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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안동의 줄당기기

청남

 

 

안동의 줄당기기

 

'한국민속고'에 의하면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경기 이남에 줄다리기가 성행된다고 했다.

지금 가장 성한 지방은 경기 이남인데 그 중에서도 수원, 유천, 당진, 천안, 대구, 동래, 진주 등이 자고로 유명하더니 근대에 와서는 동래의 줄다리기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특히, 안동의 줄다리기도 못지 않게 활발하였음이 전해져 있고, 그 실증으로서 '한국민속지(韓國民俗誌)'에 의하면 줄다리기가 제일 성행하는 곳으로는 경상도 진주, 창녕, 안동, 경주일 것이라 했고 의성. 영양의 줄당기기도 상당히 성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이 개관

안동의 줄당기기는 이미 50여년 전에 놀이가 단절되어 그 실제를 고노(古老)들의 이야기로 복원할 수밖에 없으나 타지방의 줄다리기와 같이 동서 양파로 편을 갈라한 것은 사실이었다.

안동의 원래 행정구역은 13방이 있었다. 현 안동시는 과거 13방을 동서로 구분하였으니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하여 구역을 갈랐음을 알 수 있다.

 

 

경축시기와 장소

안동지방의 정월 상원의 놀이도 승부를 다투는 겨루기로 안동의 삼거신(三巨神)의 전설에 결연 시킨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동 서부 양편이 다투는 동채싸움과 줄당기기 중 하나를 연중행사로 정월 망일 즉, 상원일 오시에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줄당기기에 대한 속설을 보면 시골 농민의 유일한 장난으로써 이와 같이 중남부 지방에서만 성행하는 것은 그 시초가 농민의 관개용(灌漑用) 보를 만들기 위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논이 많고 보리가 있는 곳에서 행하여지며 그 승부로서 농사의 흉풍(凶豊)을 따지는 풍속이 있다고 하고, 논 보리밭 주인들도 보리를 밟아주는 결과가 되어 좋아하였다고 한다.

안동에서도 현 역전(驛前: 당시의 넓은 들)이 줄당기기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일제식민지 이후에도 실시한 일이 있다 한다.

 

안동지방은 전술한 바와 같이 동부 6, 서부 7방으로 양편을 나누었으며 그 외의 참가인원으로 동쪽으로 진보에 이르기까지, 서쪽으로는 豊山(풍산) 豊川(풍천)에 이르기까지 뻗쳤다고 하니 양방의 인원 제한은 물론 불분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줄당기기로 인한 사고로 죽는 사람, 신체적 불구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며 기운이 기진맥진하면 그냥 깔고도 앉고 심하면 소와 말까지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급하면 아낙네, 기생까지 덤벼들고, 술장수나 엿장수까지 엿판을 내던지고 덤벼들기도 하였으며 아이들까지 줄에 매 달렸다고 하니 추측컨대 한편 인원만도 5백 여명을 훨씬 넘었으리라 생각된다

 

줄의 크기와 당기기

안동에서의 줄다리기 준비과정은 동부에서 숫줄, 서부에서는 암줄을 양편 모두 비밀리에 제작했다고 전하며 줄 제작시의 금기 또한 엄격하였다고 전한다.

 

줄의 머리 부위의 굵기를 감추려 했고, 둘째로는 상대의 첩자가 몰래 줄 속에 칼을 집어넣어 줄다리기 때 줄이 쉽게 끊어지게 할 수 있는 점을 막기 위하여 엄중한 경계를 하였고, 같은 편이 여자나 상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대개 동부는 동부대로 서부는 또 서부대로 각 농가로부터 정월 10일을 전후해서 짚과 새끼를, 그리고 짚을 사기 위한 현금을 기부해 왔다고 한다.

 

줄의 크기는 장정의 팔뚝 만큼씩이나 되는 크고 기다란 줄들을 수십 가락 합쳐 꼬아 직경 2척이 훨씬 넘는 굵은 줄을 만들고, 그 줄에다 다시 손잡이 줄을 얽어매어 놓는다. 굵은 어미줄에 여러 개의 새끼줄을 연결하여 많은 사람이 끌어 다니기에 용이하게 만들어진 이런 줄당기기를 '게줄싸움'이라고도 한다.

 

큰 줄에다 작은 줄을 맨 것이 마치 게의 발과 형용이 같다는데서 그리 불리는 것이다. 줄의 모양은 머리부위가 굵고 크고 꼬리 부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용두사미의 격이 되기도 했다. 줄의 경계지점(머리부위)에는 동서부가 제각기 많은 줄을 가지고 두껍고 높게 겹겹이 합쳐 싸매고, 암수의 '도래'를 꽂아서 동서부가 힘껏 당겨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암줄에 숫줄을 연결시키기 위한 줄 머리부위에서 장정 7, 8명이 들어가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자료출처: 안동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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