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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佛敎(불교)의 實踐(실천). 3

청남

 

 

佛敎(불교) 實踐(실천). 3

 

3善惡(선악)種類(종류).

 

1. 身體上(신체상)三種善惡(삼종선악).

 

이미 能發(능발)()에 대해서, 또 그 性質(성질)에 관한 功能(공능)에 따라 善惡(선악)分界(분계)를 다 설명하였다.

지금부터는 그 ()이란 도대체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또한 ()는 몇 가지가 있는가를 알아보며, 善惡(선악) 두 가지의 種類(종류)를 살펴보기로 한다.

 

()의 종류는 무수히 많고, 또한 ()의 종류도 역시 無量(무량)하다.

그러나 그 으뜸이 될 만한 것을 헤아릴 때는 身體上(신체상)에 발동하는 善惡(선악)의 종류는 3가지가 있고, 言語上(언어상)으로 나타나는 善惡(선악)에는 4종이 있으며, 意內(의내)惹起(야기)되는 善惡(선악)에는 3종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합해서 身三口四意三(신삼구사의삼)十善十惡(십선십악)이라 한다.

 

우선 身體上(신체상)에서의 三種(삼종)善惡(선악)부터 설명하려한다.

 

우리들 身體上(신체상)에 관한 善惡(선악)의 종류가 많다 해도 그 ()된 것을 살펴보면 殺生(살생)偸盜(투도)邪淫(사음)이며, 이것을 身三惡(신삼악)이라하고, 三種(삼종)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며 실행하는 것을 身三善(신삼선)이라 한다.

 

그렇다면 殺生(살생)이란 무엇일까.

무릇 生命(생명)있는 것을 殺害(살해)해서 그의 생명을 斷絶(단절)시키는 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大罪(대죄)가 있고 小罪(소죄)가 있는데, 大罪(대죄)人類(인류)를 살해하는 것을 말 하고, 小罪(소죄)畜生(축생)을 살해하는 것을 말 한다.

大罪(대죄) 가운데 또 重罪(중죄)가 있고 輕罪(경죄)가 있다.

重罪(중죄)君父聖賢(군부성현) 有德(유덕)한 자와, 또한 우리에게 恩惠(은혜)를 베풀어준 자를 살해 하는 것을 말하고, 輕罪(경죄)凡常(범상)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말 한다.

 

다음에 小罪(소죄) 가운데도 重罪(중죄)가 있고 輕罪(경죄)가 있는데, 重罪(중죄)란 우리에게 恩緣(은연)이 있고, 또한 그에게 ()이 있는 것을 살상하는 것을 말한다. 輕罪(경죄)는 이들을 제외한 여타의 動物(동물)을 살상하는 것을 말 한다.

 

이상은 모두 所殺(소살) 의 경우에 대해서 한차례 설명을 한 것이다.

 

다시 이를 能殺(능살)意志(의지), 그 수단에 대해 설명을 하면, ()大小輕重(대소경중)은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진다.

가령 生命(생명) 있는 자를 殺害(살해)하는 경우라도, 故意的(고의적)인가 고의적이 아닌가에 따라 다르다.

전적으로 실수로 살해하였고, 또한 살해 뒤에 慚愧(참괴)懺悔(참회)의 정이 두터운 경우는, 故意的(고의적)인 살생이 아니고 또한 살생을 後悔(후회)하는 마음이 있음으로서 罪惡(죄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단 가령 故意的(고의적)이 아닌 살생이더라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고, 또한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 해도 고의적으로 살해 했다면 이는 모두 罪惡(죄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간의 법률과 다른 점은, 세간의 법률은 다만 故意(고의) 不故意(불고의)로만 죄의 경중을 따지지만, 불교는 故意(고의) 不故意(불고의) 외에 慚愧心(참괴심)有無(유무)로서 죄의 輕重(경중)을 가리는 것이 세간의 법률과 다르다.

 

세간의 법률은 外形上(외형상)의 문제를 주로해서 ()輕重(경중)을 논하고, 佛敎(불교)內心(내심)을 주로 해서 ()有無(유무)를 판정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법률은 다만 人類(인류)殺害(살해)하고 虐待(학대)하고 毆打(구타)하는 것을 ()로 논하고 動物(동물) 殺害(살해)의 죄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는 人類(인류) 외에 動物殺害(동물살해)의 죄도 논한다.

세간의 법률은 다만 인류사회의 질서를 整備(정비)하고, 인권보호를 주로 논하지만, 불교는 仁愛(인애)道義(도의)를 한층 더 깊게 논하고 있다.

 

이상 이를 요약하면 殺生(살생)이란 暴惡(포악)不仁(불인)極端(극단)을 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生者(생자)生命(생명)을 단절시키기 까지는 아니해도 生者(생자)를 괴롭히고, 虐待(학대)하는 행동은 모두 殺生罪(살생죄) 범위 내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반해서 生命(생명)있는 모든 것을 보고, 가령 暴惡(포악)한 자라도, 자신의 暴惡(포악)을 반성하며 동시에 生命(생명)貴重(귀중)하게 여기며, 생명을 보호하고, 그 생명의 災厄(재액)을 구제하려 노력하고, 또한 有德(유덕)君子(군자)를 보고는 그의 ()輕視(경시)하지 않을 줄 알고, 그를 敬畏(경외)하고 尊重(존중)할 뜻을 펴며, 또한 자기에게 恩惠(은혜)를 베푼 君父(군부) 등을 보고는 그들의 은혜를 깊게 이해하고 버리면 아니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항상 그들 위해 보답 할 것을 힘쓰며, 또한 내게 緣故(연고)있는 眷屬(권속)과 친구들을 보면 그 인연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을 생각하고, 그 인연을 한층 더 깊게 하기 위해 노력 하면, 곧 그것이 殺生罪(살생죄)에 반대되는 身業(신업) 1善行(선행)이다.

 

이런 행위를 仁慈博愛(인자박애)의 행동이라 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우리는 身業(신업) 1善惡(선악) 행위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혹자는,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죄악이라 할지라도, 동물을 살해 하는 것은 죄악이 될 수 없다.라 하는 자도 있다.

저 기독교신자 같은 경우는, 동물을 殺害(살해)해서 우리 인간에게 提供(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화합하는 것이라 설한다.

 

아아! 미혹함이 너무나 심하구나.

지금 이 넓고 넓은 천하에는 大槪(대개)가 이러한 沒理(몰리)妄說(망설)을 고집하고 있으니 실로 가련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구나.

 

우리는 生命(생명)있는 모든 것을 살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正理(정리)라고 順應(순응)하지 않으며 ()이라 하고, 또한 모든 生命(생명)있는 것을 救濟(구제)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正理(정리)에 순응하기 때문에 ()이라고 ()한다.

하늘은 만물을 덮고 있고, 땅은 만물을 싣고 있다. 四季節(사계절)循環(순환)하며, 風雨(풍우)가 적시에 맞춰 만물을 生育(생육)시키는 것은 천지대자연의 大法(대법)이며 宇宙(우주)萬邦(만방)正道(정도)이다.

그러니 萬物(만물)生育(생육)天法(천법)이며 天則(천칙)이며 天然(천연)이며 天理(천리)正道(정도)이므로, 萬物(만물)生育(생육)을 도우는 것은 正理(정리)順應(순응)行動(행동)이다.

 

이와 같이 萬物(만물)生育(생육)을 도우는 것이 天地(천지)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여기에 ()해서 萬物(만물)生育(생육)妨害(방해)하는 行爲(행위)宇宙(우주)正理(정리)違背(위배) 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서 佛敎(불교)萬物(만물)生育(생육)을 보호하는 행위의 모든 것을 順理(순리)正行(정행)으로 삼고, 만물의 生長(생장)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道理(도리)邪行(사행)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生命(생명)情緖(정서)를 갖는 動物(동물)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이나, 그들이 가장 尊重(존중)하고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生命(생명)을 빼앗아 爽快(상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正理(정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無慚(무참) 無愧(무괴) 無仁(무인) 無悲(무비)가 심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生物(생물)이라는 것은 自己(자기)生存(생존)을 바라지 않는 것은 없다. 또한 자기의 死滅(사멸)을 싫어하지 않는 것도 없다.

 

假使(가사) 植物(식물)이라 할지라도 情緖(정서)가 있으면, 動物(동물)과 같이 자기의 생존을 희망함과 동시에 자기의 死滅(사멸)을 싫어 할 것이다.

 

하물며 다소의 정서가 있는 동물에 있어서랴!

새가 하늘을 높이 날고, 물고기가 연못 깊이 잠기고, 짐승들이 山林(산림)에 숨어서 사는 것도 모두 자신의 생존을 바라고, 死滅(사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아프면 다른 사람의 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는 ()을 널리 擴大(확대)해서 생각해 보라.

인정상 無益(무익)한 살생은 참기가 어렵다.

 

孔子(공자)께서 吾道一以貫之曰忠恕之道(오도일이관지왈충서지도)라 하였다. 이것은 忠恕(충서)()訓戒(훈계) 한 것이다.

 

실로 忠恕(충서)()를 갖고 있는 것은 人間(인간)이다.

忠恕(충서)()가 없으면 畜生(축생)이나 다름이 없다. 動物(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忠恕(충서)()가 없기 때문에 항상 강자가 약자를 살해하며 용서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동물들도 같은 무리는 서로 친하고, 모자는 서로 사랑하며, 또한 無益(무익)殺生(살생)을 하는 것은 드물다.

 

그런데 人間(인간)으로서 無益(무익)殺生(살생)을 하며 즐거워하고 傷心(상심)하지 않는 것은 忠恕(충서)仁愛(인애)()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런 것은 미워해야 하고, 이 밖에 미워 할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基督敎(기독교)邪說(사설)雷同(뇌동)되어 宇宙(우주)正理(정리)違背(위배)되는 행동을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되겠다.

 

이와 같이 말하면, 殺生(살생)은 죄악의 極致(극치)라고 하니 국가에 逆謀(역모)를 하는 逆賊(역적)이라도 誅殺(주살) 해서는 아니 되고, 人類(인류)를 해치는 猛獸(맹수)毒蟲(독충)도 박멸 할 수 없고, 人類(인류)生存(생존)을 위해 食品(식품)을 위한 필수의 屠殺(도살)漁獲(어획)도 금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국가는 安保(안보)를 유지 할 수가 없고, 인류는 食量(식량)이 없어 생존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佛敎(불교)國家安保(국가안보)()가 되고, 人生繁榮(인생번영)妨害(방해)가 되는 ()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 말하기를, ()이란 正理順應(정리순응)의 행위 이며, 正理(정리)萬物生育(만물생육)大法(대법)을 도우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生育(생육)妨害(방해)하는 殺生(살생)大罪(대죄) 小罪(소죄) 重罪(중죄) 輕罪(경죄) 등 여러 가지가 있는 것과 같이, 生國補翼(생국보익)仁慈(인자)에도 여러 가지 가 있다.

 

國賊(국적)誅殺(주살)하고 인간에게 ()를 주는 惡獸(악수)毒蟲(독충)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國家(국가)安保(안보)를 위해서, 또는 人類(인류)危難(위난)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는 正理(정리)不順(불순)行爲(행위)가 아니고, 도리어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善行(선행)이 되는 것이다.

 

多數(다수)를 살리기 위해 小數(소수)()치고, 良民(양민)을 보호하기 위해 暴惡(포악)한 자를 처단하는 행위는, 正理(정리)不順(불순)行爲(행위)가 아니고, 도리어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善行(선행)이 되는 것이다.

 

涅槃經(열반경), 佛陀(불타)過去(과거) 因位(인위) 國賊(국적)討伐(토벌)하기 위하고, 正道(정도)守護(수호)하기 위하여, ()을 일으켜 ()을 세우는 因緣(인연)()한 것과 같고, 佛陀(불타)가 제정한 戒律(계율)開遮(개차)의 두 법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은 다 그러한 취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屠畜(도축)漁獵(어엽)生業(생업)으로 하는 경우도, 根本(근본) 規律(규율)로서는 許容(허용) 할 수가 없으나, 생활을 위해 부득이하며, 마음속에 죽음을 당하는 자를 가련하게 여기고 그 ()()로서 여기면 혹은 용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出世間(출세간) 佛敎(불교)의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종교인은 지켜야 할 특수한 道義(도의)에서이것을 容恕(용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世間(세간), 世俗(세속) 普通(보통)道義(도의)에서 용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生物(생물)輔育(보육) 하는 것은 順理(순리)의 행동이므로 ()이고, 生育(생육)妨害(방해)하는 것은 逆理(역리)擧動(거동)이므로 ()이란 것을 原則(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境遇如何(경우여하)와 그 殺意如何(살의여하), 또 그 殺生者(살생자)身分(신분) 여하에 따라, 殺生(살생)하는 것이 반드시 ()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혹은 도리어 ()이 될 수도 있다.

 

身體(신체)動作(동작)에 관한 三種(삼종)善惡中(선악중) 第一(제일). 살생의 惡爲(악위)不殺生(불살생)善行(선행)을 설명 하였다.

 

2. 偸盜(투도)惡爲(악위)와 이에 ()하는 不偸盜(불투도)善行(선행)을 설 하고자한다.

 

偸盜(투도)라는 것은, 내게 속하지 않고 원래 ()에 속한 것을 强制(강제)로 나의 소유로 하는 모든 것을 偸盜(투도)라 한다.

그리고 不偸盜(불투도)消極的(소극적)으로, 남의 소유를 나의 소유로 만들지 않는 것을 말 할뿐만 아니라, 積極的(적극적)으로 나의 所有品(소유품)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慈善(자선)行爲(행위)를 말 하는 것이다.

 

偸盜(투도)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가 있고, 不偸盜(불투도)에도 千態萬象(천태만상)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우선 偸盜(투도)의 종류를 살펴본다.

 

남의 물건을 盜取(도취)함에, 자기 자신이 직접 취하는 수도 있고, 타인에게 명령해서 취하는 수도 있다.

흉기를 들고 위협해서 ()를 공포에 떨게 하고 强奪(강탈)하는 수도 있고, 혹은 남의 눈을 속여 몰래 竊盜(절도)하는 수도 있다. 혹은 남에게 빌린 것을 갚지 않고 취하는 수도 있다.

혹은 ()에게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그가 내게 金錢(금전)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게 해서 취하는 수도 있다. 혹은 帳簿(장부)計理(계리)를 애매하게 해서 盜取(도취)하는 수도 있어, 私取(사취)하는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偸盜(투도) 가운데 어떤 것이 重罪(중죄)이고, 어떤 것이 輕罪(경죄)인가를 살펴보면 瑜伽論(유가론) 60권에는 5개 사항에 의해서 重罪(중죄)輕罪(경죄)로 구분하고 있다.

(1) 故意(고의)偸盜(투도)重罪(중죄)가 되고, 不故意(불고의)偸盜(투도)는 경죄가 된다.

(2) 비상한 수단을 강구해서 훔치는 것은 重罪(중죄)이고, 특별한 수단을 궁리하지 않고 우발적으로 취한 것은 輕罪(경죄)이다.

(3) 後悔(후회)慚愧(참괴)의 마음이 일어나면 重罪(중죄)輕罪(경죄)가 될 수 있고, 후회하는 마음과 慚愧(참괴) 하는 마음이 없으면 輕罪(경죄)도 오히려 重罪(중죄)가 되어버린다.

(4) 偸盜(투도)世間(세간)法律制度(법률제도)로서 금하는 것이지, 宇宙大法(우주대법)法性(법성)眞理(진리)로 보면 이것이 죄가 되지 않고, 來世(내세)에도 여기 대한 苦果(고과)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모두 重罪(중죄)에 해당되며, 이러한 邪見(사견)을 갖지 않고,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면, 자연히 慚愧(참괴)의 마음이 일어나게 됨으로 輕罪(경죄)가 된다.

(5) 앞에서는 意向(의향)에 대해 죄의 輕重(경중)을 구별하였는데, 훔치는 물품에 대해서도 죄의 경중이 다 같지 않다.

많은 물건을 훔치면 중죄, 조금 훔치면 경죄가 된다. 혹은 高價品(고가품)을 훔치면 중죄이고, 低價品(저가품)을 훔치면 경죄가 된다.

또한 남의 秘藏(비장)한 물건을 훔치면 중죄가 되고, 秘藏品(비장품)이 아닌 것을 훔치면 경죄가 된다.

또한 남에게 신용을 사서, 그의 귀중품을 지키게 하는 소임을 맡은 뒤, 신용을 어기고, 지켜야 할 물품을 훔치면 중죄가 되고, 그렇지 않는 경우는 輕罪(경죄)가 된다.

또한 가난한 사람의 물품을 훔치면 중죄가 되고, 부자의 물품을 훔치면 경죄가 된다.

또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정이 두터운 사람의 소유물을 훔치는 것은 중죄이고, 내게 박하게 대하는 사람의 물품을 훔치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사람의 물품을 훔치는 것 보다가는 輕罪(경죄)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偸盜(투도)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죄의 輕重(경중)이 변경 될 수가 있기 때문에 重罪(중죄)라고 반드시 重罪(중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輕罪(경죄)라고 반드시 輕罪(경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輕重(경중)의 판단도 일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내게 속할 이유 없는 것을 강제로 내 것으로 해서 내가 갖는 것은 모두 偸盜(투도)罪惡(죄악)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停止(정지)하고 禁止(금지)함과 동시에, 나의 所有物(소유물)을 은혜를 입은 분들에게 바치거나, 혹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행위는 偸盜(투도)에 반대되는 慈善(자선)善行(선행)이다.

 

대체로 사람은 慚愧(참괴) 羞恥(수치)의 정이 있으면 어떠한 사정을 만나도 이 偸盜(투도)행위는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투도는 본래 正理(정리)不順(불순)邪行(사행)이므로 인간의 양심은 이를 수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業緣(업연)約束(약속)으로 사람마다 받는 分福(분복)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억지로 내게 ()하지 않는 것을 ()하거나, 써버리는 것은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佛敎(불교)는 이것을 不正(부정)惡行(악행)으로 삼는다.

 

몇 번을 강조해도 偸盜(투도)는 부정한 惡爲(악위)이다. 惡爲(악위)이기 때문에 이를 행하는 자는 法性緣起(법성연기)의 약속으로 조만간 불행과 고통의 결과를 반드시 받게 된다.

또 투도는 이미 부정한 惡爲(악위)이므로 여기 반대되는 救恤的(구휼적) 행동은 正理(정리)善行(선행)이니 이를 행하는 자는 法界眞理(법계진리)善行(선행)을 행하였으니 조만간 반드시 幸福(행복)과 기쁨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異熟果(이숙과)로서 異熟果(이숙과)를 얻게 되는 것이 된다.

 

다음은 신체상 제3邪淫(사음)醜行(추행)과 여기 반하는 不邪淫(불사음)淨行(정행)에 대해 논한다.

 

邪淫(사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男女(남녀)交際(교제)에 있어서, ()에 순응하지 않고 ()을 지키지 아니하고 姦通(간통)醜行(추행)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邪淫(사음)이라 한다.

 

또한 ()를 따르지 않고 그 ()을 지키지 아니하며 姦通(간통)醜行(추행)을 하고도 豁然(활연)不恥(불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姦通(간통)邪淫(사음)이라 한다.

그리고 그 ()()違反(위반)되는 姦通(간통)醜行(추행)은 맹세코 이를 하지 않는 것과 동시에 八齋戒(팔재계)의 교훈을 지니고 버리지 않는 것을 不邪淫(불사음)이라 한다.

 

다음 邪淫(사음)의 종류를 살펴본다.

 

邪淫(사음)의 종류에도 실로 많이 있지만, 요컨대 未婚者(미혼자)邪淫(사음) 하는 경우와, 旣婚者(기혼자)가 정당하지 않는 邪行(사행)을 하는 경우, 두 가지로 大別(대별) 된다.

未婚者(미혼자)淫行(음행) 중에도, 타인의 (), 타인의 男便(남편)淫行(음행)하는 경우도 있고, 國法(국법)이 허용하는 公娼(공창)에서 賣淫者(매음자)淫行(음행)하는 수도 있다.

淫行(음행)도 이와 같이 다양하게 분류된다.

 

부부간 交接(교접)의 부당한 경우도 4종류가 있다.

 

(1) 부부가운데 한 쪽이 병이 있을 때, 혹은 忌祭(기제)일 때, 혹은 八齋戒(팔재계)를 지키려 할 때, 혹은 부인이 姙娠(임신)을 했을 때, 혹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을 때에 交接(교접)을 하는 것은 非時(비시)邪淫(사음)이라 한다.

(2) 佛陀(불타)安置(안치)한 곳, 혹은 조상의 位牌(위패)를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 혹은 君主(군주)父母(부모)寢牀(침상)으로 정해진 곳, 혹은 장벽이 없는 트인 곳 등에서 交涉(교섭)하는 것도 이것을 悲處(비처)邪淫(사음)이라 한다.

(3) ()를 지키지 아니하고, ()을 지키지 아니하고, 혹은 자기 ()에게라도 입으로 淫行(음행)을 하고, 혹은 肛門(항문)으로 淫行(음행)하고, 혹은 왜곡 된 비정상적인 淫行(음행)非道(비도)淫行(음행)이라 한다.

(4) 交涉(교섭)()를 적당히 지키지 아니하고, 過淫(과음) 과다하게 하는 것을 非量(비량)邪淫(사음)이라한다.

 

이런 행위는 비록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邪淫(사음)惡行(악행)이라 보는 것이 佛敎(불교)이다.

그러대 하물며 부부외의 상대자와 이와 같은 행동을 하면 더 말 할 나위 없다.

 

세간의 法律(법률)은 부부외의 姦通(간통)制止(제지)하지만, 부부간의 사음을 제지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불교는 이를 制止(제지)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佛敎(불교)를 받들고 이 佛法(불법)을 믿고, ()을 바르게 하며 그 一生(일생)을 마치는 자는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淫行(음행)이 없도록 삼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어찌 放蕩(방탕)하고 無賴(무뢰)하며 淫亂(음란)邪行者(사행자)가 되어 그 몸을 더럽히고, 불교의 체면을 손상하면 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邪淫(사음) 가운데 어떤 것이 重罪(중죄)이고 어떤 것이 輕罪(경죄)인가 하면 瑜伽論(유가론)에 적혀있는 다음 사항으로 죄의 輕重(경중)을 구별할 수 있다.

 

(1) 父母(부모)僧尼(승니)를 간음한 자는 重罪(중죄)가 죄며, 그 외에 다른 자와 접촉한 것은 輕罪(경죄)가 된다.

(2) 다른 夫婦(부부) 혹은, 내게 보호해 달라고 위촉받은 자를 淫行(음행)하는 것은 重罪(중죄)이고, 그 외에 자와 접촉한 것은 경죄에 속한다.

(3) 부부 외의 자와 접촉하는 것은 모두가 重罪(중죄)이며, 부부간의 邪淫(사음)輕罪(경죄)이다.

(4) 부부간의 邪淫(사음)에서 悲處(비처)邪淫(사음), 姙娠(임신) 중이거나, 八齋戒(팔재계)를 지키는 중, 혹은 임신 중에 태아가 완전히 성숙 했을 때 淫行(음행)을 하는 것, 悲處(비처) 음행 중 佛殿(불전) 혹은 位牌(위패) 앞에서의 交接(교접)하는 것 등은 重罪(중죄)에 해당한다.

(5) 邪淫(사음)을 하고나서도, 스스로 慚愧(참괴)羞恥心(수치심)이 없고, 태연하게 생각하며 ()라는 생각이 없이, 도리어 邪見(사견)을 증진시키는 등은 모두 重罪(중죄)에 속하며, 이와 반대로 羞恥心(수치심)으로 그 행동이 ()라는 것을 알고 반성하는 것은 輕罪(경죄)에 속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종류의 邪淫(사음), 시간과 장소에 따라 輕重(경중)으로 변하기 때문에, 重罪(중죄)도 반드시 무거운 것만이 아니고, 혹은 가벼워 질 수도 있다. 가벼운 것도 반드시 가볍지만은 않고 혹은 무거워 질수도 있다.

 

이와 같이 輕重(경중)의 구별은 일정하지 않지만 正道(정도)를 지키지 아니하는 淫事(음사)는 모두 邪淫(사음)醜行(추행)이며 ()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맹서코 이를 금해야 하고, 세간의 법률이 용서하지 않는 것, 아니 부모가 용서하지 않는 것, 불교의 계율이 용서하지 않는 淫事(음사)는 모두 삼가 행하지 말며 正道(정도)를 지켜서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邪淫(사음)에 반대되는 禮節(예절) 바른 淨行(정행) 善行(선행)을 행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慚愧(참괴)()을 갖고도 이 邪淫(사음)을 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사음을 正理(정리)公道(공도)에 순응하는 행위라 할 수가 있는가.

 

사람이 慚愧(참괴)羞恥心(수치심)이 있으면, 羞恥心(수치심)에 의해서 邪淫(사음)制止(제지) 되어 禽獸(금수)와 같은 淫行(음행)을 할 수가 없다. 삿된 淫行(음행)을 하게 되는 까닭은 본래 正理(정리)에 순응하지 않고 公道(공도)背反(배반)하기 때문이다.

 

法性眞如(법성진여)()이 일어나면, 天地(천지)가 열려 만물은 각각 ()해진 자리를 잡고 흐트러지지 않는데 이것은 자연의 法則(법칙)이며, 天然(천연)規律(규율)이다.

 

만일 이런 法則(법칙)이 행해지지 않을 때는, 하늘도 하늘에 位置(위치)를 차지할 수가 없고, 땅도 땅의 자리를 보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법칙이 確然(확연)하게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天地(천지) 生物(생물) 萬物(만물) 動物(동물) 男女(남녀) 등은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데 더 깊이 살펴보면 어찌 만물은 劃然(획연)差別(차별)되는 위에 이 법칙이 존재하는 것인가?

差別(차별)法則(법칙)()해지는 것과 동시에, 피차 소통하는 사이에도 역시 그 法則(법칙)()하고 있다.

 

男女(남녀)交接(교접)閨門(규문)에서도 역시 그 法則(법칙)確然(확연)하게 존재한다.

閨門(규문)에도 이미 그 道理(도리)가 있기 때문에, ()를 범하지 않는 자를 일컬어 正道(정도)를 이행하고 정도를 지키는 禮節(예절)있는 인간이라 한다.

 

交接(교접)에도 그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正道(정도)破壞(파괴)하고 正道(정도)逆行(역행)하는 바 禮節(예절) 없는 畜生(축생)과 같은 인간이며 非人(비인)이라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邪淫(사음)根本的(근본적)으로 不正(부정)惡行(악행)이니, 이런 邪道(사도)가 성행되면 크게는 國紀(국기)가 무너지고, 작게는 가정이 무너지고 몸이 망가져, 사회의 질서도 이런 일을 보호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풍조가 만연되면 한 가정을 구제할 수가 없게 되고, 한 사람도 건전하게 지켜줄 수가 없게 된다.

실로 가공할 현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니, 邪淫(사음)을 깊이 경계 하고, 邪淫(사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앞으로 더욱 무서운 苦厄(고액)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法界緣起(법계연기)眞理(진리)이니 異熟因(이숙인)異熟果(이숙과)의 약속이다.

 

 

제2절)  言語(언어)에 있어 4종의 善惡(선악).

 

이미 身體上(신체상)에 관한 3()善惡(선악)에 대해 설명을 다 하였다. 그래서 지금부터 言語上(언어상)에 나타나는 4()善惡(선악)()하려한다.

 

言語上(언어상)四種(사종)善惡(선악)이란 妄語(망어), 惡語(악어), 兩舌語(양설어) 綺語(기어)의 네 가지다. 이에 반대되는 말을 四善(사선)이라 한다.

 

無數(무수)히 많고 다양한 언어 중에 대표적인 것을 들어서 說明(설명)하고, 여타는 槪括的(개괄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1). 妄語(망어)不妄語(불망어).

 

妄語(망어)라 하는 것은 그 말의 眞實性(진실성)이 없고, 詐欺性(사기성)이 있는 모든 언어를 말 한다.

예를 들면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 하고, 보고 들은 것을, 보고 듣지 않았다고 하며, 알지도 못한 것을 안다고 하고,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들과 같이, 모든 것에 眞實性(진실성)이 없는 虛言(허언)을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言語(언어)를 모두 言語上(언어상)의 제1가는 ()으로 하고, 여기에 반대되는 言語(언어) 즉 내가 본 것은 봤다하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은 못 봤다 하고, 혹은 아는 것은 안다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말을 해서, 조금도 남을 속이지 않는 말을 言語上(언어상) 1()이라고 한다.

이를 虛言(허언) 不虛言(불허언)이라 한다.

 

그런데 이 妄語(망어)의 종류 또한 매우 많다. 그러나 많다 해도 이를 大別(대별)하면 두 가지로 갈라진다.

大妄語(대망어)小妄語(소망어)이다.

 

大妄語(대망어)란 혹은 名譽(명예)를 위해, 혹은 利益(이익)을 위해, 어느 장소에서나 神佛(신불)感應(감응)을 얻었다 하고, 혹은 黙示(묵시)를 받았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 실은 得悟(득오) 하지 못하였음에도 나는 自悟獨證(자오독증)하였다고 公言(공언)하며 虛言(허언)으로서 萬人(만인)의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을 道義(도의) 德義(덕의)에 관한 大妄語(대망어)라 한다.

 

小妄語(소망어)라 하는 것은 見聞覺知(견문각지) 하고도 하지 않았다 하고, 見聞覺知(견문각지)를 하지 않고도 하였다고 하는 通常的虛言(허언)이다.

 

그리고 大妄語에도 (), (), ()三種(삼종)이 있고 小妄語(소망어)에도 (), (), ()의 삼종류가 있다.

 

그리고 妄語(망어)라는 것은 本來(본래) 언어에 局限(국한)되는 名稱(명칭)이지만 虛飾(허식)으로서 ()狂惑(광혹)하는 行爲(행위)는 그 身體(신체)에 있어서나 意志(의지)에 있어서나 모두 妄語部類(망어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虛誑(허광)은 언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 虛誑(허광)의 성질이 있는 것은 모두 妄語(망어) 속에 속하는 것이다.

 

身體(신체)에 관한 妄語(망어), 부자가 아니면서도 부자인척하고, 官職(관직)이 없으면서도 관직에 있는 것처럼 하고, 학문이 없으면서도 학문이 있는 것처럼 하며, 德義(덕의)가 없으면서도 德義(덕의)가 있는 것처럼 하는 것과 같이, 外貌(외모)虛飾(허식)하고 假裝(가장)해서 다른 사람을 眩惑(현혹)하는 것이고, 말없는 말로서, 즉 신체상의 妄語(망어)를 범한 것이다.

 

()에 관한 妄語(망어), 예를 들면 자신은 學問(학문)이 없기에 나는 無學(무학)이다.라 하고, 혹은 자신에게 德行(덕행)이 없기에 나는 無德(무덕)하다.하는 등과 같이 그 말은 사실을 나타낸 것이지만, 그 말을 하는 마음속에 나는 無學(무학)이다. 無德(무덕)이다.라고 장식하고, 이로서 상대에게 자기를 學者(학자)이고 有德(유덕)()인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가 있을 때는 () 意內(의내)妄語(망어)를 범한 것이 된다.

 

또한 일찍이 善事(선사)를 하려고 期約(기약)하고도 도중에 廢止(폐지)하고 행하지 아니한 것도 意內(의내)妄語(망어)에 해당된다.

 

이상 많은 종류의 妄語(망어) 가운데 어느 것이 重罪(중죄)이고 어느 것이 輕罪(경죄)에 해당하는가, 살펴보면 律門(율문)에서는 大妄語(대망어)重罪(중죄)이고 小妄語(소망어)輕罪(경죄)임을 논하지 않았기에, 瑜伽論(유가론)의 주장대로 五重(오중)으로 辨明(변명)하려한다.

(1) 僧衆(승중)和合(화합)을 파괴하려는 妄語(망어)는 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2) 내게 恩惠(은혜)가 깊은 부모, 군주, 恩師(은사) 등에 대한 망어는 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경우는 경죄이다.

(3) 殺生(살생)偸盜(투도)邪淫(사음) 등의 방편수단으로 하는 망어는 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4) 다른 사람에게 나는 정직한 자이다.라고 믿게 해서, 나를 믿는 자에게 僞言(위언)을 하는 것은 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경죄이다.

(5) 어떤 妄語(망어)라 할지라도 慚愧(참괴)羞恥(수치)의 마음이 없으며, 詐僞(사위)詐僞(사위)인줄도 모르고, 상대방에게 이것을 진실인 냥 믿게 하는 것을 자신의 辯才力(변재력)이 우수하다고 과시하며 그 ()()인줄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가 重罪(중죄)이고, 이와 반대로 慚愧心(참괴심)羞恥心(수치심)을 갖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妄語(망어)가 있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輕重(경중)이 변하기 때문에, ()한 것도 반드시 ()하지만은 않고, ()한 것도 항상 ()하지 만은 않다.

대체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虛言(허언)僞語(위어)는 모두가 妄語(망어)罪惡(죄악)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고로 이를 制止(제지)하는 것과 동시에, 정직한 말을 하며 한 점의 거짓이 없게 하는 것이 正理(정리)에 순응하는 眞言(진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心口各異表裏不相應(심구각이표리불상응)한 언어는 죄악이 되며, 心口一致內外相應(심구일치내외상응)한 언어는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善事(선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류만이 갖는 특유의 언어란 원래 무슨 용도로 쓰인 것일까.

대략 두 가지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한 가지는 事實(사실)을 설명하고, 義理(의리)를 진술하는 器械的(기계적)인 것이 言語(언어)이다.

 

그래서 하늘을 하늘이라 하고, 땅을 땅이라 부르고, ()()라 하고, ()()라고 하는 것과 같이 實言(실언) 實語(실어)는 언어 고유의 德性(덕성)을 순리대로 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正理(정리) 順應(순응)이라 한다.

 

또 여기에 ()해서 하늘을 땅이라 부르고, 땅을 하늘이라 하며, ()()라 하고, ()()라고 하는 虛言(허언)僞語(위어)는 언어 고유의 德性(덕성)()으로 응용하는 것이기에 이를 正理(정리)不順(불순)한 것이라고 한다.

 

아아! 法性(법성)緣起(연기)인 이 言語(언어)가 어찌 이 같은 僞妄(위망)器械(기계)로 전락 되어서야 되겠는가.

 

두 번째로, 思想(사상)을 대표하기위한 器械的(기계적)인 것이 바로 言語(언어)이다.

그래서 內心(내심)에 있는 바를 발표하는 實言(실언)實語(실어)는 언어 고유의 德性(덕성)을 순리대로 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正理(정리) 順應(순응)言語(언어)라고 한다.

 

또 여기에 ()해서 內部(내부)에 있는 말을 바로 하지 않고, 僞言(위언) 虛語(허어)思想(사상)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은 言語(언어) 고유의 德性(덕성)()으로 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正理(정리)不順(불순)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아! 과거의 善因緣(선인연)으로 인간에게만 특별히 있는 특유한 言語(언어)를 어찌 생각하는 바와 달리 다른 것을 표현해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妄語(망어)는 이미 正理(정리)에 순응하지 않기 때문에, 佛敎(불교)는 이를 惡行(악행)으로 단정하고 엄히 금하며, 또한 實語(실어)正理(정리)에 순응하기 때문에 佛敎(불교)는 이를 善事(선사)로 해서 권장하고 있다.

 

하나는 順理(순리)이므로, 살아서는 만인의 신용을 받고, 죽어서는 幸福(행복)結果(결과)를 얻을 것이다.

또 하나는, 逆理(역리)이므로 살아서는 公衆(공중)의 신용을 잃게 되고, 죽어서는 災殃(재앙)果報(과보)를 받게 된다.

이는 眞如法性(진여법성)의 차별에 따른 異熟因(이숙인) 異熟果(이숙과)法則(법칙)이다.

 

우리는 이를 보고 우리의 언어생활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2). 兩舌(양설)不兩舌(불양설).

言語上(언어상)에 두 번째 善惡(선악)에 관한 말에, 兩舌(양설)과 이에 반대되는 不兩舌(불양설)이 있다.

兩舌(양설)이란 무엇일까.

兩舌(양설)을 혹은 離間語(이간어)라고도 말 한다. 즉 다른 사람 사이에 親睦(친목)을 파괴하기위해, 서로 상반되는 말을 교제 하는 두 사람 사이에 해서, ()()不和(불화) 되게 하는 것이다.

 

더 넓은 뜻으로 논하면, 가령 江山(강산)千里(천리)를 사이에 두고 茫茫(망망)하게 萬里(만리)를 떨어져 있어도, 우리들 인류사회는 서로 同胞(동포)로서 서로 친하고, 서로 사랑하며 友誼(우의)를 돈독하게 해야 된다.

이 우주에 모든 인류는 모두 내가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이를 讚揚(찬양)하고 좋게 봐야 하며, 不和(불화)하는 것을 보면 서로 和合(화합)되게 하려는 것이 人生(인생)德義(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미 친한 것을 보고 讚揚(찬양)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親睦(친목)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로 不和(불화)되게 충동질하는 不正(부정)惡爲(악위)를 한다.

이와 같이 서로를 이간질하여 서로의 親睦(친목)을 깨는 것은 이미 不正(부정)惡爲(악위)라고 했다.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해서, 서로 不和(불화) 한 자를 보면 서로의 調和(조화)를 도모해서 ()()을 믿게 하고, ()은 또한 ()을 믿게 하도록, 서로 상대방의 美德(미덕)을 말하고, 단점을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人生(인생)德義(덕의)이다.

 

이렇게 할 때, 이를 확대하면 社會(사회)總體(총체) 國家(국가) 간의 交流(교류)를 도우고, 작게는 한 개인과 개인 의 친목을 도우는 지대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를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善行(선행)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兩舌(양설)種類(종류)도 살펴보면, 혹은 嫉妬(질투) 하는 마음으로 ()의 불화를 도모하는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의 불화를 꾀하는 수도 있고, 혹은 邪淫(사음)을 위하여 다른 부부사이를 이간질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 種類(종류)가 매우 많다.

 

그러나 요약하면 사람 사람의 親睦(친목)을 방해해서 불화하게 하는 反間的(반간적)인 말은 모두 兩舌(양설)이다.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의 親睦(친목)을 더욱 밀접하게 하고 우애 있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말은 不兩舌(불양설)이라 한다.

 

그런데 이 兩舌(양설)輕重(경중)() 함에, 瑜伽論(유가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5종으로 나누어 생각하였다.

 

(1) 僧衆(승중)和合(화합)을 파괴하는 兩舌語(양설어)重罪(중죄)이고, 凡俗(범속)和合(화합)을 파괴하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2) 殺生(살생) 偸盜(투도) 邪淫(사음) 등을 행하기 위한 방편수단으로 이간하는 兩舌語(양설어)重罪(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3) 父母(부모) 사이, 親密(친밀)夫婦(부부), 朋友(붕우) 사이를 離間(이간)케하는 兩舌語(양설어)重罪(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4) 서로의 사이가 이미 오래도록 친밀했고 정이 특히 두터운 사이를 이간하는 兩舌語(양설어)重罪(중죄)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5) 이런 행위를 했어도 慚愧(참괴)의 마음이 없고 도리어 이를 나의 智略(지략)이고 재주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는 兩舌語(양설어)는 모두 重罪(중죄)이고, 이에 ()해서 慚愧(참괴)後悔(후회)의 마음이 일어나고 그 ()를 알고 그 허물을 뉘우치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兩舌語(양설어)()場所(장소)에 따라 ()하게도 ()하게도 되는 수가 있는데, ()도 혹은 ()하게 되는 수도 있고, ()도 혹은 ()하게 되는 수도 있어, 輕重(경중)의 판단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이 兩舌(양설)不正(부정)惡爲(악위)라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다만 때로는 離間(이간)兩舌語(양설어)善事(선사)로 봐서 용서하는 수도 있다.

그것은 누가 惡友(악우)에게 接近(접근)하는 것을 보고, 그가 나중에 惡友(악우) 때문에 몸을 망칠 염려가 있을 가봐, 그를 가엾이 여겨 惡友(악우)離間(이간)하기 위해 말 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사른 사람의 親交(친교)를 방해하는 離間(이간)의 말은 不正(부정)惡爲(악위)라고 한 이상, 그와 반대되는 말 즉, 사람과 사람 서로의 親交(친교)를 도우고 쌍방의 和合(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을 향해 ()의 좋은 점만 말하고 나쁜 점을 말하지 아니하고, ()을 향해서도 ()長點(장점)을 이야기 하고 그 短點(단점)을 말하지 않는 행동은 順理(순리)善行(선행)이라 한다.

 

인간은 홀로 孤立(고립)해서는 살 수가 없고, 彼此(피차)가 서로 교류하며 協助(협조)하고 相助(상조)하며 각자의 생존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 불교는 천리만리 隔離(격리)된 먼 江山(강산)海陸(해륙)을 멀리 떨어져 있어 그 位置(위치)가 다르고 天地(천지)마저 달라도, 다만 人類(인류)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가 過去世(과거세)에서 同類業(동류업)異熟因(이숙인)에 의해 맺어진 異熟果(이숙과)라 한다.

 

그래서 멀리 全世界(전세계)의 인류는 모두가 내가 사랑해야 할 同伴(동반) 同僚(동료)이다. 畜生(축생)에게도 博愛(박애)를 장려하는 입장이니 하물며 이러한 人類(인류)에게는 누구에게나 親愛(친애)()을 베풀 것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佛敎(불교)人類(인류)를 지금 처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본래 이와 같이 태어나서는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고 業因(업인) 感果(감과)軌道(궤도)를 왕래하며 반복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輪回(윤회)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살펴보면. 사람들은 내게 緣故(연고)가 있는 친척과, 내게 연고 없는 사람으로 구별하지만, 과거 永劫(영겁)의 세월동안 윤회해 오는 과정에서, 현재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혹시 전생 전전생에서 내 부모였을지도 모르고 혹은 자식 이였을 지도 모르며, 혹은 남편, 혹은 부인, 혹은 형, 혹은 동생 등등 여러 가지 친밀한 관계로 맺어진 사람 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사랑해야 할 것이 모든 社會(사회) 일반의 모든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과 서로 교류를 하고 疏通(소통)을 해야 하는 것은 인류만이 가능한 고유의 권리고 능력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작은 私感(사감)慾心(욕심)으로 그들의 親交(친교)를 찬양하지는 못해도, 도리어 그 親分(친분)을 깨트리려는 행위는 어찌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所行(소행)이라 하겠는가!

 

이는 規律(규율)을 범하는 행동이며, 天然(천연)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不正(부정)非理(비리)擧動(거동)이다.

고로 佛敎(불교)는 이를 惡行(악행)이라 한다.

 

이미 離間(이간)하고 破壞(파괴)하는 言語(언어)가 부정한 행위이므로, 맹서코 이런 말을 삼가고, 남의 疏通(소통)을 즐겨하고, 남의 親交(친교)를 조장하는 행동은 天然(천연)規律(규율)에 순응하는 행동이니 이는 正理(정리) 順應(순응)善事(선사)이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행동이다.

 

그리고 離間(이간)하고 남의 사이를 갈라놓는 兩舌(양설)極惡(극악)不正(부정)이니, 兩舌(양설)을 행하면 크게는 국가간의 교류를 방해하고, 혹은 一切(일체)團結(단결)을 파괴하게 되고, 작게는 父子(부자) 兄弟(형제) 朋友(붕우)의 정을 깨트리게 된다.

 

아아! 兩舌(양설)은 이와 같이 미워할 憎惡(증오)의 현상을 나타내는 惡行(악행)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不兩舌(불양설)兩舌(양설)과 반대되는 바람직한 현상을 나타내는 善事(선사)이다.

 

고로 不動(부동)眞理(진리)로서 兩舌(양설)은 내세에서 한량없는 苦果(고과)를 받게 되고, 不兩舌(불양설)極樂(극락)善果(선과)를 얻는다는 것이 異熟因(이숙인) 異熟果(이숙과)의 자연 법칙이다.

 

3.) 惡語(악어) 不惡語(불악어).

 

언어상의 4종 선악가운데 제3惡語(악어)와 이에 반대되는 不惡語(불악어)를 논하고자 한다.

 

惡語(악어)란 사람을 욕하는 모든 過言(과언)과 욕설을 모두 惡語(악어)라 한다. 그와 반대로 남의 ()을 기리고, 남의 ()을 칭찬하는 것과 같은 부드러운 말과 愛語(애어)는 모두 不惡語(불악어)라 한다.

 

바꾸어 설명하면, 暴力的(폭력적)이고 不愛的(불애적)인 말은 惡語(악어)라 하고, 柔和的(유화적) 敬愛的(경애적)言語(언어)不惡語(불악어)이다.

 

()한 사람을 ()하다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리석다 하고, ()한 사람을 ()하다 하고, 불구자를 불구자라고 하는 것 등은 말이 어긋나지는 않지만, 그 말이 품은 뜻에는 惡語(악어)에 속하는 수도 있고, 혹은 上級(상급)인 자를 中級(중급)이라고 卑下(비하)하고, 中級(중급)인 자를 下級(하급)과 같이 말하고, 가볍고 날렵한 자를 원숭이에 비유하고, 暴惡者(포악자)를 이리에 비하고, 우매한 자를 동물에 겨누어 헐뜯는 따위는 이미 惡語(악어)增長(증장)한 것이다.

 

이런 惡語(악어)의 종류도 많다.

혹은 그 사람의 面前(면전)에서 麁言(추언)을 하는 수도 있고, 혹은 그 사람이 없는데서 몰래 험담을 하는 수도 있고, 혹은 公衆(공중) 앞에서 욕을 하는 수도 있고, 혹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마주 대하고 욕을 하는 수도 있으며, 혹은 내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남을 욕하는 수도 있고, 혹은 그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으로 惡語(악어)를 하는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喜樂(희락)을 위해 麁言(추언)을 하는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 暴言(폭언)을 하는 등등 惡語(악어)의 종류는 너무나 많다.

이렇게 惡語(악어)에는 그 종류가 무척 많은데, 이런 惡語(악어)輕重(경중)역시 시와 때에 따라 다르다.

극히 심한 暴言(폭언)惡言(악언)重罪(중죄)이다. 그렇지 않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내게 은혜를 베푼 父母(부모), 恩師(은사), 君主(군주) 등을 麁言(추언) 하는 것은 重罪(중죄)이다. 각별한 은혜가 없는 자를 麁言(추언)하는 것은 輕罪(경죄)이다.

慚愧(참괴)懺悔(참회)의 정이 있는 것은 輕罪(경죄)이고, 慚愧(참괴)懺悔(참회)()이 없는 것은 重罪(중죄)이다.

 

佛敎(불교)戒律(계율)에는 開遮(개차)二門(이문)이 있고, 佛陀(불타)敎海(교해)折伏攝受(절복섭수)二門이 있다.

고로 때와 장소에 따라 暴言(폭언)이나 麁言(추언)이 죄악이 되지 않는 수도 있다.

예를 들면 釋迦(석가)提婆達多(제바달다)呵責(가책)하며 그대는 다른 사람이 뱉은 침을 먹어야 하는 자이다.라 하였고, 또한 佛經(불경) 가운데 어리석은 比丘(비구)呵責(가책)하여 그대는 啞羊僧(아양승)이다.하였고 또 () 가운데 亡者(망자)의 유물울 훔치는 자를 욕하여 그대는 旃陀羅(전타라)의 마음을 일으켰다.라고 하는 등등이다.

 

요컨대 慈愛(자애)를 위해, 利益(이익)을 위해서 麁言(추언)을 하여, 그자가 悲憤(비분) 思念(사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暴言(폭언)麁言(추언)은 죄악이 아니라고 알자.

남을 利益(이익)되게 하기 위한 慈悲(자비)의 마음에서 나오는 예외적인 麁言(추언)을 제외하고, 그 밖에 모든 暴惡(포악)하고 輕薄(경박)하고 卑賤(비천)한 말은 다 죄악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이에 반대되는 敬愛(경애)롭고 尊重(존중)스러운 和言(화언) 愛語(애어)는 모두가 善事(선사)라고 하는 것이 佛敎(불교)이다.

 

그런데 왜 暴言(폭언)麁言(추언)()이라 하고, 和言(화언)愛語(애어)()이라고 하는가.

 

慈悲心(자비심)이 안에 있어 다른 사람을 敬愛(경애)하고 남을 尊重(존중)하는 것은 宇宙(우주)公理(공리)이고, 人生(인생)本分(본분)이며 天然(천연)의 예절이므로, 이에 逆行(역행)하는 言語(언어)罪惡(죄악)이 되고 이에 順行(순행)하는 言語(언어)善行(선행)이 되는 것이다.

 

또한 佛敎敎理(불교교리)에서 이를 논하면, 일체중생은 각자의 業緣(업연)에 따라 迷悟(미오) 智愚(지우) 貧富(빈부) 貴賤(귀천) 등 그 현상이 다르지만 各自(각자)의 본성을 살펴보면, 아무리 卑賤(비천)한 자라도 佛陀(불타)와 동등한 性品(성품)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에서 이르기를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이라 하였고, 혹은 如來心(여래심)이라 하였고, 혹은 本覺(본각)이라 하였으며, 혹은 佛性(불성)이라고도 하였다.

 

아아! 일체중생은 이와 같이 존귀한 佛性(불성)을 모두 다 갖고 있다. 그렇다면 가볍고 천한 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두를 다 같이 敬愛(경애)하고 尊重(존중)하는 것이 天然(천연)의 법칙인 고로, 이들 모든 사람을 敬愛(경애)하고 尊重(존중)하는 言語(언어)正理(정리)에 순응하는 ()이고, 동시에 그들을 천시하고 욕하는 언어는 正理(정리)에 위배되는 惡行(악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첫째는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善行(선행)이기에 法性眞如(법성진여)差配(차배)로서 미래에 적당한 좋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또 하나는 正理(정리)에 배반하는 惡行(악행)이므로 역시 正理眞如(정리진여)應報(응보)慘酷(참혹)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異熟因(이숙인) 異熟果(이숙과)自然法則(자연법칙)이다.

 

4. 綺語(기어)不綺語(불기어).

 

언어상의 善惡(선악)의 제4綺語(기어)와 그에 반대되는 不綺語(불기어)에 대해 ()하고자한다.

 

우선 綺語(기어)란 대체로 阿附(아부) 侫辯(영변)으로 윗사람에게 판단을 어긋나게 하고, 巧言(교언)飾語(식어)로서 아랫사람의 비위를 당기고, 戱言(희언) 嬉語(희어)로서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또한 자기의 마음도 放逸(방일)하게 하는 것과 같은 言語(언어)를 모두 綺語(기어)라고 한다.

 

요컨대 無益(무익)巧言(교언) 戱語(희어)는 모두 綺語(기어) 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해서 말이 없으면 綺語(기어)도 없고, 만일 말을 한다면 반드시 利益(이익) 되는 말, 道理(도리)가 있는 말, 必要(필요)한 말 만을 정직하고 明瞭(명료)하게 하며, 無利(무리) 無益(무익) 無義(무의) 無用(무용)한 말을 하지 많는 것을 不綺語(불기어)라고 한다.

 

綺語(기어)를 혹은 難穢語(난예어)라하고, 또는 無義語(무의어)라고도 한다.

그 뜻은 비단에 무늬를 짜 넣는 것과 같이 道理(도리)義理(의리)가 아닌 것을 즐기기 위해, 혹은 私慾(사욕)을 이루기 위해 교묘하게 짜 넣는 것과 같은 言語(언어)라는 뜻이다.

 

綺語(기어)의 종류를 생각하면 역시 여러 가지 가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 身綺(신기)語綺(어기)이다.

 

身綺(신기)라는 것은 말에 장식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上位(상위)에 있는 자가 즐겨 下位(하위)에 있는 자의 옷을 입고, 下位(하위)에 있는 자가 재미로 上位(상위)에 있는 자의 옷을 입으며, 남자가 女裝(여장)을 하고, 여자가 男裝(남장)을 하며, 혹은 僧侶(승려)俗服(속복)을 입고, 俗人(속인)僧服(승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을 身綺(신기)라고 한다.

 

단 저 申崇謙(신숭겸) 장군이 王建(왕건)甄萱(견훤)의 포위망에서 구하기 위하여 서로 복장을 바꾸어 입은 거나, 혹은 肅宗(숙종)民情(민정)을 살피기 위해 平服(평복)을 입고 暗行(암행)을 한 것이나, 혹은 軍中(군중)에서 군사상 위장하기 위해 臣下(신하)主人(주인)의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나, 俳優(배우)가 여러 가지 옷으로 분장하는 것과 같은 것과, 혹은 그 宗門(종문)規定(규정)에 따라 僧徒(승도)俗服(속복)을 입는 경우 등은 모두 예외이다.

 

다음으로 語綺(어기), 有用(유용)한 말은 하고, 無用(무용)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을 原則(원칙)으로 하고, 그와 같은 言語(언어)가 아니고 利益(이익)도 없는데 꾸미기를 좋아하고, 必要(필요)도 없는데 장난으로 쓸 데 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 등이 모두 語綺(어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그 語綺(어기)의 종류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다 따져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綺語(기어)의 종류가 많고 또한 그 ()輕重(경중)도 또한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身分(신분)上流(상류)일수록 綺語(기어)의 죄는 무겁고, 身分(신분)이 낮은 자일 수록 綺語(기어)의 죄는 가볍다.

 

또한 父母(부모)恩師(은사)에 대해 綺語(기어)를 하는 것은 重罪(중죄)이고, 普通(보통) 사람에 대한 綺語(기어)輕罪(경죄)이다.

自身(자신)非理(비리)를 감추고 꾸며서 이를 면하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의 ()을 내가 한 것처럼 뺏으려 綺語(기어)하는 것은 重罪(중죄)이다. 다만 장난삼아 하는 戱語(희어)輕罪(경죄)이다.

 

이와 같이 輕重(경중)을 판별하는 것은 모두 같지 않지만, 이것이 罪惡(죄악)이라는 사실은 다 같다.

 

그런데 世上事(세상사)를 보면 妄語(망어) 兩舌(양설)과 같은 것은 그것이 ()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지만, 綺語(기어)는 그것이 ()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아! 미혹함이 매우 심해서 그렇다.

法性緣起(법성연기)樹立(수립)을 보면, 하늘에 天象(천상)이 있는데 虛飾(허식)이 없고, 日月星辰(일월성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도 그 위치를 紊亂(문란)하게 하지 않고, 땅에는 地理(지리)가 있어 陰蔽(음폐)하는 법이 없고, 山岳(산악)河海(하해)가 뚜렷하게 그 모습을 보여도 條然(조연)히 그 모양을 흩트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天象(천상)地理(지리)虛飾(허식)이 없고 또 陰蔽(음폐)함도 없고, 顯然(현연)하게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며, 條然(조연)히 그 위치를 차지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것과 같이, 그 중간에 生育(생육)하는 우리 人類(인류)도 역시 하늘에 順從(순종)하고 땅에 ()하는 바 ()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이를 신체상에서 말하면 눈은 옆으로 째져있고, 코는 오뚝하며, 두 손은 물건을 쥐고, 두 발로 걷는 것과 같이, 다 있을 곳에 있으면서 위치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는 말도 역시 天地(천지)順理(순리)와 같이 사실을 있는 대로 말하며, 虛飾(허식)없이 진실만을 말해서 錯亂(착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天地(천지)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言語(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虛飾(허식)으로 事實(사실)을 말하지 않고, 혹은 事實(사실)顚倒(전도)해서, 위를 반대로 아래라 하고, 아래를 반대로 위라고 하며, 善惡(선악)顚倒(전도)해서 正邪(정사)紊亂(문란)하게 만드는 言語(언어)를 어찌 正理(정리)順應(순응)하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天地萬物(천지만물)은 작거나 크거나 이를 잘 살펴보면 하나도 無用(무용) 無能(무능)한 것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만 특별히 있는 가장 귀중한 이 言語(언어)를 어찌 無用(무용) 無益(무익)하게 사용해서야 되겠는가.

 

원래 人生(인생)需要(수요)를 위해 器械的(기계적)인 것은 논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言語(언어)人生需要(인생수요)를 위한 器械的(기계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함부로 無利(무리) 無益(무익) 無用(무용)戱弄物(희롱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正理(정리)에 배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綺語(기어)正理(정리)不順(불순)하는 惡爲(악위)로 단정하고, 이를 삼가지 않는 자는 來世(내세)早晩間(조만간) 惡果(악과)를 만나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 綺語(기어)를 능히 잘 勤愼(근신)해서, 하는 말은 모두 眞實(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事實(사실)을 말하고 허식이 없으며, 하는 말이 모두 自然(자연)()에 부합하고 ()에 합당하면, 來世(내세)에 반드시 그 결과 善果(선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眞理(진리)自然(자연)의 법칙인 異熟因(이숙인) 異熟果(이숙과)因果法則(인과법칙)이다.

 

3意內(의내)에 있는 三種(삼종)善惡(선악).

 

지금까지 身體上(신체상)三種(삼종)善惡(선악)言語上(언어상)四種(사종)善惡(선악)에 관해 설 하였다. 그래서 지금부터 意內(의내)三種(삼종) 善惡(선악)을 논하고자 한다.

 

意內(의내)三種(삼종) 善惡(선악)이란, 貪慾(탐욕)瞋恚(진에)邪見(사견)을 말 한다. 또 여기에 하는 不貪慾(불탐욕) 不瞋恚(불진에) 不邪見(불사견)意內(의내)三善(삼선)이라 한다.

 

貪慾(탐욕)이란 무엇일까.

하늘은 이 백성을 낳아 分福(분복)配定(배정)하는데 조금도 錯誤(착오)가 없었다.

이것을 佛敎(불교)는 사람은 각자 자기 業緣(업연)差異(차이)富貴(부귀)貴賤(귀천)千態萬象(천태만상)分福(분복)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각자의 業緣(업연)에 의해서 貧富(빈부)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므로, 상대가 善緣(선연)으로 얻은 分福(분복), 내가 惡因(악인)으로 인해 얻은 禍患(화환)不滿(불만)을 품고 상대의 ()을 탐하거나 慾心(욕심)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分福(분복)을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그가 받은 ()을 탐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과 같은 貪慾心(탐욕심)은 매우 天理(천리)에 어긋나고 正道(정도)에 어긋나는 ()한 마음이다.

또한 이와 반대로 하늘이 附與(부여)하는 것은 萬乘(만승)도 이를 拒否(거부) 못 하고, 業緣(업연)이 나에게 주는 것이라면, 天地(천지)라 할지라도 받을 것이며, 하늘이 내게 주기를 꺼린다면 무엇 하나 ()하지 아니하고, 티끌 하나라도 () 할 마음이 없어야 한다.

동시에, 하늘이 내게 베푸라는 명령과 베풀 명분이 없으면 배품이 없는 것이니, 이에 분복을 바라지 않는 不貪慾心(불탐욕심)은 모두 天理(천리)를 따라서 행하는 正道(정도)順應(순응)하는 善心(선심)이라 하겠다.

 

다음 瞋恚(진에)란 무엇일까.

內心(내심)이 움직여서 外境(외경)에 나타날 경우, 반드시 適意(적의)順境(순경)不適意(부적의)逆境(역경)이 있다.

適意(적의)順境(순경)을 만나면 즉시 앞에서와 같이 貪慾欲求(탐욕욕구)의 마음을 일으키고, 不適意(부적의)境遇를 만나면 즉시 忿怒心(분노심)이 생겨 不滿(불만)感情(감정)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嫉妬(질투)하고, 혹은 怨望(원망)하는 등의 마음을 일으키는데 이런 모든 심적작용을 瞋恚(진에)라 한다.

 

대체로 凡夫(범부)小人(소인)은 습관적으로 順境(순경)을 만나면 기뻐하고, 逆境(역경)을 만나면 震怒(진노)하는 것이 일반적이 樣相(양상)이다.

그러나 事理(사리)를 잘 살펴 깊이 理致(이치)를 밝혀 보면, 貪慾(탐욕)欲求(욕구)正理(정리)順應(순응)하지 않는 것과 같이, 瞋恚(진에)忿怒(분노)도 역시 正理(정리)順應(순응)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 성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을 妄想(망상)分別心(분별심)에서 效果(효과) 없는 것에 성을 내는 것이니, 天地(천지) 山川草木(산천초목) 無機物(무기물)에 대해서도 성을 내는가.

그들은 원래 耳目(이목)이 없고 思慮(사려)가 없기 때문에 성을 낸다 해도 조금도 效果(효과)가 없는 것이다.

 

또한 禽獸(금수)動物界(동물계)에 대해 성을 내 보아라. 그들은 원래 먹이를 구하는 일에만 열중함으로 우리들 인간의 人情(인정)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 동물에게 성을 낼 이유가 없고, 성을 내도 그 효과도 없다.

그리고 人類(인류)에 대해 성을 내도, 人生(인생)電光石火(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고, 生者必滅(생자필멸)無常(무상)함이 迅速(신속)해서, 아침에 성을 낸 사람도 저녁에는 한 줌 흙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枯骨(고골) 灰塵(회진)에 대해 성을 내고 욕을 해도 아무 효과가 없다.

 

그의 하는바가 내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원래 내 行動(행동)이 그의 뜻에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반성해 보라. 그러니 奴僕(노복) 婢僕(비복)을 향해 성을 낼 이유는 조금도 없다.

여기 佛陀(불타)敎理(교리)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萬境(만경)을 보는 것을 마치 畵工(화공)이 여러 가지 怪物(괴물)鬼神(귀신)을 자기 붓끝으로 나타내어, 스스로 그것을 보며 겁을 내기도 하고 혹은 성을 내기도 하는 것과 같이 自心(자심)에서 自心(자심)反射(반사)해서, ()은 좋고, ()不可(불가)하다고 順逆(순역)()을 그려내는 것과 같다 하였다. 마치 自心(자심)이 이것을 보고는 혹은 성을 내고, 혹은 질투하고, 혹은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妄想(망상)이 심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妄想(망상)分別(분별)自心反射(자심반사)利益(이익)없는 곳에 忿怒(분노)하고, 利益(이익) 없는 곳에 意憤(의분)하는 것은 본래 大人(대인)君子(군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

 

고로 智見(지견)이 한번 열리면 萬法唯心(만법유심)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宇宙(우주)내에 성을 내려 해도 성을 낼 ()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로 이를 誠勤(성근)함과 동시에 慈悲心(자비심)으로서 ()를 사랑하고 他人(타인)可憐(가련)히 여기는 不瞋恚(불진에)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이런 마음을 善心(선심)이라 한다.

 

다음에 邪見(사견)이란 무엇일까.

邪見(사견)이란 眞理(진리)覺知(각지)하지 못해서 愚癡(우치) 無明(무명)增長(증장)되는 것을 말 한다.

그러면 어떠한 것을 眞理(진리)覺知(각지) 못하는 愚癡(우치)라 하는가. 상고하면 因果法則(인과법칙)千古(천고) 萬古(만고)가 지나도록, 또한 영원한 未來(미래)에도 不變(불변) 不動(부동)眞理(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因果法則(인과법칙)이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不動(부동)眞理(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愚癡(우치)이다.

 

愚癡(우치)增長(증장)하면 善行(선행)을 하면 至當(지당)善果(선과)가 있고, 惡行(악행)을 하면 거기 맞는 應分(응분)苦果(고과)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因果法(인과법)을 물리치고 善事(선사)를 해도 來世(내세)에 그 果報(과보)가 없을 뿐만 아니라 惡行(악행)을 해도 未來(미래)에 반드시 그 果報(과보)가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와 같은 邪見(사견)自得(자득)正見(정견)인양 固執(고집)하며, 태연히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을 邪見(사견)이라 한다.

또 여기에 ()해서 因果法則(인과법칙)有形(유형)에서 無形(무형)에 이르기 까지, 顯界(현계)에서 幽界(유계)에 까지도 確然(확연)히 움직일 수 없는 眞理(진리)라는 것을 믿으며, 諸惡(제악)을 두려워하고 모든 ()을 이행하려는 思想(사상)不邪見(불사견)善心(선심)이라 한다.

 

意內(의내)三善(삼선) 三惡(삼악)大要(대요)는 대략 앞에서 서술한바와 같이, () ()善惡(선악)은 모두 意內(의내)三種(삼종) ()指導(지도)되어 ()()에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 ()에 있어서의 善惡(선악)根據(근거)는 이 意內(의내)三種(삼종)에 있다.

 

그래서 이것을 三不善根(삼불선근)이라 하고 또한 三善根(삼선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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