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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불교와 기독교와의 對照論(대조론) 3

청남

 

불교와 기독교와의 對照論(대조론) 3

 

) 三世因果論(삼세인과론)二世因果論(이세

인과론)

 

셋째로 불교는 三世因果論(삼세인과론)이고 기독교는 二世因果論(이세인과론)이다.

앞에 두 사항은 學理上(학리상)으로 因果關係(인과관계)를 비교하였지만 이하 세 사항은 전적으로 종교상으로 대조 비교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다 善惡行爲(선악행위)의 인과를 논하며, 내세의 苦樂昇沈(고락승침)을 논하고 있다.

 

불교에서 설하는 바를 크게 나누면, 生前(생전)生後(생후)에 관계되는 인과와, 生時(생시)와 사후에 관계인데, 三世(삼세)를 통하는 善惡(선악)因果關係(인과관계)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사람은 그 용모가 같지 않는 것처럼, 재능 기술 빈부귀천 등 모두가 천태만상이다. 그런데 그 천태만상의 서로 다른 현상은, 모두 生後(생후)의 교육 경험 등으로만 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타고 난 천성과 天稟(천품)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천태만상의 차별이 있는 것은 어떤 원인에서 일까, 하면 한마디로 각자가 태어나기 이전인 生前(생전)의 여러 가지 行爲(행위)가 그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열 사람이면 열 가지로 다르고, 백 사람이면 백 가지로 다르게 태어나고,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은 모두가 그 전생의 지은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현재의 천태만상 다른 행위로 인해,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내세에서도 현세에서와 똑 같이 천태만상의 다른 果報(과보)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現世(현세)의 고락은 過去世(과거세) 행위의 관한 결과이고, 未來世(미래세)昇沈(승침)은 또한 현세의 행위에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라고 하는 것이 三世因果論(삼세인과론)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설을 보면, 그들은 ()이 전적으로 현세 우리 인간의 고락 昇沈(승침)의 원인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세의 승침은 우리의 현세 행위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논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二世(이세)에 관한 인과론만 논하지, 불교처럼 삼세의 인과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은 우리들의 인간과 그 영혼은 신이 창조해 준 것이기 때문에, 신이 창조해 주기 이전의 前生(전생)이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를 처음으로 창조 하였기에, 우리는 ()에서 ()로 생겨난 것이므로, 前生(전생)이란 없는 것이다.

前生(전생)이 없기 때문에 生前(생전)生後(생후)의 인과를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들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 이미 ()에서 ()로 태어났으니, 死後(사후)에도 영혼은 영세 불멸이며, 죽는 법이 없다고 한다.

死後(사후)에도 불멸인 그 영혼은 각자 生前(생전)의 행위여하에 따라 末日(말일) 심판의 날, 심판결과의 따라 혹은 천당으로 승천도하고, 혹은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의 고락승침은 現世(현세) 행위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해도, 현세의 고락은 과거세의 행위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불교와 기독교를 대조 비교하면 불교는 三世因果論(삼세인과론)이고 기독교는 二世因果論(이세인과론)이라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인과론 가운데 어느 쪽이 진정한 도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를 學理硏究規則(학리연구규칙)思想運用方式(사상운용방식)에 비추어 양자의 우열을 비판하면, 불교의 삼세인과론이 우수하고, 기독교의 이세인과론은 뒤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理學(이학)實驗區域(실험구역)이내 것만 논하고 經驗(경험) 이외의 것은 논하지 아니한다.

哲學(철학)은 우리 인간의 사상의 限界(한계) 안쪽만을 논하고 智力(지력) 밖에 것은, 想像(상상)은 할 수 있어도 이를 不可不知(불가부지)의 영역으로 돌리고 ()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存否(존부), 특히 생전과 사후의 상태는 實驗(실험) 할 수 있는 범위 ()에 있고, 또한 확실한 증거로 우리의 상식적인 사상을 만족시킬 만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통상적으로, 인류의 사고를 초월한 ()이나 ()의 영역이며, 그러한 절대자의 敎示(교시)를 신봉하는 길 밖에 다른 방편이 없다.

사람의 지혜로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외 神靈(신령)한 자의 가르침으로 이를 알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이것이 실험으로 검증 할 수 있는 學理(학리)의 규칙에 맞지 아니하고, 사상적 사고방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진리라고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은 生前(생전)에는 () 이었으며, 사후에는 영원불멸이라는 기독교의 설은 學理的(학리적) 규칙에도 맞지 아니하고 또한 사상적 방식에도 부합하지 아니해서 이는 참으로 믿기 어렵다.

 

여기에 반해 우리의 心識(심식)生前(생전) 즉 무시이래로 인과연속하며, 사후 즉 미래세에도 인과가 연속하며 그치지 아니한다, 라는 불교의 설은 學理(학리)의 규칙에도 맞고, 사상적 사고방식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이를 믿기가 매우 쉽다.

 

우리들이 미래 아직 닥치지 않는 일을 추리하는 대는 주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추정 하는 것이다.

물리학자가 물질불멸의 원리에너지 불멸의 원리를 발표할 때 모두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런 결론을 얻은 것이다.

천문학자가 몇 년 뒤에는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혹은 몇 억 년 뒤에는 지구와 태양도 파괴 될 것이다 하는 推論(추론)도 모두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이런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學理(학리) 연구의 규칙에 미래를 ()하는 근거는 반드시 과거 경험실적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이 있고,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다고 믿으며, 그때도 지금처럼 사계절이 순환하고 여름이 되면 덥고 겨울이 오면 얼음이 언다고 꼭 믿고 있다.

또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노쇠해져 드디어 죽게 되는데, 이는 나나 너나 누구나 다 그렇게 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아직 닥치지도 않는 미래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꼭 되리라 확신하고 있을까?

그것은 과거의 여러 경험으로 얻은 결과이고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방식은, 미래의 사실을 아는 데는 반드시 과거의 사실을 참고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 방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의 문제, 과거 생전의 문제, 또는 사후 내세의 사항 등등 모두도 다 이러한 思想的(사상적) 運用(운용)方式(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聖靈(성령)이니, 하늘의 啓示(계시), 黙示(묵시), 豫言(예언)이니 하는 등등은 모두 우리들 일반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非學理的(비학리적)인 일들이다.

기독교의 聖靈說(성령설)은 인생의 성령은 생전에는 없었고, 우리는 무에서 생겨났으며, 사후에는 영영 멸하지 아니하고 불멸이라 한다.

이는 학리연구의 규칙에 맞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사고의 情緖(정서)에도 모순투성이다.

그런데 혹자는 종교와 학문을 동일시해서 학문의 規律(규율)로 종교를 논하지 말고, 종교는 학리의 영역 밖에 있으니, 사람의 지혜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종교는 사상의 한계를 초월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상적 이론에 위배되는 것을 盲信(맹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상적 이론을 초월한 것이라도 다소라도 사상이론에 부합하는 것을 믿으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교라고 해서 어찌 理法(이법)과 거리가 멀고 불합리한 것을 盲信(맹신) 할 수 있단 말인가.

 

萬有(만유) 일반의 법칙에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이다.

기독교의 성령도 그 시작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끝이 있어서 사후에는 멸하게 되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사후에 끝이 없다고 한다면 그 시작도 없어야 되는 것이다.

눈을 돌려 인생의 天稟(천품)과 일생의 운명을 살펴보라.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인생의 천품은 무엇에 의해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를까. 우리들 인생의 운명은 무엇에 의해서 각각 달라졌을까. 매우 의문이 가는 점이지만, 세간의 學理上(학리상)으로 생각해보면, 유전적인 원인에서, 혹은 교육 정도에 의해서, 또는 경험에 의해서.... 등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만으로 개개인의 천품과 운명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고 말 할 수가 있겠는가.

 

天稟(천품)과 운명의 일부는 학리 상에서 말 하는 유전적 요인과 교육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완전한 해석을 그것만으로 얻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의 천품과 운명이 서로 다른 대부분의 원인은 전생에서 지은 선악의 행위가 원인이 되고, 그 결과 현세에서 千變萬化(천변만화)한 여러 가지 천품과 운명이 다른 사람이 태어난다고 설명한다.

生前(생전)의 행위에 의해, 生後(생후)의 행위 즉 敎育(교육)經驗(경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사정들이 결정되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理論(이론)으로 보아도, 事實(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또는 理學(이학) 연구의 規律(규율)에 비추어 보아도, 기독교의 前無後有論(전무후유론)은 어리석은 일이며, 불교의 前有後有論(전유후유론)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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