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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비들기 효부

청남

 

 

비들기 효부

비둘기 고기가 약이다

 

박씨는 예천군 예천읍 상리라는 곳에서 18285월 박 창성 씨의 3 1 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가 비둘기 한 쌍이 품 안에 날아와 안기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를 잉태하였다고 부모는 그가 출생하기 전부터 훌륭한 자녀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자라면서 박씨는 한 반도 부모의 뜻을 거역한 일이 없었으며 동생들과 다투는 일도 없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이라 낮이면 농사일로 밤이면 바느질로 가사를 거들었다.

 

그는 18 세 되던 해 문경군 농암면 종곡에 사는 강 미옥이라는 사람과 결 혼을 하게 되었다. 강 미옥의 부친은 강 지원으로 원래 의성군 봉양면 길천 동에 살다가 부인과는 사별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다.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홀로 계시는 시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박씨는 어려운 살림 보다 시아버지를 어떻게 편히 잘 모셔야 하는가에 늘 신경을 쓰게 되었다. 봄에는 산나물을 뜯어다가,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아서 상에 올렸다. 겨울이면 잘 갈무리해 둔 홍시로 간식을 드렸고 한밤중 군불을 넣어 방이 춥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가사를 잘 꾸려나가니 원근 마을의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다섯 아들을 두게 되었으나 갑자기 시아버지께서 병을 얻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박씨에게는 청천의 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침을 놓고 약을 드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박씨는 시아버지께서 득병한 날부터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고 좋은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어른을 잘못 모신 탓이라 생각하고 극진히 간병을 하였다. 그러나 병세는 날로 악화되고 집안 형편은 기울어 계속 의원을 부를 수도 없고 하여 의원에게 간절히 청하기를 의원님 제가 침을 놓도록 침술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애원하니 의원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침술을 가르쳐 주었다. 전부더 침 놓는 것을 자세히 보아 왔고 가르침도 받아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으나 그래도 시아버지께서 아파하실까 하여 자신의 몸에다 먼저 침을 찔러 보고 난 후 시아버지께 침을 놓아 드렸다. 탕약도 정성껏 달여 스스로 맛을 보고 난 후 드시게 하였다.

 

병이 나병(문둥병)이라 손가락도 곪아 떨어지고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돋아 피고름이 나오니 악취는 말한 것도 없고 수저를 잡을 수도 없으니 조석으로 음식을 떠 드려 자시게 했으며 피고름 묻은 옷이며 이부자리는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한밤중에 먼 개울에 나가 빨았다.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니 대소변도 손수 받아냈다. 물론 밤이면 시아버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세월이 10 년이나 지났으나 그의 정성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고 오히려 병을 고쳐 드리겠다는 일념은 더욱 강해졌다. 이를 보다 못 해 남편이 여보, 하룻밤 만이라도 좀 편히 쉬구려, 내가 대신 오늘 밤은 간호를 하 겠소.’ 하였으나 그는

시어른께서 저토록 심신의 고통을 겪고 계시는데 내 어찌 편히 잠을 자 겠어요? 모두가 내 죄인데, 당신이나 좀 쉬구려. 아이들과 고생이 많지요? 죄송해요.’

하는 것이었다.

 

어느 겨울날 시아버지께서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추 운 겨울날 비둘기를 구할 길이 없었다. 박씨는 이 날부터 밤마다 집 뒤에 있는 은장산 큰 바위 밑에 올라가 물 한 사발을 떠 놓고 빌었다. 비둘기를 내리시어 우리 시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한 지 백 일이 지나도 비둘기를 구할 수가 없어 스스로 정성이 부족하다 하여 은정산 아래 위를 헤매며 통곡하다가 집으로 돌아 왔다.

 

그날 밤 시 아버지 곁에서 시 아버지를 간병하고 아침밥을 짓기 위해 방문을 여니 산비둘기 한 쌍이 방으로 날아들었다.

! 하느님의 도움이신가. 뜨거운 눈물이 쏟아 졌다. 그것을 잡아 찜을 하여 시아버지께 드렸더니 그 날부터 병에 차도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2 년여에를 지나고 나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고을에서는 하느님이 그의 효성을 시험하기 위해 시아버지께 나병을 내렸고 박씨의 효행으로 이 병을 고쳤다 하여 문정 성시를 이룰 정도로 여러 곳의 사람들이 찾아 들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발병에서부터 완쾌되기까지 12 , 그 후 박씨는 또 한 딸을 나으니 모두 5 1 녀의 자녀와 화목하게 살다가 시아버지는 10여 년 후 69 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행이 널리 전해지니 문경, 상주, 함창, 용궁 등지의 이백여 명 유생이 정묘년(1867), 이 지방을 순행하던 암행 어사에게 진정을 하여 어사의 친필과 마패가 찍힌 글을 주며 성주 군수로 하여금 이 사실을 적어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게 하면 홍문을 내리도록 하겠다며 어사는 떠났다. 성주가 박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박씨는 내 일을 했을 뿐인데 홍문을 내리다니, 홍문을 내리면 자결을 하겠다 하여 상소문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1887 459 세로 박씨가 세상을 떠나니 문경, 상주, 예천 등지의 유림이 그의 효성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효행비를 세우고 후에 비각을 건립했는데 비문은 김천의 거유 공산 선생이 손수 지었고 비각의 이름을 백원각이라 하여 문경군 농암면 종곡 3 리에 있다. 1983년까지 그의 증손 강 신문이 이 비각을 관리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 강 신봉이 상주군 이안면 가장리에 있는 삼산사 주지로 불도를 닦으며 그의 증조 할머니에게 대한 모든 자료(행장록, 어사의 글, 순상의 글 5 , 비문, 유림들의 글 10 여 편 등)를 소장하고 있다. 강 신봉 씨도 증조모의 피를 이어 받았음인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실 때 단지 수혈을 하여 유생들의 천거로 효행자로 수상 한 바 있다.

박씨는 갔으나 그의 거룩한 행적은 지금도 남아 백원각 앞을 지나는 길손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박 광수: 문경군 문경중학교 교사〉 〈창고 문헌孝烈行誌

참 고공산 송 준필 찬 묘갈문, 行狀錄, 박씨 행적 찬양문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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