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지 이야기
서갓·서간·서가촌 서가현촌 서가지 이야기 -안동_
가수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갓, 서간, 서가촌, 서가현촌, 서가재, 서가지, 서지 등으로 불렀다.
안동시에서 퇴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안막재(청머리재)를 넘어가면 견훤과 삼태사의 전설을 간직한 가수내가 나타난다. 가수내를 지나 기름땅 고개 마루에서 약 400m쯤 더 가면 길 오른편으로 빠지는 내리막 길이 보이는데, 이 길로 내려가서 우회전하면 서갓이고, 좌측으로 꺽어 굴다리를 지나 직진하면 서동촌과 태리로 가는 길이다.
이 마을은 가수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서가현촌으로 부르다가 후에 서지로 불렀는데 고려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남휘주(南暉珠, 1326∼1361) 공이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고, 그 뒤 직강(直講) 이봉춘(李逢春, 1542∼1625)이 이어서 살았다고 하였다. 와룡면지(臥龍面誌)를 보면 직장(直長) 이한(李漢, 1499∼?)공이 주촌(周村)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간서당(西澗書堂)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원래 이 마을은 삼판서의 출생지이며 아주 부촌이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하러오니 마을 사람은 시주를 많이 할테니 유랑민이 적게 오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숲을 가꾸고 동구 뒤 암석을 뜯어내면 손님이 적게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마을사람은 스님의 말대로 숲을 가꾸고 암석을 뜯어내었는데, 이 때 학 세 마리가 날아갔다고 하며 곧 동리가 서서히 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이와 유사한 전설로 선돌뱅이 전설이 마을에 전한다. '이 마을은 옛날에 심판서와 남판서 등 3판서의 출신지이고 마을 안에 기와집이 꽉 들어선 부자 동네였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와 더불어 거지들도 동냥을 위해 마을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집들은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어 돌려보냈으나 그 중에서도 이것을 귀찮게 여기는 며느리를 둔 집이 하나 있었다.
이 며느리는 몰려드는 거지들을 어떻게 하면 오지 못하게 할까하고 생각하다가 하루는 시주를 받기 위해 집에 들어온 스님에게 거지가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물었다. 많은 시주를 받은 중은 한참 망설이다가 "저기 서 있는 선돌뱅이를 돌려놓으시오. 그러면 손님도 줄고 거지도 모이지 않을 테니.."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그리하여 마을을 향해 아이를 업고 들어오는 모양을 하고 있던 선돌을 돌려놓게 되었는데 그 이후 기와집으로 꽉 차서 살기 좋던 이곳 부자 마을은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떠나고 폐동(廢洞)이 되어 오늘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뜻 있는 사람들은 선돌을 본디 자리로 되돌려 그 옛날 부자마을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나 지금껏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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