된 기쁨과 아들 손자가 많은 자신의 기쁨을 로 담은 것이라고 하겠다.

 

2. 張夫人料理書(요리서)

 

張夫人이 지었다는 料理冊의 이름은 표지에 閨壼是議方(규곤시의방)이라써 있고 내용 첫머리에는 飮食知味方(음식지미방)이라 제목하고 글은 古文(고문)이고 궁체의 붓글씨이다.

이책이 발견되게된 내력을 말하면 1950년대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에 있는 書庫(서고) 정리중에 나온것으로 전 경북대학교 金思燁(김사엽) 교수가 발견하여 경북대론문집에 자료로 실린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그후로 요리학을 전공하는 黃慧性(황혜성) 교수가 현대말로 옮기어 국내에 출판되었던것은 1980년이었다.

또 이책은 일본에서도 제일 동포 요리연구가 鄭大燮(정대섭)씨에 의해서 東洋文庫版(동양문고판) 1982.12.15 “朝鮮料理書란 이름으로 조선조의 다른 2편의 요리책과 함께 편집되어 출판되었다고하며 이책은 동하세아에서도 이런 종류의 저술로서 부녀자가 이루게 된 것으로는 최초인것이라고한다.

여기에 대해서 한양대학의 이성우 교수가 朝鮮時代조리서의 분석적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1982년에 발표한바도 있다.

 

책의 내용을 말하면 軟鷄(연계), 熊掌(곰발바닥), 野猪肉(야저육), 家猪肉(가저육), 개장, 개장고지느람이, 개장국느람이, 개장찜, 누른개삶는법, 개장곳는법, 석유탕(石榴湯), 수어만도, 수증계(水蒸鷄)등을 열거 할수있으며 그중에서 중요한것은 시집간 며느리가 시집 어른께 음식짓는 마음가짐을 가르친 것이다.

시집을 가게되면 그 사흘째되는날 주방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그러면 먼져 손을 씻고 국을 지어야 한다.

아직 시어머니의 식성을 익혀 알지 못하나 어린 시누이를 먼저 맛보게 하야야한다고 하셨다.

 

3. 張夫人의 만년과 葛庵(갈암)이 지은 張夫人行實記(장부인행실 기)

 

張夫人께서는 七賢子(칠현자)의 부덕을 지닌 어머니로서 세상에 알려진바 있으나 70을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말년에는 그렇게 어질고 높은 행실이 착한 학자로 알려진 徽逸(휘일)과 막내아들 雲逸(운일)과 두딸은 불행히도 어머니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식을 먼져 저승으로 보내는 슬픔이 많았겠으나 남편과 남은 다른 자식을 위하여 의였한 높은 자애심과 인내로써 살아온 張夫人이야말로 만세의 귀감이 될것이다.

한편 남편이신 석계 이시명선생은 그에 앞서 3년전인 숙종 371674년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셋째 아들 갈암선생의 공이 進宴(진연)의 벼슬에 오르니 나라에서도 그 은혜로 부인에게 쌀,,비단,무명등 식물을 내려주셨다.

상감께서는 嘉善大夫吏曹判書(가선대부이조판서)의 벼슬을 셋째 아들 갈암에게 내리니 夫人께서도 貞夫人賜號(사호)가 나라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천명을 어이할수 없는지라 경신년 영조 16174077 일 갑오일에 石保(석보) 마을의 조그마한 집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리고 張夫人은 눈을 감았다.

슬하에 七賢子(칠현자)를 두었으며 夫人은 하늘이주신 남다른 성품으로 거기에 더하기를 학문에 힘썼으며 착한일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여 어려서 부터 의협심이 강하였다.

또 세상에 드문 예술적인 재질이있어 길이 후세에 남길 예술작품을 남기었으며 기기에다 料理하는 책까지 저술한 女人이라 이나라에 張夫人을 두고 그누구가 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평범했으며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고저 하지않앗다. 이나라의 훌륭한 여류시인 누구의 작품에 비겨도 손색 없는 높은 이상과 문학적감각이 풍기는 시를 남기면서 雅號(아호)別號(별호)도 없는 각박한 貞夫人張氏(정부인장씨)로써 그는 영원토록 우리 한국의 위대한 여인으로서 다시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는것이다.

張夫人의 셋째아들 갈암선생께서는 어머니 張夫人行實記를 찬하여 후손과 후대사람들에게 귀감이되고자 한것이라니 張夫人의 일대기를 엮은것이라 할것이다.

위에서 말한 張夫人이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같이 지켜왔음을 알도록 하는것도 오늘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기때문입니다.

張夫人이 시집살이하던 경상북도의 산골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 서있는 遺跡碑文(유적비문)의 내용을 일부 알아본다.

夫人께서는 학식과 덕행이 범인과는 비할바가 아닌 절인의 경지에 있으면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숨기고 자제하시며 오직 희생적으로 三從之道(삼종지도)를 따라 至誠(지성)으로써 군자를 섬겨 부군의 학도를 도우셨으니 효제가 出天(출천)하셨고 공경함으로써 시부모를 받들었으며 慈愛(자애)와 규계로써 자녀를 양육하여 바른길로 계도하셨으니 현모요 위대한 교육자이셨으며 人愛(인애)로 비복을 다스리며 주휼로써 이웃사람을 돌보셨으니 훌륭한 인격자이셨다.

실로 부인의 덕행은 만세인류의 사표가 될것이다.

이토록 숭고하신 부인의 淑德懿行(숙덕의행)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것도 兒女子(아녀자)表彰(표창)이 분수가아니라는 당신의 겸양때문이었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동이 배출한 훌륭한 貞夫人(정부인) 安東張氏(안동장씨)에 대하여서 살펴보았다.

夫人天才的인 두뇌와 지혜는 말할 것도 없으며 가정생활은 물론 사회교화와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도 남달리 많았으니 위대한 여성 이름도 없는 장씨 그는 옛날 우리 한국의 어진 어머니의 표상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아내와 며느리의 귀감이 될 것이며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고에 빛을 던져준 효녀요. 현모량처로 우리 겨레의 여성운동가로서 길이 그 이름이 남을 아나라 애국자 장부인을 길이 추모하고 그 정신깊이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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