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의정부 [경기도]
- 정무를 의논하고 국보를 받았다고 -
조선 태종은 태조의 다섯 째 아들로 전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 창업시에는 태종의 공이 자못 컸다.
태조가 건국 후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으로 세자를 봉하자 간신 정도전 등이 방석에게 붙어서 태종을 모해(謀害)코자 하므로 태종이 병사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하는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이에 태조가 크게 노하여 장자인 정종에게 선위(禪位)하시고는 밤중에 함흥 구저로 가시어 돌아오시지 않았고, 태종은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어 돌아오심을 청하였으나 보내는 사람마다 모두 활로 쏘아 죽이니 한 사람도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속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뒤 태조께서 오랜 동안의 노기(怒氣)가 많이 풀어지자 함흥을 떠나 태종 2년 12월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 오시었는데, 태종이 마중하시러 교외에 장막을 성설할 즈음, 상신(相臣) 하륜 등이 태종에게 태조의 노기가 아직도 다 풀리지 아니하시므로 모든 일을 미리 염려해서 차일에 쓸 기둥을 큰 나무로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그리하여 큰 아름드리 나무로 기둥을 하였다한다.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날 때, 태종이 면복(冕服)으로 나아가자 태조께서 바라보시고는 노기가 일어 활을 쏘았고 태종이 창황히 큰 기둥 뒤에 붙어 서서 화살이 기둥 가운데 맞았다.
이에 태조께서 웃으시고 노기를 불으시면서 태종을 보고, 국보(國寶)를 땅에 던지면서, ‘옛다, 너의 욕심내는 것이 이것이니 가져가거라.’ 하였다.
태종이 이를 받고 잔치를 열려고 할 때, 하륜이 태종에게 귓속말로, ‘헌수(獻壽) 때에 잔을 중궁에게 주시어 나아가게 하시옵고 친헌(親獻)치 말지니 이다.’ 하였다.
태종이 하륜의 말대로 종관으로 진작(進酌)케 하니, 태조께서 술을 마시고 나서 소매 속에서 철여의(鐵如意)를 내어 보이시고 태종이 가까이 오면 내리칠 생각이었다고 하시었다.
이리하여 태조는 서울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의 양주군 진접면 내각리의 대궐 터에 풍양궁을 짓고 사시다가 이 대궐에서 승하하셨다.
각 대신들은 서울에서 지금의 의정부까지 와서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는데, 그래서 이곳을 ⌜의정부(議政府)⌟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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